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몽월도(夢月島) - 4화
“하하하. 제가 오늘도 운이 좀 좋은 것 같습니다. 우연찮게 펼친 연격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졌네요. 아니면 채주께서 저를 배려하시려고 일부러 져두라고 하신 건 아니신가요? 아, 저도 제 승리가 믿기지 않습니다.”
요란스럽게 떠들며 자리로 돌아가 술을 한 잔 마시는 파락공자를 보며 좌중은 물 끼얹은 듯 침묵했다. 불과 사오 초식 만에 수채의 최강자 중 하나인 파월검이 패배한 것이다. 운이 좋았다고 떠들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마저 싹트고 있었다. 채주 독비옹과 두 부채주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장난처럼 시작한 대련에 채주의 사적인 욕심이 들어가 어이없는 결과가 빚어진 것이었다. 상유는 술을 한 잔 더 따라 마시더니 호탕한 목소리로
“저도 이제 묵월채의 한 식구가 되었네요. 이거 축하도 안 해 주십니까?”
상유의 목소리에 이제야 정신들이 돌아 온 채주는 마지못해 축하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파락공자 축하하네! 이제 우리 묵월채에 세 명의 부채주가 생겼구만. 좋은 일이지. 그럼 좋은 일이야! 자. 다들 축하해 주시게.”
입이 쓰긴 했지만 자신이 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모두가 보고 들은 자리기에.
저녁을 먹으며 시작된 만찬은 밤이 깊어져도 끝을 몰랐다. 이들은 이런 일이 자주 있는지 자리를 옮겨 다니며 만취가 되도록 서로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상유는 세 의형제를 집중적으로 공략해서 취하게 만들고는 먼저 자리를 뜨게 하였다. 그리고는 분채주들과 어울려 인사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성향을 파악했다. 수적이라고 해서 다 못된 놈들만 있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이른바 녹림의 도라는 것을 외치는 그럴듯한 자들도 있었다.
독비옹과 그 의형제들은 오로지 힘과 공포에 의한 치리를 하고 있었나보다. 그들의 힘에 억눌려 감히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술이 좀 들어가고 채주 형제들이 자리를 뜨자 대화중에 은근히 그런 것들에 대한 비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공공연하게 세대교체를 운운하는 자들도 있었다. 취중진담이라고 하지 않는가! 상유는 홀로 이곳에 침투하며 가장 쉽게는 채주와 중요인물들을 기습해 죽이려는 것부터 동조자들을 얻어 반란을 일으키는 것까지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느꼈다.
새로 부채주가 된 상유의 어마어마한 무력을 감상한 그들이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 한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상유는 부상을 입고 먼저 자리를 뜬 파월검 가득인을 찾아갔다. 어깨는 깊게 베인 것이 아니라서 소독하고 금창약을 바른 후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상유의 무릎에 직격을 당한 그의 코를 중심으로 얼굴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부어 있어서 미안함을 전했다.
“그렇게 미안해 할 필요 없소이다. 정정당당한 대련에서 패하고도 이 정도 외상만 입었으니 나 가모는 창피할 것도 없고 공자도 그런 얼굴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보오.”
“흠.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군요. 이렇게 넓은 마음을 가진 분이라면 앞으로 좋은 벗으로 지내고 싶소이다.”
“하하하. 좋소! 이 도적에 불과한 나를 벗으로 여긴다니 오늘 이 가모는 기쁠 일이오.”
그는 입안이 헐었는데도 굳이 이런 날 한잔 안할 수 없다며 술을 내오라 하여 기어코 한 병을 마시고 말았다. 파월검 가득인이 수적의 무리에 머물기에는 정말 아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한 상유는 이후에도 자주 그와 좋은 시간을 가지며 친목을 도모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도 상유의 해박함과 솔직함에 은근히 벗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상유는 채주를 찾아가 부채주의 자리를 준 것에 감사한다며 갖은 아양을 떨고는 자신도 되지도 않을 약속들을 남발했다. 그리고 이왕 온 김에 며칠 묵으며 수채의 상황도 좀 알고 채주에게 더 많은 가르침도 얻겠다며 아예 전각 하나를 달라고 떼를 썼다. 독비옹은 불안한 와중에도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별채 하나를 내주고 말았다.
주로 수채를 방문하는 고위급 인사들의 숙소로 쓰던 작지 않은 별채를 내준 것이다. 그리고는 형식적으로 대외적인 업무를 맡는 대외 부채주라는 공식 직함도 함께 내렸다. 상유는 아깝지만 가지고 있던 야명주를 꺼내 채주께 상납하는 영악함도 보여줬다. 그리고 호법단원 중 막내인 미나를 환희문으로 보내며 이 책사에게 장문의 암호 편지를 써서 전하게 하였다. 원래 계획 중에 두 번째 상황대로 진행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두 번째 상황이라는 것이 바로 내부로부터 직접 반란을 획책하는 것이었다. 돌아가는 상황 상 굳이 피해가 많은 작전을 구사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날부터 상유는 매일 크고 작은 술자리를 만들어 수채의 주요 인사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피아 식별에 남다른 재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채주와 그 형제들은 상유가 몇 날 몇 일을 술독에 빠져 산다는 소리에 그만 그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실수를 하게 되었다.
열흘을 그렇게 보낸 날 아침, 몽월수채의 정기회의가 대전 회의실에서 개최가 되었다. 그 자리에는 사십사 명의 인물들이 참여를 한다. 각 분채에서 다섯 명, 그리고 채주와 부채주 넷이 포함 된 숫자였다. 일상적인 노략질을 이들은 작전이라 불렀다. 작전계획 발표와 지난 작전 결과 보고가 주요 의제였다. 평소와 같이 회의가 마무리될 무렵 이화 분채주가 일어서더니 특별 안건을 제안했다.
그것은 놀랍게도 팔채등룡제라는 행사였다. 이것은 현 독비옹의 체제가 들어서며 형식적으로만 존재했던 행사였다. 이들이 여덟 개의 수채의 연합이다 보니 처음 연합을 이룰 당시 분채들을 회유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채주 선출 행사였는데 이것이 삼십오 년 만에 처음으로 상정된 것이다.
채주와 그 의형제들은 불같이 화를 냈지만 반대할 여지가 없었다. 형식적이긴 했지만 분명히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체제와 행사였던 것이다. 스스로 한낱 도적이 아니므로 각 분채의 의견을 수렴하고 언제든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말하며 연합을 이루었으니 스스로의 꾀에 스스로 빠져 거부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셈이었다.
이제 문제는 상정된 안건의 통과 가부였다. 사십사 명의 인원들이 비밀리에 투표를 하고 가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독비옹은 자신이 있었다. 각 분채에는 이미 자신이 박아 놓은 자들이 상당수 있었고 피의 숙청을 두려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시키기라도 하듯이 살기를 머금고는 좌중을 훑어보고 있었다. 절차에 따라 투표를 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개표가 시작되었다.
서기를 맡고 있는 마라 분채주가 한 표 한 표를 들어 확인을 시키며 개표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독비옹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팔채등룡제를 지지하는 표가 자그마치 스물아홉 표나 나온 것이다. 겨우 열다섯 표만이 현 체제를 지지한 것이었다. 서기는 절차에 따라 이틀 후 중앙 광장에서 팔채등룡제가 개최될 것임을 선포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주요 보직은 모두 반납되었으며 규정에 따라 각 분채에서 지명한 여덟 명이 임시 치리를 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똥 씹은 표정으로 상유를 쳐다보는 독비옹과 그 형제들은 이제야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개망나니 같은 놈! 어떻게 며칠 만에 이런 파락호 같은 짓을...”
이를 악물고 살기를 품으며 상유에게 말을 하지만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다. 팔채등룡제가 발표된 이후 고의적인 사고를 치면 참가 자격이 박탈되는 것이었다. 상유는 이제 굳이 어리숙하게 그들을 대할 필요가 없었다.
“거 늙은이들. 그러게 적당히 좀 해 처먹지. 배가 터져라 지들만 배부르니 이런 뒤통수를 맞는 것 아닌가 말이오! 내일모레 힘쓰려면 지금 헛힘 빼지 말고 녹슨 몸이나 잘 기름칠 하시구랴. 하하하”
“이, 이, 이런...”
독비옹의 손에 비수가 이미 들려있었지만 던질 수는 없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더욱이 자신의 세력보다 더 많은 반대 세력이 있지 않은가! 속이 뒤틀리고 화가 머리를 터트릴 것 같았지만 돌아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나가자 사람들은 걱정 반 기대 반의 얼굴로 상유와 가득인의 주위로 모였다. 가득인은 침착하게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했다.
“진즉에 이랬어야 했소. 이제라도 가야 할 길을 가야 한다고 나는 믿소이다. 걱정들 하지 마시오. 하늘이 우리 녹림을 버리시지 않을 것을 나는 믿소이다!”
팔채등룡제가 있기까지 수채는 조용했다. 호위에 필요하다는 사유를 들어 임시치리단의 허가를 얻은 상유는 호법단원 여덟 명을 모두 호출했다.
그리고 동조자들의 도움을 받아 수적으로 위장한 적월대원 오십 명이 행사 당일 대회장에 구경을 빌미로 군데군데 자리를 잡았다. 삼십오 년 만에 열리는 행사는 모두가 바라맞는 축제의 분위기로 시작이 되었다. 누가 차기 총채주가 되던지 이를 기점으로 가일층 발전하고자 하는 이들의 염원이 모인 것이었다.
등룡제에는 총 열한 명의 참가자가 신청서를 접수했다. 대전 방식은 누구든 먼저 일승을 하는 자는 이 회전에 올라간다. 참가인원이 홀수여서 전 채주는 기득권을 인정하여 일회전을 부전승으로 올라가기로 합의하였다. 그렇게 여섯이 남으면 제비를 뽑아 두 명씩 싸워 삼 회전 진출자를 가리며 세 명이 가려지면 다시 제비를 뽑아 둘이 싸우고 마지막 채주를 선출하기로 하였다. 적어도 세 번이나 네 번은 이겨야 채주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연무장에 뛰어 든 것은 의외로 대외 부채주인 상유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성질 급한 거구의 칠 척 장신, 부채주 거령월도 이문식이 올라왔다. 첫판부터 강한 자들이 맞붙은 것이다. 성질이 얼마나 급한지 그는 연무장으로 나오면서 벌써 도를 들고는 달려들었다. 상대가 항복 할 때까지 벌이는 싸움이니 형식은 의미가 없었다. 상유는 신행미종보를 가볍게 밟으며 거령월도의 무시무시한 도를 피했다.
덩치가 크고 사십 근이나 되는 거도를 휘두르니 동작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눈먼 검을 맞을 상유가 아니었다. 상유는 검은 뽑지도 않고 마치 나들이 나온 사람처럼 도(刀) 사이를 미끄러져 다니며 상대의 힘을 뺐다. 일각이 지나자 거령월도는 힘이 드는지 나이 탓인지 씩씩거리며 서더니
“이 비겁한 놈아! 도망만 다니지 말고 덤벼라!”
말을 하면서도 힘이 드는지 가슴이 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때서야 상유는 웃으면서
“경로 우대였소이다. 이제 그럼 해 볼까요?”
상유가 검을 꺼내더니 쏜살같이 최단거리로 이문식의 단전을 찔러갔다. 얼마나 빠른지 거령월도는 도로 쳐냈는데도 그의 단전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상유는 표설보를 전개하며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움직이며 집요하게 이문식의 단전을 찔러댔다.
반각이 지나자 거령도의 단전아래의 옷은 완전히 피에 물들었다. 하지만 상유도 이문식도 그만 둘 생각은 없었다. 다시 단전을 찌르는 것 같자 이문식은 급히 몸을 뒤로 빼며 자신의 애도로 막아섰는데 순간 상유의 검이 검로를 바꾸어 베어갔다. 순간 무엇인가 묵직한 것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것은 도와 함께 아직도 도를 꽉 쥐고 있는 거령월도의 오른손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은 그의 손으로 돌아갔다. 그때서야 손목의 잘린 부분에서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멍하니 떨어진 도와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볼 뿐이었다. 상유가 다시 빠르게 다가서자 사람들은 경악했는데 알고 보니 상유는 그의 혈도를 쳐서 지혈을 한 것이었다. 누군가 연무대로 올라와 거령월도를 부축해서 내려갔다.
이렇게 이회 전 진출자가 하나 결정되었다. 이후 올라선 이화 분채주는 다른 분채주 하나를 가볍게 이기고 이 회전에 올랐다. 적염 검자는 회의의 서기를 맡았던 마라분채주가 나서자 비로소 올라왔다. 적염검자는 마라분채주를 반각 만에 몰아붙여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그래도 생각이 있는지 함부로 살수를 펼치지 않았다. 이후에는 각 분채의 네 명의 대표들이 격돌해 두 명의 이 회전 진출자를 가렸다. 이회전의 제비를 뽑았다.
결과는 묘하게도 상유와 적염검자가, 이화분채주와 망월분채주가, 독비옹과 포남분채주가 맞붙게 되었다. 이화분채주와 독비옹이 먼저 삼회 전에 올라갔는데 독비옹은 보라는 듯이 포남분채주의 사지에 비수를 박았고 항복을 외치려는 포남분채주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목에 비수를 날리는 살수를 선보였다. 이제 마지막 이회전이 남았다. 다시 두 명의 부채주가 맞붙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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