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1)
“아, 저기 대열을 이루고 있는 집단...저거 맞죠?”
“.....”
달아나는 아케니온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우선 가루루의 비행속도가 워낙 빨랐고, 아르유가 정령 유티넬을 불러 지속적으로 악마를 탐지한 덕분이었다. 그들은 막 황야를 지나 산기슭의 초입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그들을 발견한 순간 유미르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는 가장 먼저 카이안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는 양손이 결박당한 채 제랄드의 말에 타고 있었다. 아케니온의 제랄드. 발렌스 상회를 전멸시킨 장본인. 이미 복수를 잊은 그녀이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엮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분노나 증오의 감정은 일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어떻게 카이안을 구해낼지에 대해서만 가득 차 있었다. 무섭도록 차갑게.
“저쪽에서 아직 우릴 발견하지 못했군요. 이대로 거리를 유지한 채 앞질러 가줘요.”
“어..어쩌시려고요?”
“어쩌긴요. 뻔하잖아요.”
‘뻔하다’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며 유미르네는 싱겁게 웃었다. 평생 쥐지 않으리라 다짐했음에도 다시금 손가락에 닿는 검의 감촉은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아르유는 고도를 낮춘 채 산을 빙 돌아 아케니온을 앞질렀다. 유미르네는 아케니온의 이동경로에 위치한 좁은 협곡에 가루루를 착지시켰다. 지세가 좁아 말이 한꺼번에 진입하기 힘든 데다 한 번 멈추면 전진이든 후퇴든 여의치 않은 지형이다. 단신으로 싸우기엔 이보다 더 좋은 장소도 없었다.
태양빛이 강렬한 오후였다. 어디선가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향기로운 풀내음과 지저귀는 산새 소리, 상쾌한 공기. 만약 다른 삶을 살았더라면 소풍을 와도 좋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동생과 함께 왔다면 더욱 좋았겠지. 그녀는 쓰게 미소 지었다.
“맞서 싸우실 거예요? 저쪽은 숫자가 서른은 되어 보이던데요.”
“달리 다른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건 의외로 익숙하기도 하고.”
“그런...그럼 저도 함께 싸울게요!”
아르유가 당차게 말했다. 의외의 제안에 유미르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암보다도 어려보이는 소녀가 싸움이라? 실제 전투능력은 차치하고라도 그 용기 있는 행동이 기특하여 그녀는 아르유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물론, 유미르네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린 아가씨가 겁도 없네. 큰일 날 소리를 다 하고.”
“저 생각보다 강해요! 아까 보셨잖아요. 저는 정령을 다룰 줄 안다고요. 분명 힘이 될 거예요.”
어쩌면 그녀 말대로 전력에 보탬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미르네는 재차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것은 자신의 싸움이다. 게다가 아직 사춘기도 안 지난 어린 소녀를 이런 위험한 전투에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보다 부탁이 있어요 아르유. 지금쯤 루도나 마리네가 병력을 이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예요. 이 새를 타고 그들이 길을 헤매지 않게 인도해줘요. 난 그때까지 시간을 끌고 있을게요.”
“하지만...”
“해줄 수 있죠?”
시간을 끈다는 것은 거짓말. 아르유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연하기까지 한 유미르네의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르유가 가루루에 올라타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그때까지...조금만 버텨주세요. 부탁이에요!”
유미르네는 싱그럽게 웃으며 답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꼬마 아가씨.”
아르유가 떠나자 유미르네는 한적한 산길에 홀로 남겨졌다. 그녀는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전장이 될 장소다. 작전은 명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가져온 가방끈을 풀기 시작했다.
****
아케니온은 태생적으로 용병단이다. 아무리 경험이 많고 실력이 출중한 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그 근본을 벗어날 수는 없다. 실제로 제랄드와 게네스를 포함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명예니 복수니 하는 것보다 돈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있다. 때문에 개중에는 악마와 계약한 제랄드의 스케일 큰, 혹은 리스크 높은 결정에 반감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악마를 믿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돈, 어떻게든 큰 건수를 잡아 이 지긋지긋한 용병단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때문에 길거리에 수북이 흩뿌려진 보석들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막 협곡의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자칫 뒤따라오던 이들이 부딪쳐 낙마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이게 다 뭐지?”
“어이! 이것 봐. 이거 루비잖아! 이 크기 좀 보라고. 와하하하.”
“이 토파즈는 또 어떻고. 이 정도면 집을 한 채 살 수도 있겠군.”
“먼저 줍는 자가 임자지 이런 건!”
뒤따라오던 제랄드가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이미 그와 게네스를 제외한 모든 아케니온 단원들이 보석 줍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멍청한 놈들! 어서 말에 올라타 대열을 갖춰라. 이런 곳에서 우물쭈물할 시간 없단 말이다!”
그가 바락바락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명령을 귓등으로 듣는 이도 없었다. 근처에 있던 단원 하나가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큼지막한 진주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대장, 이걸 보십쇼. 전부 진짜입니다. 완전 대박이라고요.”
“멍청한 놈들. 이건 함정이다! 1초라도 빨리 루프리모의 아이를 드라칸에게 데려가야 한다고!”
하지만 제랄드의 일갈에도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귀금속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심지어 황홀하기까지 했다.
“이거면 낙향해서 평생 놀고먹을 수 있습니다 대장. 신의 아이니 뭐니 하는 거에 목숨 걸 필요 없다고요.”
“이...!”
이미 대열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악마들은 잔뜩 화가 났으나 그렇다고 보석을 줍는 이들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제랄드의 ‘보좌’였기 때문에, 설령 이런 돌발상황이 일어나도 모든 책임은 그가 지는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이 시점에서 제랄드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물 한 모금 마시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말을 달려왔다. 설마 이보다 빨리 쫓아온 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설령 그게 가능하더라도, 이 많은 보석을 무슨 수로 설명한단 말인가. 단기간에 이런 엄청난 규모의 보석을 준비할 수 있는 인물이 있을 리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시야에 검은 물체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어디선가 떨어진 낙숫물의 그림자처럼, 유려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아케니온의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칠흑으로 뒤덮인 작은 체구의 여인은 빛나는 보석 더미에 비하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때문에 누구도 그것이 그들에게 최후를 안겨줄 사자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가 두 자루의 검을 뽑아들 때까지는.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물론 제랄드였다.
“유, 유미르...”
카카카칵! 펄럭이는 망토 사이로 두 자루의 검이 아름다운 궤적을 남겼다. 그녀가 만들어낸 원무를 중심으로 근처에 있던 다섯 명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단말마조차 없었다. 한 차례의 춤을 끝마치고서 유미르네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보라고. 돈이라는 건 언젠가 쓸 데가 있다니까.”
보석에 정신이 팔려 아케니온의 진형은 엉망진창이었다. 때문에 유미르네가 제랄드에게 쇄도할 때도 그녀를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게네스가 뒤늦게 달려왔으나 그녀의 신들린 공격에 맥없이 밀려났다.
그녀는 곧장 제랄드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빌어먹을!!”
카앙! 첫 일격은 막아냈다. 그러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흐트러진 틈새를 노리고 에스터크가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제랄드는 자신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유미르네를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 네 합만에 그는 손등을 찔리고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것으로, 유미르네와 카이안 사이에는 아무런 방해꾼도 남지 않았다.
“당신...!”
카이안은 놀란 눈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미르네가, 그것도 단신으로 자신을 구하러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황을 따질 틈도 없이 유미르네가 그를 끌다시피 협곡 입구로 데려갔다. 좁은 입구를 방패삼아 카이안을 보호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머저리 같은 놈들! 어서 루프리모의 아이를 되찾아와!”
제랄드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의 명령에 부하는 물론 동행한 악마들도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프리모의 아이를 놓쳤을 때 드라칸이 어떤 벌을 내릴지는 상상하고도 싶지 않았다.
슬러터 중 하나가 본모습으로 형태를 바꾸며 말했다.
“이래서 인간과는 손을 잡지 말자고 한 거지. 그깟 반짝이는 돌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멍청한 놈들.”
원형으로 돌아간 그는 거대한 지네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다만 상체를 곧추세워 그 모습이 더욱 기괴하게 느껴졌다. 그가 말했다.
“죽기 싫으면 신의 아이를 넘겨라...고 해도 안 듣겠군. 뭐 좋아.”
그는 수십 개의 다리를 이용해 빠르게 접근해 왔다. 그러나 유미르네는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예정된 각본처럼 그녀는 악마의 가슴을 찌르고, 회전하며 배와 명치, 이마를 차례로 벤 뒤 목 한 가운데에 에스터크를 꽂아 넣었다. 이어 숏소드로 확실히 목을 잘라내 마무리를 지었다.
“....미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한 자신도 어이가 없는지 슬러터의 몸체는 죽은 뒤에도 한참을 꿈틀거렸다. 유미르네가 머리통을 집어 던지며 말했다.
“다음. 슬러터 하나로는 영 성이 안 차네.”
그러자 또 다른 악마가 거칠게 포효하며 달려 나왔다.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 초 후 악마는 전신에 구멍이 뚫린 채 나동그라졌다. 유미르네는 쓰러진 악마의 숨통을 확실히 끝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슬러터 둘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지자 아케니온 진영에 공포가 감돌았다. 숫자로는 압도적인 우위에 있음에도 그들은 섣불리 유미르네에게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특히 지난 날 그녀가 보여준 광기를 기억하는 자들은 무기를 제대로 쥐지도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제랄드, 스트라이더, 심지어 뒤편에 서 있던 카이안조차 그녀가 보여준 위용에 질려 일시적으로 사고가 마비됐다.
곡예를 부리듯 그녀의 숏소드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칼끝은 정확히 아케니온을 향했다. 그리고 등진 그림자는 남동생을 완벽하게 가리고 있었다.
유미르네는 카이안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그에게 관심이 없다는 인상을 남기려고 일부러 앞으로 치고 나갔다.
“아하하! 겁에 질린 표정이 보기 좋네 제랄드. 오지 않겠다면 이쪽에서 가줄게.”
순간 카이안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이유는 몰라도 그녀를 붙잡아야 한다고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갈피를 잡지 못한 손은 헛되이 허공만 휘저었다. 그녀가 멀어져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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