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조회수 :
359,025
추천수 :
10,757
글자수 :
2,844,987

작성
15.05.20 01:44
조회
749
추천
23
글자
19쪽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DUMMY

“아, 잠시 화장실 좀.”


같이 있던 기사가 건물 밖의 일행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정의 소재를 확인한 지금, 보다 명확한 방침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결정은 이칼롯이 내리겠지만, 란돌은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수정을 봤으니 어떻게든 빼앗아야겠지만, 전력도 전력이거니와 주변에 민간인이 너무 많아 껄끄러워졌다. 경비대에 협력을 요청해 일거에 덮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도 슬러터 열둘을 상대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물쭈물 거리다간 놈들이 도시 밖으로 나가버릴 테고, 그때부턴 이렇게 인파에 섞여 정탐하기도 불가능해질 터였다. 역시 가장 좋은 상황은 녀석들이 도시를 떠나기 전에 루치페리아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녀가 있다면 놈들을 일거에 소탕하는 것도 가능할 테니 말이다.


“작작 좀 먹으라고. 어이, 센트롤.”


“....기다려. 어차피 여길 나가면 또 몇 달간 굶어야 할 거 아냐. 먹을 수 있을 때 먹게 해줘.”


“나 참....”


몇몇 식탐 많은 부류를 제외하곤 악마들은 대부분 식사를 마무리해가고 있었다. 오로지 배를 채우기 위해 여기에 온 걸 테니 식당을 나가면 곧장 도시 밖으로 움직일 게 틀림없었다. 일행은 안절부절못하여 놈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바깥에서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칼롯도 뾰족한 타개책을 강구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같이 있던 기사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어떻게 하죠? 저러다 가버리면 추격하기도 껄끄러워질 텐데.


-나도 알아. 그렇다고 싸움을 걸기도 뭐하잖나. 저래 보여도 악마라고.


-으으...수정만 없었으면 이런 고민도 필요 없을 텐데 말이죠. 루치페리아는 언제 돌아오는 건지...


한편 마리네는 스팅에게, 정확히는 녀석의 허리춤에 매인 수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정까지의 거리는 고작 몇 m에 불과했다. 하지만 실로 멀면서도 가깝게 느껴지는 거리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침착과 통찰을 되뇌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우왕좌왕하는 와중에도 악마들의 대화는 계속됐다.


“그런데 수정만 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그다음은?”


“...드라칸도 생각해놓은 게 있겠지. 일단 우리는 우리 할 일만 끝내면 돼.”


“쉽게 될까. 벌써 주민(resident)몇 명은 당한 모양이던데. 왜 그 이그제큐터라고...”


그때 이야기를 끊으며 한 악마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행동이 워낙 격정적이었기 때문에 주위의 악마는 물론 식당에 있던 사람들까지 놀라 시선을 집중했다. 인간에게 주목을 받자 스팅이 쭈뼛거리며 그를 도로 앉히려 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문제에 연연해야 할 정도로 그가 감지한 위기는 작지 않았다.


“하베스트에게....뭔가 일어났다.


‘뭐?’


엿듣고 있던 일행은 가슴이 철렁하여 몸을 숙였다. 여기서 하베스트와의 거리는 10km는 넘게 떨어져 있을 텐데, 어떻게? 혹시 감지 타입의 악마도 존재하는 것인가? 지금까지 전투에만 한정해 악마를 정의하려 한 것이 실수였다. 일행의 눈이 부산하게 굴러갔다. 악마들이 느낀 긴장감은 대단했다. 조금 전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놈들은 실로 ‘악마답게’ 혀를 날름거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은 물론이고 도청조차 기척이 들킬 것만 같아 마리네는 숨을 죽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 녀석에게 심어둔 분체가 지금 막 소멸했다. 잠깐 대기해. 확인하고 오지.”


일어선 악마는 빠른 걸음걸이로 식당 문을 박차고 나갔다. 란돌은 그가 옆을 지나쳐갈 때 재빨리 이름을 확인했다.


-비홀더(Beholder)...무언가를 탐지하는 능력인가. 낭패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악마들의 대화내용으로 보아 루치페리아가 하베스트 쪽을 습격한 모양인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악마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아마 추격은 꿈도 못 꿀 정도의 속력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리겠지.

하지만 여전히 결단은 내려지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악마 12마리와 싸운다’라는 타협안은 성립하지 않았다. 루치페리아는 언제 오는 걸까, 그녀가 돌아오려면 얼마를 기다려야 할까 - 오직 그것만이 초유의 관심사였다. 아직도 바깥의 일행에게선 답이 없었다.

시간은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마리네는 제발 나간 악마가 돌아오지 않기를, 만약 돌아오더라도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사실 위화감이 조성된 시점에서 악마들은 안전이 보장되더라도 서둘러 도시를 떠나려 할 텐데 말이다.


그러나 길고 긴 망설임에 비해, 행동은 그야말로 일순간에 촉구되었다.


“제기랄, 생텀가드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해!”


비홀더가 다급하게 문을 열며 외친 그 순간, 시간은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졌다. 마리네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테이블 사이사이를 걸어갔다. 덜컥, 하고 의자등받이가 옆구리를 찔렀지만 그 흔들림마저도 마치 예상하고 있었던 듯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머릿속을 울리던 고민들은 ‘무의식’이라는 해결책에 묻혀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마리네는 슬쩍 고개를 돌려 보이는 모든 정보를 흡수했다. 동공에 맺힌 것은, 놀라서 따라오는 란돌과, 비홀더의 외침에 황급히 자리를 일어나는 악마들, 디저트를 내오다 화들짝 놀라 그들을 부르는 여급, 그 와중에도 ‘괜찮다’며 그녀에게 사과하는 키 작은 악마.

창문 너머로 이칼롯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으나 그의 메시지는 마리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스읍-하아. 내쉬면서 그는 자신의 목표를 확인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지금을 놓치면 녀석들은 수정과 함께 산속이든 어디든 멀리 숨어버리겠지.

가장 먼저 달려오던 악마 하나가 다급하게 옆을 지나쳐갔다. 마리네는 서두르지 않았다. 수정을 가진 악마가 네 번째로 달려나오던 걸 이미 확인해 놓았으니까.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어째서인지 실패에 대한 부담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두려움이나 부담감이 아닌, 성공을 향한 강렬한 욕망이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잊은 물건이 생각나 몸을 돌린 사람의 모양새로, 마리네는 스팅에게 몸을 부딪쳤다. 움직이던 속도가 꽤나 빨랐던 모양인지 충돌한 순간 둔탁한 압력이 가슴에 느껴졌다.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이 정도의 충격이라면, 물건 하나가 사라져도 알아채지 못할 테니까.


“윽...!”


쓰러지면서 몸을 굴려 등이 보이게 엎드리고, 그사이 훔친 주머니를 잽싸게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완벽한 손놀림이었다.


“...실례했소. 지금 좀 경황이 없어서.”


“네. 괜찮습니다.”


스팅은 간단히 묵례로 사과하고서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별생각 없이 등을 돌리는 그를 보며 마리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이대로 사라져주면 된다. 수정을 도둑질당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도시 밖으로 사라져 준다면....


“잠깐, 거기.”


그런데 그 순간 억센 팔 하나가 마리네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스팅의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악마, 섀도우 워커였다. 경악으로 부릅떠진 눈동자가 녀석의 손가락에 못박혔다.


“방금 주머니에 숨긴 게 뭐지?”


시간을 끌려면 끌 수도 있었다. 아닌 척 잡아떼든가, 그것도 아니면 너스레를 떨며 웃어넘기든가. 그러나 악마와 접촉한 그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몸이 들끓었다. 하베스트의 일격에 힘없이 쓰러지던 제르칸트의 얼굴이 일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맹렬한 악마혐오증은 그가 이성을 갈무리할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았다.

서걱.


“어엉?”


새도우 워커의 손목이 허공에 날아올랐다. 검은 핏물이 기하학적으로 흩뿌려지는 그 짧은 순간 바람은 숨을 멈추었다. 마리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는 자명했다. 그렇기에 그는 손목에 그치지 않고 섀도우 워커의 가슴팍에도 검을 꽂아 넣었다.


“무슨...”


그리고 팽창했던 시간이


“마리네! 뛰어!!”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 꼬마를 잡아!”


카카칵...단 몇 초의 시간이었지만 오고 간 날붙이는 십수 개에 달했다. 만약 뒤따라오던 란돌이 뒤를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거기서 마리네의 목은 날아갔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자그마치 12마리였다. 비좁은 식당 안이라는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란돌 혼자 버티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는 곧 덩치가 육중한 악마의 발길질에 맞아 멀리 튕겨 나갔다.


“이...인간 녀석이!”


놈은 마리네를 붙잡으려고 길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란돌이 밀쳐짐과 동시에 이번에는 유리창을 박살 내며 이칼롯이 뛰어들었다. 갑작스런 난입자의 등장에 악마들의 움직임이 일순 경직됐다.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으나, 텔슈피드를 발동시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 아티팩트?!”


전격에 닿은 테이블과 의자가 미친 듯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사방팔방으로 퍼지는 전광에 악마들을 기겁하여 뒤로 물러났다. 삽시간에 이칼롯과 악마들 사이로 부채꼴 모양의 공간이 형성되었다. 악마의 기민한 반응속도에 이칼롯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습으로 두세 마리는 잡으리라 예상했는데, 그마저도 적을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이, 인간의 군대다...”


“이젠....어쩌지?”


악마들은 당황했다. 단순한 소매치기인 줄 알았는데, 이칼롯과 란돌의 등장으로 배후에 인간 조력자가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인간 군대와 싸워야 한다는 현실에 그들은 지레 겁을 집어 먹었다. 그렇게 악마들이 주저하는 사이 이칼롯은 빠르게 태세를 전환해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바깥에선 그가 소집한 경비대가 무리지어 창을 겨누고 있었다. 이제 와 굳이 소집의 이유를 댈 필요는 없었다. 이미 악마 몇몇은 변이에 들어가 주변 사람들의 비명을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 어떻게 하지? 달아날까?”


악마 하나가 뒷걸음질치며 물러났다. 그러자 그레이브 디거가 놈의 멱살을 낚아챘다. 공황상태에 빠져 있던 악마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가 말했다.


“카악! 정신 나갔어? 아루의 수정을 빼앗겼다고! 어서 움직여!”


“하, 하지만 인간의 군대라고. 나, 난 죽기 싫어.”


“덜떨어진 녀석! 천 년이나 숨어 살더니 뼛속까지 패배주의에 찌들었군. 성언전을 떠올려. 우리 주민 하나면 인간 병사 서른은 너끈히 상대할 수 있다고. 알아? 지금 우리 숫자면 이 도시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이다.”


그레이브 디거는 마음을 다지기 위해 근처에 웅크리고 있던 급사의 목을 날려버렸다. 퍼억-하는 소리와 함께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본래의 악마형태로 몸을 변형시키며 말했다.


“생텀가드든 인간이든 관계없어. 지금 당장 수정을 되찾아 와야 한다. 안 그러면 드라칸이 우릴 몽땅 가루로 만들 거야!”


그것을 신호로 12마리의 슬러터가 일제히 마성을 개방시켰다.




콰드득! 식당의 벽을 통째로 부수며 악마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그 혐오스러운 광경은 이미 지겹게 악마를 상대해본 이칼롯조차 치가 떨릴 정도였다. 이래서 싸움을 걸지 않으려던 건데! 그가 이 정도니 막상 앞에서 마주하는 병사들의 공포는 말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 생전 처음 마주하는 괴기에 병사 상당수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몇몇 용감한 자들이 과감하게 앞으로 달려가 보기도 하였으나 분노한 슬러터들의 일격에 고깃덩이가 되고 말았다.


“로렌조, 병사 통솔해! 마리네가 달아날 시간을 벌어야 해!”


“무, 무리입니다. 이건 이미 끝났어요.”


란돌은 이를 악물었다. 병사들을 끌어모은 것까진 좋은데, 미처 작전을 설명하기도 전에 마리네가 일을 저질러버린 것이다. 교전 수칙이 슬러터 하나에 인간 마흔이라고 했던가? 그것도 달아나지 않고 싸울 때의 이야기지, 이렇게 공황상태에 빠져서는 병력의 우위고 뭐고 없었다.


“일단 우리라도 어떻게...!”


그런데 그 몇 마디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악마들이 마리네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시장에 모인 인파?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일단 한 번 시작을 끊자 악마들은 조금 전까지 얌전하게 식사나 하던 자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광기로 사람들을 학살했다.

어떻게든 제지해보려고 달려든 란돌도 육중한 악마, 레벨러(Leveler)의 상체에 치여 튕겨 나가고 말았다. 목책에 부딪치기 직전 그는 허공에 흩뿌려지는 무수한 피보라를 목격했다. 평화롭던 한 영지가,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이런 걸 의도한 게 아니었는데...루치페리아가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 한 것뿐인데.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수정을 내놓아라 꼬마! 그건 너 따위가 만져도 되는 물건이 아니야!”


이칼롯은 마리네를 잡아끌다시피 하여 골목에 몸을 숨겼다. 마리네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빼앗아 온 주머니를 풀어헤쳐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녹색의 수정이 그의 얼굴이 초록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실감이 났다. 수정은 탈환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그야말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미쳐 날뛰는 악마들의 손톱에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쓰러져가고 있었다. 수정을 쥔 손바닥이 담뿍 피로 젖어 있는 게 보였다.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관계없는 누군가의 피였다.


“마리네, 정신 차려!”


이칼롯이 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그 따가운 충격에 이성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 이칼롯.”


“잘 들어. 수정을 빼앗겨서는 안 돼.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알았어?”


악마들은 숨은 두 사람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호재임과 동시에, 고통스러운 악재이기도 했다. 놈들은 수정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광분하여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학살했다. 경비대만으로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게 확인된 지금, 이대로 가다간 시장에 모인 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할지도 몰랐다.

이칼롯이 텔슈피드를 고쳐 잡았다. 그는 아루의 수정은 마리네의 품에 집어넣고, 처음 훔쳐왔던 주머니만 갈무리해 허리춤에 걸었다. 적들을 낚기 위해 주머니에 적당히 돌멩이를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목표를 찾는다면 녀석들의 무의미한 살생도 멈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악마를 유인해낸다면.


“나랑 반대방향으로 움직여! 루치페리아의 속도라면 길어야 몇 분 이내에 도착할 거다!”


그는 마리네가 대답할 틈도 없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악마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굳이 ‘수정은 여기 있다’라고 외치지 않아도 놈들은 이칼롯의 허리춤에 걸린 주머니에 발광하여 달려들었다. 몇몇은 기다간 다리를 이용해 지붕을 건너뛰며, 또 몇몇은 뱀처럼 몸을 틀어 빠르게 거리를 좁혀왔다. 그 무시무시한 속도에는 이칼롯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전부 가지 마! 다섯만 따라가라.”


그런데 그때 그레이브 디거가 악마들의 흥분을 진정시켰다. 그 영악한 악마는 이칼롯이 미끼일 확률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의 명령에 가장 앞서 있던 슬러터 다섯만이 이칼롯의 뒤로 따라붙었다. 이칼롯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너무 빨리 작전이 들통 났지만 이제 와서 달리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고작 다섯이 아니다. 하나하나가 안개송곳니 단원과 필적하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 치의 방심이 곧장 죽음으로 연결되는 상황이었다. 지금으로선 부디 마리네가 잘 숨어 있기를, 그리고 한시 빨리 루치페리아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 서라, 인간!”


지붕을 뛰던 악마가 일순 도약하여 이칼롯에게 돌진했다. 다크리퍼(Dark Reaper)라는 이름의 그 악마는 다리가 뭉툭하고 눈이 커다래 마치 개구리와 같은 인상을 풍겼다. 이칼롯은 놈이 지붕을 박찰 때의 소리로 거리를 가늠해 놓았다가, 간격 내에 들어온 순간 일순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뛰어난 점프력을 공격에 활용하는 예는 이미 지겹도록 경험해 온 터였다.


“음?!”


샛노란 검의 궤적에 다크리퍼는 기겁하여 몸을 뺐다. 그러나 이칼롯은 후속타를 날릴 수 없었다. 둘은 도로를 달리며, 둘은 좌우 지붕을 박차며. 다섯 기의 슬러터는 부채꼴 모양으로 산개한 채 그를 포위해오고 있었다. 뒤마저 잡히면 끝장이란 생각에 이칼롯은 재빨리 후방으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

악마들은 격정에 휘말렸을지언정 무모하진 않았다. 오히려 초조한 쪽은 이칼롯이었다. 멀리 시장거리에선 여전히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마리네는 무사한지, 왕실기사단은 어떻게 되었는지 온통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렇게 자세를 잡고 있자니 다크리퍼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수정을 건네라. 우리도 살생은 하고 싶지 않아.”


살인을 저어하는 악마라. 왠지 그것도 현실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칼롯의 주머니엔 돌멩이밖에 들어 있지 않았으므로 악마의 요구를 수용하기란 불가능했다. 오히려 짧게 마련된 촌음을 살려 그는 어떻게 마리네에게 돌아갈지를 궁리했다. 그는 빠르게 자신을 에워싼 악마들의 생김새를 확인했다. 안경을 란돌에게 넘기고 온 탓에 놈들이 누구인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파악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단순히 도망만 다녀본들 악마를 따돌릴 수도 없거니와 체력소모만 커질 뿐이었다. 아니면 아예 텔슈피드로 놈들을 뚫고 왕실기사단과 합류하는 것은 어떨까? 그건 자신이 미끼였다는 사실을 얄팍하게 증명하는 셈이었다. 그나마 떼어낸 다섯 기의 악마를 다시 시장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역시 귀결되는 방법은 하나였다. 모두 쓰러뜨리는 것. 그러나 아무리 텔슈피드가 막강한 무기다 할지라도 상대에게 닿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방어용으로는 사용할 수 있겠지만 적을 따라잡을 수 없다면 하베스트 때와 같은 전철을 밟을 게 틀림없었다.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가능성이 이칼롯의 등을 떠밀었다. 우물쭈물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마지막 통첩을 전하는 다크리퍼에게 당당히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려주었다.


“...그럼 죽어라.”


이칼롯은 다시 등을 돌려 달음박질쳤다. 하지만 작전을 바꾼 지금, 그는 더 이상 미끼 따위가 아니었다.

승리를 위한 도주가 시작되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람의 계승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일러스트를 받았습니다! +7 15.07.26 1,297 0 -
공지 세계관 - 데루루피아의 편지 +7 15.03.22 3,315 0 -
345 람의 계승자 - ep.7 - 바이올렛(4) +104 15.09.01 2,318 49 24쪽
344 람의 계승자 - ep.7 - 바이올렛(3) +15 15.08.20 1,059 26 20쪽
343 람의 계승자 - ep.7 - 바이올렛(2) +11 15.08.09 1,066 35 23쪽
342 람의 계승자 - ep.7 - 바이올렛(1) +11 15.07.26 1,181 39 22쪽
341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4) +23 15.07.20 1,216 40 11쪽
340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3) +26 15.07.13 1,132 53 16쪽
339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2) +35 15.06.12 1,401 51 11쪽
338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1) +11 15.06.10 1,014 42 11쪽
337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0) +12 15.06.03 1,014 36 19쪽
336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9) +6 15.06.02 1,094 32 17쪽
335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8) +6 15.06.02 953 31 15쪽
334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7) +2 15.06.02 970 27 16쪽
333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6) +3 15.06.02 973 28 20쪽
332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5) +2 15.06.02 925 25 15쪽
331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4) +3 15.06.02 990 25 19쪽
330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3) +7 15.06.01 914 33 18쪽
329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2) +2 15.06.01 930 27 22쪽
328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 +3 15.06.01 878 26 23쪽
327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5) +5 15.05.31 935 29 13쪽
326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4) +1 15.05.31 851 23 19쪽
325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3) +2 15.05.31 918 25 22쪽
324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2) +2 15.05.31 949 24 19쪽
323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1) +1 15.05.31 782 21 20쪽
322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5) +10 15.05.30 980 34 21쪽
321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5 15.05.30 877 26 19쪽
320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6 15.05.27 1,021 30 18쪽
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48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1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5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7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1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7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9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80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40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10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7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8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50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9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30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2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7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40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3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8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8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3 25 2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