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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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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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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57
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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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5.05.17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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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DUMMY

그곳은 여정을 끝마친 자들이 도달하는 종착지. 아직 할 일이 남은 루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바람이 차츰 그의 몸을 빛기둥 바깥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를 배웅하는 제리온의 코트자락이, 안젤리카의 원피스가 시원하게 물결쳤다. 두 사람의 표정은 단 한 톨의 근심도 없이 담백한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이지, 죽은 주제에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죽었으니까 가능한 거야. 말했잖아? 넌 가서 뺑이 좀 쳐라.


“하아...왠지 살아 있어서 손해인 기분인데.”


그리운 얼굴과 다시 만난 것은 기뻤지만, 또 한편으로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새삼 피부로 느껴져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들은 남고, 자신은 다시 길을 떠난다. 그 괴리감에 루도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러나 제리온은 그런 슬픈 감정까지도 이해한다는 듯, 살갑게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전신을 휘감는 보랏빛의 광휘 속에서 제리온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힘내라. 짜샤.


파앗! 빛줄기가 일순 시야를 가득 덮친다고 느꼈을 땐 이미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깨어나자 가장 먼저 이마에 사뿐 내려앉는 눈송이의 촉감이 몽롱한 감각을 환기시켰다.


“쿨럭...헉!”


입속에 고인 피가 목을 막은 것인지 그는 가장 먼저 거칠게 기침을 토했다. 이어 그는 사방에 널린 고기조각을 보고 자신이 잠든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파악했다.


“이건...”


그 후로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태양의 위치로 볼 때 그가 정신을 잃고 깨어나기까지 그다지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훼창기사단의 기사들이, 단 몇 분 만에 차가운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시신이라면 이렇게까지 자기혐오에 빠지진 않을 것이다. 시신의 상태는 너나 할 것 없이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참혹했다. 어느 것은 목이 뽑힌 채 척추가 덜렁거리고 있고, 어느 것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때의 충격으로 눈알이 튀어나와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찌부러져 있는 헬름은, 그 소유자의 머리와 함께 압축된 것이 틀림없었다.

루도는 곧 자신의 손이 피로 물들어 있고, 손톱에는 살점이 가득 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펠아람의 아이가 저지른 소행이다. 이런 결과가 되리라는 걸 모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수십 명의 시신과 마주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참혹함에 치가 떨리긴 해도 구역질이 올라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기력이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피를 너무 쏟은 까닭인지, 아니면 펠아람의 아이가 날뛰고 간 영향인지 몸에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을 들어도 자신의 의지로 했다기보다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당연히 땅을 밟아도 밟았다는 감각이 들지 않았으므로 그는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한참을 뒹굴어야 했다.

그런데 막 몸을 일으킬 즈음 손바닥에서 양피지가 팔랑 떨어져 내렸다.


“음?”


양피지에는 펠아람의 아이가 남겨놓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훼창기사단 본대로 들어가는 방법, 레미나가 잡혀 있는 장소, 그리고 탈출 경로까지. 하지만 그런 자잘한 정보보다 루도의 시선을 사로잡는 문구는 따로 있었다.


-이런 무모한 짓 다시는 벌이지 마라.


힘을 주어 쓴 듯 문구는 글자 크기부터 남달랐다. 경고인지 부탁인지 모를 그의 메시지에 루도는 잔뜩 이마를 찌푸렸다.


“시끄러. 이렇게라도 안 했으면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주변의 땅은 이미 피와 살점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쏟아지는 눈발이 피를 덮어가고 있긴 하지만, 싸움의 상처를 지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루도는 부러진 칼을 대충 허리춤에 꽂아 넣고는, 비척거리며 시신 사이를 걸어갔다. 어지간히도 날뛴 모양인지 온전한 시체를 찾기도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그러다 그는 형태가 남아 있는, 게다가 체구도 자신과 비슷한 시신을 발견하고는 주섬주섬 갑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판금 갑옷을 입긴 처음이었지만 생각보다 갑갑하거나 무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감각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플레이트 레깅스와 그리브, 건틀렛까지 촘촘히 차려입고 나자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이어 투구를 쓰고 입 가리개를 닫자 영락없이 훼창기사단의 모양새가 되었다.


“라키시아는...아, 저쪽인가.”


피를 닦아냈는데도 투구 안쪽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풍겨왔다. 하지만 정체를 숨기는 것이 관건인 만큼 섣불리 입 가리개를 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루도는 일단 타고 갈 말을 골랐다. 그는 죽은 주인 곁을 배회하는 군마 중에 덩치가 큰 녀석을 골라 타고는 곧장 라키시아로 달리기 시작했다.


훼창기사단의 본진은 벌판으로 나오자 금방 눈에 들어왔다. 승전의 짜릿함 때문일까 그들은 서둘러 본거지를 라키시아로 옮기는 중이었다. 순간 루도는 라키시아로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도시 외곽에 설치된 진으로 이동해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아직 도시는 전투 중이었어...양피지의 내용대로라면 감옥은 본진에 있을 테고.’


여기까지 와서 섣부른 억측은 금물이었다. 루도는 일단 모든 선택을 펠아람의 아이가 수집한 정보에 의지하기로 했다. 그에 따르면 레미나가 잡혀 있는 곳은 훼창기사단 1직영대대의 특수감옥으로, 장교급 이상의 인물만을 수감하는 장소였다.

본진 입구로 접근하자 경계 중인 초병이 무기를 고쳐 쥐는 게 보였다. 루도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고는 최대한 어깨를 폈다. 적지에 잠입하는 것도 이걸로 두 번째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완벽하게 적군의 흉내를 내야만 했다.


“멈춰라. 소속과 신분을 밝혀라.”


초병들은 웬 기사 하나가 다 죽어가는 행색으로 다가오자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루도는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1직영대대...다. 길을 열어라.”


다행히도 투구에 가려 그의 앳된 목소리가 조금은 변조된 모양이었다. 초병들은 기사의 정체가 리크나이츠 소속 군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절도 있는 자세로 경례하고는, 진채에 걸린 빗장문을 열었다.


“1직영대의 기사님이셨군요. 아까 올란도 천인장님과 함께 출진하셨다는 보고는 받았습니다.”


“아...아. 보고를 위해 먼저 복귀했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돌아온 기사가 있지 않나? 포로를 하나 데리고 있었을 텐데.”


“포로...입니까? 1직영대대 소속이라면...음.”


초병은 아리송하다는 듯 답을 얼버무렸다. 그가 얼른 대답을 못하자 다른 동료들이 와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루도는 혹시 들킨 게 아닌가 싶어 피 섞인 침을 꿀꺽 삼켰다. 질릴 대로 질릴 얼굴은 이미 창백하다 못해 핼쑥해져 있었다.

잠시 후 한 초병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시곤 경 말씀이시군요. 그러고 보니 웬 여자 하나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 그거! 시곤은 어디로 갔지?”


“예? 그건 딱히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만...보급창고 방향으로 가셨으니 분명...”


순간 루도는 그 병사가 가리킨 방향을 뇌리에 똑똑히 각인시켰다. 이어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저쪽이면 1직영대 특수감옥이겠군. 알려줘서 고맙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병사들은 깍지 낀 손을 가슴에 모으며 말했다. 루도는 그게 아스트리카의 경례 방식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대충 손을 흔들어 화답해주었다. 그가 서둘러 자리를 떠나자 초병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루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후에야 한 병사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런데 방금 그 기사 누구였지? 스벤손 경 아닌가?”


“응? 기사 얼굴을 어찌 일일이 다 기억하겠나. 우리 기사단의 규모가 몇인데.”


“아니, 나도 다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1대대는 면식인 기사가 꽤 있거든. 저건 분명 스벤손 경의 갑옷인데, 목소리가 좀 다른 것 같단 말이야. 늘 타고 다니던 말도 아닌 거 같고.”


“뭘 그리 꼬치꼬치 생각하나? 잘못 본 거겠지.”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초병들을 뒤로 한 채 루도는 레미나가 있는 곳을 향해 말을 몰았다. 한 손은 고삐를, 한 손은 검의 손잡이를 쥔 채로. 그러다 그는 자신이 쥔 검이 부러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멋쩍게 새로 획득한 검으로 바꾸었다. 그 검은 그립감도, 무게도 원래의 롱소드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낯선 무기에 투정부릴만한 여유는 없었다.

부러진 검은, 이제는 결코 무기로는 사용할 수 없으니 말이다.

특수감옥은 보급 창고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으슥한 공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보통은 지나다니는 병사들로 북적거려야 할 장소이지만, 라키시아로 본대이전이 진행 중인 만큼 감옥 주위는 한산하기만 했다.

감옥이라곤 해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나무말뚝을 촘촘히 박아 우리를 만들고 그 주변에 천막을 쳐놓은 것이 전부였다. 루도가 다가가자 감옥을 지키던 병사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시곤이 데려온 여자 포로가 여기 있을 텐데. 올란도 천인장님의 명령으로 그 여자를 데리러 왔다.”


“그러시군요. 실례지만 성함이?”


그러자 루도는 갑옷 어깨에 그려진 휘장마크를 들이밀며 병사를 압박했다.


“일일이 시간 잡아먹지 마. 이거 안 보이나?”


내심 스스로 제리온 같은 독설이 튀어나오길 기대했지만, 성량이나 어조나 그와 비교하면 한참 모자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병사를 기죽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선선히 자리를 비켜주며 말했다. 아마 루도처럼 계급을 무기로 행패를 부리는 기사가 꽤나 많은 모양이었다.


“...실례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음, 수고하게.”


의식적으로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루도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감옥의 규모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그러나 규모에 비해 수감된 포로가 전무하다시피 해 천막 내부는 황망한 느낌마저 났다. 텅텅 빈 감옥 속에서 그녀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스라이 켜진 램프 불빛 아래에서 그녀는 죽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


절대 당황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그녀의 처참한 모습과 마주하자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옆구리에 감긴 붕대였다. 대충 감아놓은 붕대는 이미 피를 잔뜩 머금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루도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레....레미나? 레미나...!”


그의 복받친 부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나마 램프의 음영이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을 가려주었으니 망정이지, 대낮이었다면 영락없이 그녀가 숨이 끊어진 줄 알았을 것이다. 루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맥을 짚어보았다.


“...뛴다.”


천만다행이게도 아직 그녀의 숨은 붙어 있었다. 하지만 레미나의 호흡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수준으로, 금방이라도 훅 꺼져버릴 것처럼 위태하기만 했다. 일단 그녀의 생사를 확인하자 루도는 훼창기사단의 포로관리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중상을 입은 사람을 고작 붕대를 감아 지혈하는 정도로만 조치를 취해놓은 것이다. 하물며 그녀가 갇힌 감옥은 흙바닥 위에 그대로 지어진 것이라 한겨울의 한기가 여과 없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멀쩡한 사람이라도 이런 곳에서 밤을 보냈다간 꼼짝없이 얼어 죽고 말 터인데, 하물며 레미나는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루도는 서둘러 망토를 찢어 그녀의 몸에 둘러주었다. 시간만 있다면 붕대도 갈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레미나...정신 차려봐. 레미나!”


“...으...”


루도의 간절함이 전해진 것일까? 레미나의 눈이 스르륵 떠졌다. 그러나 빈사상태에 빠진 그녀의 동공은 초점을 잡지 못하고 애꿎은 천장만 향했다.


“괜찮아? 나야 루도! 구하러 왔어.”


“루....도?”


그녀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답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그녀의 용태에 루도는 목이 메어왔다. 그가 뺨을 어루만지자 레미나는 멍한 얼굴로 툭, 한 마디를 내뱉고는 이내 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미..안...”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루도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재차 의식을 잃자 그는 곧바로 그녀와 함께 탈출할 준비를 했다. 그는 레미나를 들쳐 업고는 감옥 바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녀를 말에 태운 뒤 예의 기사 흉내를 내며 어떻게든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막 감옥을 빠져나가려 할 즈음 한 남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네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루도는 그가 결코 낮지 않은 직위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올란도 천인장과 동급...아니, 그보다도 더 위? 눈빛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그의 기백과 관록이 느껴질 정도였다.

일단 루도는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1..1직영대대 소속입니다. 현재 올란도 천인장님의 명령을 수행 중인지라...”


“올란도가? 아직도 복귀하지 않은 모양이던데...목표는 어떻게 된 건가?”


목표란 물론 카이안을 말하는 것이었다. 루도는 자신이 연기하는 기사의 입장이 되어, 솔직하게 말했다.


“의외의 습격을 당해 사상자가 좀 생겼습니다. 천인장님은 그대로 목표를 추적하러 가셨고....저는 포로의 심문을 위해 먼저 돌아온 참입니다.”


“그렇군. 역시 녹록하지만은 않다는 건가...”


그때 천막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다가와 말했다. 그는 하늘 같은 장군과 마주했기 때문인지 잔뜩 얼어붙은 모습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장군! 먼저 면회 온 분이 있어서...아, 저 분은 1직영대대 소속으로...”


“됐네. 가서 일 보게.”


그러자 병사는 경례를 올리고는 쏜살같이 바깥으로 사라졌다. 루도는 그 짧은 대화에서 남자의 정체를 유추해냈다.


‘장군...설마 훼창기사단 단장 레오문드 스벤하임?’


어째서 장군 정도 되는 인물이 이런 으슥한 곳까지 행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루도는 레미나를 업은 자세 그대로 자연스럽게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뒤따라온 호위병은 없다. 재빨리, 일격에 목을 딸 수만 있다면!

그때 레오문드가 루도를, 정확히는 레미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는 파리해진 그녀를 보곤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전혀 예상 못 한 행동에 루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레오문드가 말했다.


“쯧쯧, 포로는 최대한 정중하게 대우하라고 했건만. 이런 상태여서야 살아날 수 있을지 모르겠군.”


“....”


“그래, 직속의무대로 옮기는 건가?”


루도는 쭈뼛거리며 답했다.


“아...네. 여기 있다간 심문도 하기 전에 죽을 염려가 있으니...”


“좋은 판단이야. 어서 가보게.”


마치 사람 좋은 아저씨 같은 그의 푸근한 웃음에 루도는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데 카이안을 추격하라고 지시한 것도, 일행을 습격한 것도 모두 그의 소행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마주한 레오문드라는 인간은 적어도 스벤달이나 제랄드 같은 자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 공과 사는 치밀하게 구분하는 성격인가? 그게 아니면, 어쩌면 레오문드도 안개송곳니에게 휘둘리는 꼭두각시인 것은 아닐까? 적어도 마차를 쫓던 기사들은 신의 아이에 관한 정보에 무지한 듯 보였다.

어느 쪽이든 그가 먼저 길을 터주었다는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이대로라면 들키지 않은 채 무사히 레미나를 데리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루도는 정중하게 묵례를 올리고는 그의 곁을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막 감옥 문을 나서려고 할 때, 레오문드가 갑자기 그를 멈춰 세웠다.


“아, 잠깐.”


“무슨...일이신지?”


“깜빡 잊을 뻔했군. 이걸 전해주려고 온 거였는데 말이지.”


레오문드는 품 안에서 자그마한 약병을 꺼내 보여주었다.


“외상에 뛰어난 특효를 지닌 약이네. 의무대에 도착하면 이 소녀의 환부에 발라주도록 하게. 혹시 이걸로 말미암아 살아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루도는 그의 친절에 감사를 표하고는 약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레미나를 업고 있는 탓에 노는 손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레오문드도 그걸 알았는지 적당히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려고 허리춤을 들추었다. 그런데 막 약병을 집어넣을 즈음 그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우뚝 고정되었다.


“이...검은?”


순간 루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러진 자신의 검! 람카디스의 추억을 잊지 않으려고 무리하게 수거해 온 게 실수였다. 물론 검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힐트(Hilt)부분이었다.


“이것은 리크나이츠 왕가의 문양이로군?”


‘빌어먹을!’


설마 검의 족보가 이제 와 발목을 붙잡을 줄이야! 루도는 재빨리 둘러댔다.


“조, 조금 전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입니다.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부러진 검을 말인가? 흠...”


레오문드의 눈이 일순 의혹으로 빛났다. 루도는 혹시 그가 눈치챘으면 어쩌나 싶어 전전긍긍했다. 하물며 레오문드의 손이 루도의 허리춤에 가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무기를 뽑을 수도 없거니와 설령 시도한다 해도 레오문드의 발검 쪽이 훨씬 빠를 게 틀림없었다.

다행히도 불편한 접촉은 레미나가 무의식중에 신음을 흘리며 끝을 맺었다. 레오문드는 일단 사람부터 살리자는 생각에 서둘러 그를 막사 밖으로 보내려 했다.

그렇게 막 레오문드가 루도를 등지고 설 때였다. 수색대의 보고를 받은 병사가 천막을 휘저으며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새파랗게 질린 병사의 표정에서 루도와 레오문드는 동시에 일이 잘못되었음을 파악했다. 하지만 대응은 루도 쪽이 더 빨랐다.


“장군! 정찰병의 보고입니다. 올란도 천인장이 이끄는 1직영대대 기사대가...전멸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먼저 복귀한 시곤 경을 제외한, 올란도 천인장 외 기사대 23명의 주검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시곤을 제외한....전원이?”


대경실색하던 레오문드는 그러나 등에 와 닿는 날붙이의 예리함에 놀라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슬쩍 눈을 굴리자 기사가 업고 있던 소녀는 어느새 몸에 두른 코트째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즉, 기사의 손은 더 이상 놀고 있지 않았다.

정체를 드러낸 루도는 레오문드가 입을 열기 전에 재빨리 그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조용히 해. 죽고 싶지 않으면.”


“....?”


레오문드는 재빨리 침입자의 특성을 파악했다. 정황으로 보아 그가 1직영대대를 박살 낸 주범인 것은 확실한데, 딱히 자신을 암살하러 온 듯한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쓰러진 소녀를 향해 있었다.

한편 보고하는 병사의 각도에서는 그저 루도가 레오문드의 뒤에 비스듬히 서 있는 것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조금 전 소녀를 땅에 떨어뜨린 것도 그저 비보에 놀랐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루도는 일단 성가신 병사부터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병사부터 밖으로 물려. 자연스럽게 대처해.”


그는 레오문드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검을 좀 더 깊숙이 들이밀었다. 레오문드는 태연자약하게 병사를 복귀시켰다. 그러나 이는 루도의 요구에 성실히 임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단둘이 남게 되자 그는 바닥에 쓰러진 레미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환자를 떨어뜨려도 되나? 충격으로 상처가 벌어졌을지도 모르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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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2) +2 15.06.01 930 27 22쪽
328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 +3 15.06.01 878 26 23쪽
327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5) +5 15.05.31 935 29 13쪽
326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4) +1 15.05.31 851 23 19쪽
325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3) +2 15.05.31 918 25 22쪽
324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2) +2 15.05.31 949 24 19쪽
323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1) +1 15.05.31 782 21 20쪽
322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5) +10 15.05.30 980 34 21쪽
321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5 15.05.30 877 26 19쪽
320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6 15.05.27 1,021 30 18쪽
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48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1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5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7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7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9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80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40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10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7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9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30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7 23 23쪽
»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40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3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8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8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3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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