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4 - 에메랄드 섬(2)
녀석이 입에 물고 있던 살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그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식사를 계속하는 게 모두의 바람이었지만....아쉽게도 녀석은 새로운 먹잇감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뭐? 행운을 가져다줘? 믿은 내가 병신이지!”
제리온의 푸념과 동시에 시 서펜트가 배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한 뱀이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광경은 더할 나위 없이 소름끼쳤다. 선상에선 즉시 난리가 났다.
“으아아악?! 저거 어떻게 해! 이쪽으로 오잖아!”
“검, 검 어디다 뒀더라?”
루도는 허둥대며 무기를 찾았다. 그는 뒤늦게 선실에 검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일행이 공황상태에 빠진 건 단 수초에 불과했지만, 시 서펜트는 순식간에 접근해왔다. 곧이어 거대한 입이 배 위를 덮쳤다. 녀석의 입은 곧장 에레이시아를 향했다.
“꺄아아아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시 서펜트의 이빨이 아슬아슬하게 치맛자락을 물자, 그녀는 갑판에 쓰러진 채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디리터가 달려와 그녀의 팔을 붙잡고 힘껏 끌어당겼다.
“디리터!!”
“치마 벗어!”
디리터는 있는 힘을 다해 그녀를 잡아당겼고, 이내 시 서펜트의 이빨에 걸린 치마가 부욱 뜯겨 나갔다. 녀석의 목이 반작용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그 무렵 선실 가까이 있던 이칼롯이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배가 어찌나 요동치는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는 침착하게 검을 던졌다.
“루도! 마리네! 받아!”
“오, 좋았어.”
루도는 그대로 몸을 날려 검을 받아냈다. 즉시 검을 뽑아 전투태세를 취하려 하는데, 마침 표적을 바꾼 시 서펜트가 그에게 돌진해왔다.
“와라! 이 물뱀 자식아!”
그의 외침을 들었는지, 녀석은 날카로운 괴성을 지르며 입을 벌렸다. 성인 하나쯤은 가볍게 삼킬 만한 크기의 입. 짧은 망설임 후 루도는 황급히 뒤로 달아났다. 디리터가 도망치는 그를 보며 욕설을 날렸다.
“야 임마! 와보라면서!”
“아니, 그게, 아무래도 좀 아닌 거 같어.”
시 서펜트는 그 육중한 몸집만큼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루도가 놈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동안, 마스트며 키, 선실 외벽이 마구 부러져나갔다. 마리네와 이칼롯이 뒤를 잡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공중에 떠 있는 목을 캐치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키이이잇!!”
뱃머리에 다다라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루도는 다급하게 검을 일자로 세워 몸을 보호했다. 뒤이어 시 서펜트가 그에게 부딪혀왔고, 엄청난 충격이 그를 강타했다.
“우왁!!”
놈이 칼날에 입 주변을 베여 물러서지만 않았더라면, 루도는 그대로 통째로 씹혀 뱃속에 들어갔을 것이다. 루도는 그대로 몇 미터를 날아가 반쯤 기울어진 돛 위에 떨어졌다.
“좀 더 시간을 끌어봐라, 이 녀석들아!”
창고로 달아났던 랄프와 라비가 무언가를 끌고 나타났다. 그것은 소형 발리스타로, 쇠뇌 대신 기다란 작살을 사용하는 종류였다. 둘은 재빨리 작살을 장착하고는 시 서펜트의 목을 향해 발리스타를 겨눴다. 하지만 녀석이 어찌나 기민하게 움직이는지 발사는커녕 제대로 조준하기도 힘들었다. 급한 마음에 쏜 첫발은 헛되이 바다로 사라졌다.
“썅! 조준을 그따위로 하면 어떻게 해!”
디리터가 달려와 발리스타를 가로챘다. 그가 다시 작살을 장전하는 동안 루도는 돛 위에서 허우적대며 시 서펜트의 입을 튕겨내고 있었다. 장전을 끝낸 디리터가 외쳤다.
“야! 좀 가만히 있어봐! 조준이 힘들잖아!”
“미친! 그럼 나 대신 싸워라! 내가 조준할 테니.”
절박한 상황에서 루도는 돛을 찢고 그 틈으로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루도를 습격한 시 서펜트는 돛에 머리를 박고 허우적거렸다. 녀석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동안, 디리터는 재빨리 녀석의 목덜미에 발리스타를 조준했다.
“향유고래의 행운!”
텅~. 작살이 날아가는 소리는 육지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정말로 기도가 효과를 본 것일까? 작살은 정확히 시 서펜트의 목에 꽂혔다.
“끼이이이이!!”
자지러지는 비명과 함께 놈이 경련을 일으켰다. 돛이 시 서펜트의 목에 엉켜 있었기 때문에, 녀석이 버둥거림에 따라 배 또한 요동쳤다. 그러자 갑판에 서 있던 마리네가 기어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다에 빠졌다.
“으악! 어푸! 도와줘!”
마리네는 덮쳐오는 파도를 온몸으로 받으며 외쳤다. 하지만 선상에서는 발악하는 시 서펜트 때문에 그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빨리 올라와, 등신아!”
“와, 진짜 매정하다아!”
그즈음 이칼롯이 허우적대는 시 서펜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은 정확히 놈의 목을 베었지만, 워낙 굵기가 굵어 절단하기엔 무리였다. 급소를 두 번이나 공격당했지만 녀석은 여전히 팔팔하게 움직였다.
“키잇! 캬아악!”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려 하는데, 놈이 돌연 방향을 틀어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드디어 물러나는 것인가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멀리서 마리네의 비명이 들려왔다.
“히익! 나, 나, 나 좀 빨리 꺼내줘!”
그제야 일행은 마리네가 바다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허겁지겁 뱃머리로 몰려갔다. 루도가 그에게 구조용 밧줄을 던지는 동안, 이칼롯은 놈의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시 서펜트는 어디로 간 것인지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았고, 특별히 마리네를 공격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그런데 돌연, 배가 휘청거리더니 자재 부서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랄프가 말했다.
“빌어먹을! 바다 속에서 공격할 셈이다! 용골을 부수려 하고 있어!”
“뭐? 그럼 어떻게 해요?”
바다에서 일생을 보낸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배 밑바닥을 뚫고 있다는데 인간이 대응할 만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대로 가다간 배는 꼼짝없이 침몰할 것이고, 물에 빠진 사람들은 사이좋게 시 서펜트의 입속으로 들어갈 게 분명했다. 그때,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제리온이 다급하게 외쳤다.
“마리네 끌어올려! 빨리!”
“안 그래도 그러는 참이다!”
루도와 디리터, 이칼롯이 밧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덕분에 마리네는 선수, 보우스프릿(Bowsprit), 선수 깃대 등에 사정없이 몸을 부딪치며 순식간에 갑판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마리네가 구조되자 그 즉시 제리온의 마법이 터졌다.
“쇼크(Shock)!!"
눈앞이 번쩍, 하더니 샛노란 빛이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마법을 잘 모르는 일행은 그저 제리온의 행위를 숨죽이고 지켜볼 뿐이었다. ‘쇼크’의 반작용으로 제리온의 머리카락이며 털이 바짝 곤두섰다. 하지만 그는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다시 마법 한 방을 바다에 내리꽂았다.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빠지지직...제리온의 손가락에서 시작된 번개 줄기가 바다를 강타했다. 그 꿈틀거리는 번개의 향연 속에서, 일행은 다시 한 번 마법의 위력을 실감했다.
“으헉!”
시전이 끝나자 제리온의 몸이 돌연 반대로 튕겨 나갔다. 루도가 쓰러지려는 그의 몸을 받았다. 그런데 제리온은 자신의 몸은 관심도 않은 채 물었다.
“어떻게 됐어?! 그 뱀 새끼!”
“어? 잘 모르겠는데...”
그 순간 선미에서 화답이라도 하듯 시 서펜트가 튀어 올랐다.
“캬아아아!”
“제기랄! 두 방이나 처먹였는데도 움직이는 거냐!”
제리온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는 마법을 연이어 구사한 탓인지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시 서펜트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놈 또한 제리온의 마법을 정통으로 먹은 탓인지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이칼롯과 디리터는 이번에야말로 놈을 끝장내기로 작정하고 발을 굴렸다.
“저 모가지 어떻게 좀 고정할 수 없어?”
“하는 데까지 해보지.”
디리터는 부러진 마스트를 딛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와 발맞추어, 이칼롯과 마리네가 검을 휘두르며 녀석의 시선을 끌었다. 루도는 제리온을 보호하려 했지만, 그가 발길질을 해댐에 따라 재빨리 발리스타로 달려갔다.
작살을 장착하고 나서 루도는 시 서펜트의 머리에 발리스타를 겨눴다. 하지만 난동 부리는 녀석에게 작살을 조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곰이나 호랑이면 모를까, 저렇게 길고 얇은 모가지를 맞추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마치 허공에서 뱀장어가 춤을 추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넋 놓고 있다간 마리네와 이칼롯이 위험해질지도 모르고, 녀석이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가버릴 수도 있었다. 루도는 이를 악물고 발리스타를 발사했다.
“맞아라!”
터엉! 발사음과 함께 작살이 쏘아졌다. 마스트 위에서는 디리터가 거리를 재고 있었다. 작살이 적중한다면 놈의 움직임이 한순간 멎을 테고, 그럼 디리터가 결정타를 날릴 것이었다.
“키잇?! 키잇!”
하지만 루도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시 서펜트가 이리저리 목을 트는 바람에 작살은 덧없이 허공을 갈랐다. 모두의 시선이 빗나간 작살을 향했다.
때문에, 에레이시아가 던진 냄비가 시 서펜트의 뒤통수에 적중했을 때는 전부 놀라 고개를 돌려야 했다.
따앙! 경쾌한 쇳소리와 함께 녀석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에레이시아는 디리터를 향해 목이 부러져라 외쳤다.
“죽여버려, 디리터!!”
“에라라라~!”
디리터는 그대로 마스트를 박차고 뛰어내렸다. 시 서펜트는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탓인지 접근하는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뒤이어 거대한 투핸드소드가 놈의 목을 두 동강 냈다.
잘린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선상에 흩뿌려졌다. 시 서펜트는 허공에서 한 번 몸을 비틀고서, 힘없이 바다에 처박혔다. 그마저도 육중한 무게 때문에 배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예아!!”
“잡았다!”
“난 최고다, 푸하하핫!”
괴물을 쓰러뜨렸다는 승리감에 다들 목청껏 환호성을 질렀다. 바다는 이미 시 서펜트가 흘린 피, 그리고 좀 전의 고래시체에서 나온 피로 이미 진홍빛으로 물든 상태였다. 어림잡아 십여 미터는 될 법한 괴수라니, 해병을 꽉꽉 채운 군함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 텐데 그런 녀석을 죽인 것이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에레이시아가 디리터에게 달려가 안겼다.
“바보야! 진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응? 내가?”
“내가!!”
마리네와 이칼롯은 시 서펜트가 뿌린 피를 정통으로 뒤집어쓴 바람에 온통 피 곤죽이 되어 있었다. 둘은 침을 퉤퉤 뱉다가, 서로의 몰골을 보며 싱긋 웃었다.
“허어~. 정말 죽일 줄은 몰랐는데.”
랄프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루도는 아직도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녀석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못 죽일 줄 알았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요?”
“그야 여기서 다 같이 꾀꼬닥~하는 줄 알았지.”
“왜 저런 거 나온다고 말 안 해줬어요?”
“뭐...이번에도 운이 좋을 줄 알았거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돌연 선체가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선실 근처에 앉아 있던 제리온이 비명을 질렀다.
“어어?! 이거 왜 이래?!”
뱃머리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균형을 잡기 힘든 지경까지 다다랐다. 라비가 선실 내부로 내려 갔다 온 후 말했다.
“선실에 물이 차고 있어요.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아요.”
“으윽...용골이 부러진 모양이군. 힘들게 됐는데.”
랄프가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용골이 뭔지 알 리 없는 루도가 불안함을 느끼며 말했다.
“왜요?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배가 곧 침몰한다는 뜻이다.”
“에엑! 그럼 어떻게 해요!”
랄프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배는 급속도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제리온, 너 라이트 애로우(Light arrow) 쓸 줄 알지?”
제리온은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마스트를 붙들고 있었다. 그가 투덜대며 답했다.
“설마 그런 기초 마법을 못 쓸라고. 근데 왜요?”
“하늘에다가 한 방 쏴봐라. 그럼 섬에서 구조하러 와줄 거야.”
“뭐? 이 거리에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새꺄! 좀 시키면 군말 없이 빠닥빠닥 못 하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칼롯과 라비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바다에 뛰어든 상태였다. 잠시 후 제리온이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마법을 날렸다. 강렬한 빛줄기가 하늘 높이 치솟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이와 궤를 맞추어 배 또한 완전히 가라앉고 말았다.
“으아...이대로 죽는 거 아니야?”
마리네가 부러진 판자 조각을 붙들고 허우적댔다. 산간 출신 소년에게 발이 닿지 않는 공포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나마 섬이 코앞인 지역에서 침몰해서 그렇지, 망망대해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옆에선 루도와 디리터가 서로 와인통을 선점하려고 티격태격 대고 있었다. 특히 칼 같은 경우는 너무 무거워 금세 가라앉았기 때문에, 쇠붙이를 따로 운반할 도구가 절실했다.
“윽, 무거워...그냥 버리고 가면 안 돼?”
“좀 참아주라. 울 아부지 유품이라.”
큼직한 널빤지 위에 에레이시아를 앉힌 후, 디리터는 도감과 투핸드소드 따위를 맡겼다. 다른 사람들은 둥둥 떠오른 오크통을 이용했다. 랄프가 창고에 와인을 잔뜩 싣고 온 탓에 오크통은 넘쳐났다.
그렇게 바다에 표류한 지 삼십여 분가량 흘렀을까, 슬슬 조난에 대한 공포가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루도가 랄프에게 물을 튀기며 물었다.
“영감님! 아무 소식도 없는데, 역시 못 본 거 아니에요?”
“...그런가...? 그 인간도 사람이니.”
“아무리 여름이라도 그렇지 슬슬 몸이 추워지려고 해요.”
“조금만 더 참아봐라.”
좋게 돌려 말할 수도 있건만, 랄프는 질문에 매우 정직하게 답변함으로써 일행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특히 시 서펜트가 또 나타날 수도 있냐는 물음에는 대차게 고개를 끄덕여 에레이시아를 울리기도 했다.
그렇게 또 삼십 분이 흘렀다. 파도를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고 있자니 루도는 자신이 무슨 부유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돌연, 하늘에서 웬 새 한 마리가 배의 잔해로 날아왔다. 갈매기겠거니, 생각하고 무심히 있는데 새의 크기가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생김새 또한 일반 새와는 확연히 다른 게 다리가 네 개나 나 있었다. 마치 독수리와 말을 합쳐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새의 등 위에 무언가가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거라 여겼지만, 녀석이 점차 다가옴에 따라 그 추측은 사실이 되었다.
“야 이 녀석아! 너무 늦었지 않느냐!”
랄프가 새를, 정확히는 새 위에 탄 소녀를 향해 외쳤다. 일행은 하늘을 날고 있는 소녀를 보며 경악에 휩싸였다. 향유고래, 시 서펜트도 충격적이긴 했지만, 사람이 새를 타고 다닌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말도 안 돼.”
새의 날갯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지자 위에 탄 소녀의 생김새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하늘의 빛깔을 그대로 녹여 염색한 듯 푸른 머리카락이었다.
소녀가 랄프를 발견하곤 팔을 흔들었다.
“얏호! 랄프 할아버지!!”
가까이서 보니 새는 웬만한 호랑이에 필적할 만큼 거대했다. 제리온이 녀석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설마...그리폰인가?”
“그리폰 맞지요~. 할아버지, 저 오빠들은 누구?”
소녀가 싱글거리며 일행을 가리켰다. 그러자 랄프는 바닷물을 튕기며 소녀에게 소리 질렀다.
“꺄! 할아버지이~! 가루루가 화내요.”
“인석아! 그런 건 건져 올리고 나서 물어봐도 늦지 않잖아! 내가 언제 혼자 여기 오는 거 봤냐?!”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잠깐만요오~.”
그녀는 귀엽게 자기 이마를 톡 치더니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뭘 하려나 싶어 잠자코 있는데, 갑자기 카드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와, 엘리엇!”
소녀가 이름을 말하자 빛이 점차 한 곳으로 응축되더니, 거대한 물 덩어리로 변했다.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그건 그야말로 물 ‘덩어리’였다. 아무런 용기도 없이 허공에 물이 고여 있는 현상은 그것 외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예이~가랏!”
그녀가 명령하자 물 덩어리가 쏜살같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에레이시아는 또 무슨 괴상한 게 나온 것인가 싶어 질겁했다.
그런데 잠시 후, 일행의 몸이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두발로 걸을 수 있는 지경까지 도달했다.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보며, 루도는 더 이상 괴현상에 놀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다.”
“...고향에 가서 말했다간 사기꾼 취급받을 거야.”
일행을 물에 띄워 준 뒤, 소녀는 그리폰이 힘들어한다며 먼저 돌아갔다. 그렇게 일행은 터벅터벅 걸으며 바다를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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