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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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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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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20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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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글자
20쪽

람의 계승자 - ep.7 - 바이올렛(3)

DUMMY

“아아...미치겠네. 란도스 전하께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굳이 따지면 내 잘못은 아니지만...”


루도는 머리를 감싸 쥔 채 길게 신음했다. 적에게 들키지 않는 게 최대 쟁점인데 느닷없이, 그것도 잠입과는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공주님이 딸려온 것이다. 게다가 릴리즈 직전에 그녀가 취한 행동 역시 그의 명치를 연거푸 강타했다.

그 자리에는 란도스를 비롯하여 로샤단과 관련 있는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공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깊은 포옹을 나눈 것이다. 물론 스크롤의 안전한 사용을 위해서라고 우기면 못 넘어갈 것도 없지만, 적어도 그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 그 정도로 눈치가 없는 인물은 없었다.

한편 레미나는 예상 외로 괴로워하는 루도의 모습에 조금 심통이 났다. 그녀는 루도의 정강이를 툭툭 차며 말했다.


“너어무 싫어하는 거 아니야? 내가 뭐, 못 올 데 왔나?”


루도는 기가 막혀서 입을 떡 벌렸다.


“그럼 올 데 왔...하아, 너 여기가 어딘지 알아? 레이시의 저택! 안개송곳니의 본거지라고.”


레미나는 질타하는 그의 시선을 여유 있게 피하며 답했다.


“그래서 도와주러 온 거잖아. 뛰어난 마법사인 내가.”


“아이고 공주님, 몇 번 위험한 고비 넘기니까 맹인이 다 되셨습니까? 잘못하면 죽어. 응? 죽는다고.”


물론 루도는 그녀가 걱정돼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레미나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녀가 싫은 기색을 내보이는 것은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기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럼 앞으로도 나는 쭈욱 떼놓고 다닐 생각이야? 위험하니까?”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그러는 거지.”


“나는 항상 뜨끈한 방에 처박아두고, 다른 사람들은 죽을 똥 살 똥 항상 피칠갑이 되어서 돌아오고. 안전해질 때까지? 그때가 대체 언제 와? 네가 죽고 난 다음에 와?”


루도는 입을 다물었다. 일국의 공주로서, 그리고 연인으로서 그녀를 위험한 장소에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를 달가워하지 않음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토라진 얼굴이었다.


“그거 알아? 카잘산맥에서 내려오고 난 후 쭈욱 단둘이 있을 기회가 없었다는 거.”


루도는 쭈뼛거릴 수밖에 없었다. 단 몇 마디로 그는 고양이 앞의 쥐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레미나의 목소리는 담뿍 젖어 있었다.


“...많이 바빴지. 많은 일이 있었고.”


그녀는 목구멍에 차오른 것을 힘껏 삼켰다.


“그래. 바빴지. 죽음을 향해 바쁘게 달려가고 있지. 너는 그렇게 죽어도 명예로우리라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그녀라고 루도를 타박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이렇게라도 만들지 않으면 기약조차 할 수 없는 단 둘만의 시간이. 카잘산맥에서의 추억이 꿈처럼 달콤했던 탓일까, 돌아온 현실은 더욱 매정하게 그들을 몰아붙였다. 레미나는 어느새 타인의 죽음에 적응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게 소름끼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루도가 죽어도 담담하게 넘겨버리게 되진 않을까, 하고.


“유미르네의 일...괜찮아?”


루도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괜찮을 리가 없다. 다만 제리온 때와는 달리, 모두가 그녀를 ‘잊은 척’ 하려 애쓰는 느낌이었다. 그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럭저럭...이지.”


“거짓말. 세상에서 너만큼 그녀를 신경 써준 사람은 없었어. 자랑스러워해도 돼. 그녀 덕에 카이안이 살았으니까.”


“음...”


“루도가 유미르네에게 해준 것과 내가 루도에게 해주고 싶은 것.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오지랖이라고 해도 좋아.”


퀴퀴한 지하실에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가느다랗게 새어 들어오는 햇빛 사이로 그는 그녀의 뺨이 발갛게 물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사랑스러운 표정에 대고 어찌 싫은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작금의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레미나는 그를 돕고 싶어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했다. 죽음이 보다 무뎌지기 전에. 무모함을 탓할지라도 이런 방법 외에는 그와 함께 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었다.


“말해두는데 위험한 행동은 절대로 해선 안 돼. 그리고 무조건 내 지시에 따라야 해. 알았어?”


그녀는 배시시 웃고는 그의 등에 달라붙었다.


“물론이야. 후자는 생각해 보겠지만.”


“어휴...”


루도는 지하실 문 앞에 서서 잠시 슈터크가 말해준 정보를 회상했다. 정보대로라면 현재 저택 내에는 극소수의 경비병만이 남아있다. 게다가 그들은 여타 안개송곳니 단원과는 다르게 평범한 군인에 불과했다. 운이 좋다면 그들의 눈을 피해 수정을 탈취할 수도 있었다. 그는 이미 암기했는데도 저택의 평면도를 끊임없이 곱씹었다.


“저택 남서쪽 벼랑 끝에 위치한 지하동굴이었지. 일단 나가서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부터 봐야겠는데.”


둘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지상으로 나왔다. 지하실은 저택 내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별관이 나오고, 정원을 기점으로 건너편에 본관이 위치한다. 레이시가 쓰던 서재와 레이첼의 방 등은 모두 본관에 있었다. 다만 레이시의 서재는 펠아람의 수정이 있는 동굴과는 정반대의 방향이라 굳이 조사하러 가기에는 위험부담이 있었다.

그들은 날숨소리도 조심해가며 정원에 들어섰다. 다행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모두 철수하기라도 한 것일까? 풀 밟는 소리가 천둥처럼 느껴질 정도로 사위는 고요했다.


‘제오프, 뭔가 느껴지는 거 없냐.’


『아직 아무것도. 하지만 아련하게 뭔가가 느껴져. 지금 이 방향이 맞아.』


지도대로라면 본관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오면 북쪽에는 빽빽한 침엽수림이, 남쪽에는 절벽이 위치한다. 본관에서 절벽 동굴까지의 거리는 200여 m도 되지 않았다. 제오프가 무언가를 느낀 것을 봐도 펠아람의 수정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렇게 본관으로 들어와 코너를 돌자 긴 회랑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쪽 벽에는 각종 미술품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런 시기가 아니라면 날 잡고 구경해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들 일색이었다. 특히 기도하는 수녀를 그린 유화는 루도도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그러나, 그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발목을 잡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유화를 훑어보느라 맞은편 코너로 누군가 들어서는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그가 루도를 발견한 것과 루도가 그를 발견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


순간 팔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직 코너를 돌지 못한 레미나를 재빨리 밀어 넣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덕분에 적은 침입자가 오직 루도 하나뿐이라고 착각했다. 그 남자는 루도를 발견하자마자 육중한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가 올 것을 예상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펠아람의 아이.”


“히이이익, 고르딘?!”


어째서 그가 저택을 지키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고르딘은 땅을 울리며 순식간에 접근해왔다. 철그럭거리는 갑옷소리가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온몸에 털이 쭈뼛 곤두섰다.


‘레미나, 도망가!’


루도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어디든 숨을 곳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레미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입만 뻐끔거렸다. 그녀의 위치에서는 고르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커다란 물체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만은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설득할 시간조차 없었다. 루도는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고르딘이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용서를.”


그의 메이스가 높이 치켜들어졌다. 루도는 이를 쳐내려고 검을 허리 아래로 내리고 올려칠 자세를 취했다.

후우우웅-! 바람 가르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이마 위가 메이스가 만들어낸 그림자로 뒤덮였다. 찰나의 시간동안 루도는 메이스가 자신의 머리통보다도 굵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까지 미치자 그는 자세를 풀고는 그대로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으아아아아....!”


『으익, 히이이!』


콰드득,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이 여지없이 부서져나갔다. 만약 받아쳤다면 자신의 두개골 또한 같은 꼴이 났을 것이라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어마어마한 파괴력이다. 디리터의 투핸디드소드 정도가 아니고서야 고르딘의 일격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한번 일격을 피하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정면승부로 어찌해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제오프, 이제 어떻게 하지?”


그러자 제오프는 절규하듯 외쳤다.


『뭘 어떻게 해! 도망쳐어어.』


“으어어어!!”


루도는 냅다 등을 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고르딘은 주저하지 않고 그의 뒤를 추격했다. 다행히 그는 레미나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코너 너머에서 입을 틀어막고는 고양이처럼 웅크려 있었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고르딘의 존재감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 무게감과 박력, 그리고 대리석도 우습게 가루로 만드는 파괴력까지. 언젠가 제리온이 말해준 기억이 났다. 안개송곳니에는 마법도 안 통하는 괴물이 하나 있다고.


‘루, 루도...’


그는 그녀더러 도망치라고 했다. 혼자라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다 - 루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 번 보호받았다는 사실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입을 막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릅뜬 눈에 더 이상 공포는 깃들어있지 않았다.

잠잠해지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코너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건물 밖으로 뛰쳐나간 모양이었다. 발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자 그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나 놀랐는지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나 주저앉아있을 시간은 없었다. 무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저절로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으아아, 저 미친 놈, 왜 하필 저게 여기서 튀어나오느냐고!”


한참을 달리던 루도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가 고르딘이 바짝 쫓아오는 것을 보곤 경악했다


“히야아아악!”


곰에게 쫓기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이다. 고르딘은 특유의 갑옷소리를 내며, 그런 주제에 결코 루도에게 뒤지지 않는 속력으로 추격해왔다. 건물을 뛰쳐나와 3분 가까이 달렸음에도 거리는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는 쉽게 포기할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주구장창 달리기만 할 수도 없었다. 어느새 슈터크가 말한 절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카잘산맥, 그것도 최정상에 위치한 지역이다. 떨어지기라도 했다간 시체도 못 찾을 게 분명했다. 절벽이 가까워지자 루도는 어쩔 수 없이 속력을 줄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공포에 질려 비명만 지르던 제오프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아니, 그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진중함이 루도에게도 전해졌다. 무언가가 느껴진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처럼, 그러나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존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이야...루도, 8시 방향으로 가.』


루도는 망설이지 않고 제오프의 지시에 따랐다. 좀 더 달리자 제법 큰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도는 동굴 입구에 멈춰 섰다. 동굴 안쪽은 지하로 연결되어 있어 어쩌면 땅굴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10m 간격으로 설치된 횃불이 그를 잡아끌었다. 어서 오라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강렬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여긴가...”


『맞아. 안쪽이야.』


고개를 돌리자 마침 고르딘도 속도를 줄이는 게 보였다. 투구에 가려 얼굴이 보이진 않아도 그는 제법 놀란 눈치였다. 펠아람의 아이가, 펠아람의 수정이 보관되어 있는 동굴 앞에 멈추어 서 있다. 당연히 저지해야 하지만 루도 역시 조금 전과는 분위기가 명백하게 달라져 있었다.


“할 거냐?”


『불가피하다면.』


고르딘은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제오프가 본격적으로 힘을 해방하면 자신은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아마 무기 없이 맨손으로도 갑옷을 짓이겨버릴 것이다. 그가 말했다.


“펠아람의 아이...넌 수정을 가져갈 수 없다.”


루도의 미간이 살짝 벌어졌다. 그가 선뜻 말을 걸어오리라곤 예상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싸울 생각이면 시간낭비하지 말고 빨리 덤벼.”


그러나 고르딘은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전까지 추격해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등을 돌렸다. 그전까지의 행동이 무색할 정도로 망설임 없는 퇴각에 루도도 제오프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도망...가는 건가? 레미나가 걱정인데.』


“아니, 본관 쪽은 아니야. 그래도 뒷맛이 좀 끕끕하네.”


루도는 굳이 그를 뒤쫓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동굴 입구를 향해 깊은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스산한 공기가 콧잔등을 씰룩였다. 공기는 기름을 머금어서인지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는 벽에 걸린 횃불 하나를 뽑아들고는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 썩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악취의 근원지는 굳이 눈으로 좇지 않아도 됐다. 악마의 시체는 이미 동굴 내부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었다.


“슬러터인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악마가 이곳을 습격했구나. 하지만 실패했고.』


“누가 이렇게 만든 거지. 고르딘인가?”


그때 동글 안쪽에서 그르륵, 하는 짐승의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왔다.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피부를 가볍게 찌르고 간 것만 같았다. 짐승의 울음소리. 하지만 단순한 짐승이 아니다. 목덜미를 훑자 어느새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제오프가 말했다.


『아주 가까워. 수정도, 수정을 지키고 있는 놈도. 악마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그놈일 테지.』


동굴 안으로 갈수록 공간이 점점 넓어졌다. 횃불의 빛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은 어둠에 잠식된 채로 루도의 숨통을 죄여왔다. 그렇게 코너를 돌았을 때, 그는 마침내 소리의 주인공과 마주할 수 있었다.


“너는...”


“크르르르르!”


그것은 아주 거대한 다이어울프였다. 게다가 루도는 그 녀석을 본 적이 있었다. 거대한 체구와 아름다운 흰색 갈기. 잊어버리는 게 이상했다. 카잘산맥에서 마주쳤었던, 그 늑대가.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녀석은 침입자가 다가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루도와 늑대 사이의 거리는 20보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이라도 나아가려는 낌새를 보이면 녀석이 주저하지 않고 달려들 것이라 확신했다. 발치에 흩어진 악마들의 시체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검집에 손을 가져가려하자 녀석이 폭풍 같은 적의를 드러냈다.


“카아아아악!!”


포효 한 번에 동굴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단지 한 번 외친 것뿐인데도 머리칼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온몸의 털이 팽팽하게 섰다. 루도는 발검을 포기하고 느슨하게 팔짱을 꼈다. 늑대는 그의 움직임을 일거수일투족 관찰했다.


“그래, 이제 알겠어. 네가 아반케즈의 아이의 수하로군.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던 거야.”


늑대는 금방이라도 덮쳐올 것처럼 뒷발을 오므렸다. 상당히 넓은 공간에도 불구하고 늑대의 덩치 때문인지 동굴은 협소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것은 정상적인 늑대의 몸집이 아니었다. 이전번에 만났을 때도 거대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다시 만난 녀석은 그때보다도 한껏 몸이 부풀어 있었다.


『뭔가를 했군. 아반케즈의 아이가 녀석에게.』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처럼 팽창한 근육과 붉게 물든 눈동자, 웬만한 성인의 머리통만한 앞발. 입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송곳니에서는 끊임없이 침이 흘러나오고 있다. 루도는 그 이빨에 걸리면 뼈도 못 추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방에 널린 악마들의 팔다리가 그 증거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녀석이 무섭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정면으로 붙으면 분명 승산이 없을 텐데도 심장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무런 대화도 없었으나 둘은 눈빛만으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이곳에 왔는지 - 왜 이곳에 있는지.

늑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선반이 있었다. 선반 위에 놓인 ‘그것’이 루도의 동공에 아로새겨졌다.


“수정...”


『저것인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수정에 찬 에센스의 양이 아주 적다는 사실이었다. 3분의 1? 아니, 4분의 1 정도 될까. 자주색으로 빛나는 부분은 수정 전체로 보았을 때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말로만 적다, 적다했지 저렇게 적을 줄은 몰랐네. 하하.”


『....』


제오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반응이 없어도 루도는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자아, 이제 저 녀석을 쓰러뜨리고 수정을 가져가면 되는 건가?”


마침내 눈앞에 들어온 수정. 파수꾼은 아반케즈의 권능을 부여받은 다이어울프였다. 루도는 제오프의 신호를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맞붙는다면 아마도 순식간에 결판이 날 것이다. 늑대 또한 전투를 직감했는지 으르렁거림을 멈추고 자세를 낮게 숙였다.

제오프가 긴 침묵을 깬 것은 그때였다.


『아니. 수정은 이미 우리 거야. 누가 지키는가는 상관없이.』


“뭐?”


그가 말을 맺자 펠아람의 수정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늑대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수정을 쫓았다.

수정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정확하게 루도의 눈앞에 섰다. 수정 안에 고인 에센스는 그 자체로 의지를 가진 듯 물결치고 있었다. 그 경이로움 속에서 루도는 크게 눈을 떴다. 여전히 가슴은 차가웠다. 마치 운명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것만 같았다. 펠아람의 아이, 그리고 펠아람의 수정.


“이게 우리의 생명인가?”


『우리의 무기이기도 하지.』


“간만에 마음에 드는 말을 하네. 그래서,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데?”


『질문할 필요는 없어.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좋아. 그럼 가보자고, 펠아람의 아이야.”


『잊지 마. 의식을 놓는 순간 끝장이라는 것을.』


번쩍! 펠아람의 수정이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루도는 휘몰아치는 빛 속에서 수정이 점차 형태를 바꾸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상하로 늘어나 블레이드가 되고, 다시 좌우로 쪼개져 힐트가 된다. 폼멜의 문양이 만들어지고, 블레이드의 검신을 따라 에센스가 흐르는 것으로 담금질이 마무리된다.

그렇게 변형된 아루의 수정은 거대한 검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것이...!”


아루의 수정은 신의 아이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도구의 형태로 변화한다. 선대 펠아람의 아이가 사이드(Scythe)를, 에리안델이 방울을 만들어냈듯이 루도와 제오프가 바란 최적의 도구는 ‘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소 루도가 사용하는 롱소드에 비해 압도적으로 컸다. 길이는 1.5m가 훌쩍 넘어가고, 무엇보다 폭이 아주 넓어 일자로 세우면 온몸을 가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폼멜에는 언젠가 모두가 함께 만들었던 로샤단의 길드문양이 새겨졌다.

루도는 눈앞에 떠오른 검의 자태에 침을 꿀꺽 삼켰다. 보랏빛으로 빛나는 대검. 그것은 그의 무기이자 생명이요, 마침내 손에 넣은 운명이었다.


“이름은?”


그가 묻자 제오프는 담담하게 답했다.


『바이올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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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5) +5 15.05.31 935 29 13쪽
326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4) +1 15.05.31 851 23 19쪽
325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3) +2 15.05.31 918 25 22쪽
324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2) +2 15.05.31 950 24 19쪽
323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1) +1 15.05.31 782 21 20쪽
322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5) +10 15.05.30 980 34 21쪽
321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5 15.05.30 877 26 19쪽
320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6 15.05.27 1,022 30 18쪽
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48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1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6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1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50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7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7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1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1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7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50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81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41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11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8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8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5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50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9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30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3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7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40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3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9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9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3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6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8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4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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