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파락공자(擺落公子)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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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다섯! 상유가 사문을 벗어나 첫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는 길이었다. 열다섯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듬직한 체구였다. 보통 성인의 신장인 다섯 척 반쯤 되는 키에 적당히 붙은 근육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 호리호리한 것이 보기 좋았다. 보통의 강호인들의 체구보다는 다소 작은 편이지만 애기 같던 얼굴은 이제 제법 사내태가 났으며 검고 짙은 눈썹과 그 아래 다소 커 보이는 쌍꺼풀 없는 눈은 깊었고 적당한 콧대아래 굳건히 다문 입술은 다소 고집스럽게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확실한 호남형의 얼굴이었다.
특이하게도 매일 수련에 매달리는 데도 얼굴빛은 타지 않아서 서생 같은 느낌도 들었다. 상유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사천성 성도에 있는 속가제자가 이끄는 표국에 생긴 문제의 해결을 돕는 일이었다. 보통 속가제자가 이끄는 문파나 도장, 그리고 여러 사업체들이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이와 같이 본산에 도움을 청하고 본파의 핵심 인물을 파견해 돕는 것이었다.
이른 바 상부상조인 것이다. 이번에 큰 어려움을 당한 신풍 표국주인 최태식이 본산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속가제자는 아니지만 성도에서 사업을 하면서 꾸준히 아미파를 후원해 왔던 것이다. 장문인과 주요 인물들이 이를 협의하는 중에 우연히 이 일을 알게 된 소화 사태가 좀처럼 문중의 일에 나서지 않던 선례를 깨고 상유를 지명한 것이다.
그래서 사질 둘을 데리고 기분 좋게 성도로 가는 길이었다. 사질이라고는 하나 둘 다 상유보다는 나이가 많았다. 한 명은 장문인의 이대 제자중 발군의 모습을 보이는 이나영이었다. 그녀는 올해 스물로 다다음대 장문인을 바라보는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이대 제자 중 나이가 많은 편인 스물여섯 살의 양서희라는 사질이었다.
둘 다 빠지지 않는 외모였지만 특히나 이나영은 강호의 후기지수들 중에 빼어난 용모와 실력을 갖춘 무리들을 이르는 강호사화(江湖四花)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상유는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에 불쑥 만져 본 그녀의 가슴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육년 전이니 이나영이 열네 살에 불과할 때였다. 그러니 제대로 된 발육 전이었던 것이다. 여자를 얼굴보다 가슴으로 판단하는 특이한 상유만의 기준이었다.
그 당시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그녀를 뒤로한 이후 ‘절벽’리라는 상유의 고정된 인식은 바뀌지 않아 그녀 근처에 가 본적이 없었으니 그녀가 유독 상유에게 찬바람이 부는 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성도까지는 가깝지 않은 길이라 말을 타고 가야 하는데 말을 탈 줄 모르는 상유는 승마를 한나절 배우고서야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새침데기 같은 이나영은 여전히 상유에게 쌀쌀 맞았게 대하는데 반해 양서희는 다정한 친누이처럼 다소곳했다. 산문을 벗어나자마자 상유는 자기 말고삐를 나영에게 건네주더니 서희의 말에 펄쩍 뛰어 오르는 것이었다.
“나영 사질. 난 아무래도 아직 말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좀 힘들군. 서희 사질과 함께 타고 가면서 더 배워야 할 것 같아.”
이나영은 상유의 행동에 기가 찼지만 사숙의 말고삐를 잡더니 꼴 보기 싫다는 듯이 앞서서 나가기 시작했다. 서희의 뒤에 올라 탄 상유는 나영이 앞서 나가자 서희의 귀에 대고는
“서희 사질과 같이 말을 타니 너무 좋은데. 음... 이 향기로운 냄새! 따스한 느낌! 사질은 도대체 뭘 먹는 거야? 어떻게 이런 좋은 냄새가 나지? 너무 좋네.”
귓볼에 대고 그와 같이 말하자 양서희의 얼굴은 금방 홍조를 띠었다. 그리고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뒤에 앉은 상유의 몸이 순간순간 서희의 몸에 닿는 데 고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힘이 들 정도였다. 어느 덧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은 허리를 감싸 안았고 수시로 위로 올라가 가슴을 자극하니 더 이상은 말을 몰수가 없어서 멈추기에 이르렀다.
“사숙. 이제 그만 각자 타시죠. 갑자기 몸이 안 좋아 말을 몰기가 힘들어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양서희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에 상유는 약간 후회를 하더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런데 몸이 안 좋다니 내가 몰 테니 내 뒤에 타”
몸이 안 좋다고 했으니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앞에 타는 것보다는 뒤에 타니 좀 나았다. 잠시 후에는 서희가 상유의 허리를 꼬옥 안았는데 상유는 등에 그녀의 가슴이 닿자 푸근했다. 여자의 마음은 알 수 없었다.
이틀에 걸쳐 달려서 성도에 들어섰다. 성도 안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서 말을 타고는 갈 수 없어 말고삐를 잡고는 걸었다. 천천히 걸으며 인파를 헤치고 가는데 생전 이런 도시는 처음인 상유는 신기하고 놀랄 것들이 많아 여기저기 기웃대며 천천히 길을 갔다. 마치 마실 나온 종갓집 도련님 같았다. 시전 길가에 파는 국수를 보더니 사질들을 불러 가락국수 한 그릇씩을 먹고 닭고기 꼬치도 두 개나 먹고서야 길을 나섰다.
물어물어 한참을 가서야 마침내 신풍 표국이라 깃발을 내 건 장원이 보였다. 문 앞을 지키던 무사들이 신분을 묻자 양서희가 나서서 이야기를 했고 그들은 급히 반기며 안으로 일행을 안내 했다. 집사가 달려와 일행을 이끌고 들어서는데 표국이 작지 않았다. 들어서는 길 우측에는 십여 개의 큰 창고가 있고 좌측으로는 표사를 비롯한 소속 인원들이 묵는 숙소와 마구간이 보였다.
그런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굉장히 썰렁한 모습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대청이 있었고 그 곳에는 소식을 들은 표국주와 표국의 인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
육척이 넘는 커다란 체구의 사내가 호탕한 모습으로 나서며 인사를 하는 것을 보니 그가 바로 도움을 요청한 신풍 표국주 최태식인 것 같았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 임무의 책임을 맡은 일대제자 위상유라고 합니다.”
이번 일이 쉽지 않은 일인데 생각보다 젊은 제자가 책임자라고 나서니 표국주는 썩 좋은 기색은 아니었다. 이윽고 이나영과 양서희가 인사를 하자 표국주는 반색을 하며
“아. 아미일미 이나영 소저께서도 오셨군요. 듣던 대로 대단한 미인이시오. 하하”
이대제자라고는 하지만 장문제자가 온 것이 그나마 좋은 모양이었다. 대충 인사를 마치고 일행들은 너른 탁자에 둘러앉았다. 시녀가 차를 내오자 그제야 국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인이 이렇게 본산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다름 아닌 혈문과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충돌이 발생하게 되어서이오.”
“혈문이요?”
이나영이 나서서 자칫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나설 것이 아닌데 주제넘게 나서고 있는 것이었다. 엄연히 책임자가 있건만 국주의 칭찬에 한껏 고무된 것으로 보였다.
“지난달 혈문에서 한 가지 물건의 운송을 청해 왔다오. 물론 혈문이라는 자신들의 신분을 속이고 들어 온 의뢰였고 상당히 후한 보수를 약속 했기에 아무 의심 없이 이행하게 되었소이다. 계약된 내용은 하나의 상자를 악양의 파사문이라는 곳에 전하는 대단하지도 않은 일이니 표사 세 명이 쟁자수 셋을 데리고 곧바로 표행을 하였소.”
“그런데요?”
다시 이나영이 나불대고 있었다. 상유는 그냥 빙그레 웃으며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중경을 거쳐 호남성으로 향하던 표사 일행이 표홀히 사라진 것이오.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표물은 파사문에 도달하지 못했고 확인해본 결과 호남성 초입의 길수(吉首)를 지난 것이 확실한데 그 후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소이다. 그런데 열흘 전 갑자기 혈문에서 생각지도 못한 통보를 받게 된 것이오.”
이제는 이나영이 할 말이 없는지 상유를 쳐다보았다. 상유는 그제야 국주를 보며
“계약서에 명시 된 사항이 있을 것 아닙니까?”
의외로 정곡을 찔러오는 상유의 질문에 국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가 운송료로 받는 금액은 보통 표물 가치의 십분에 일에 해당하오. 그리고 표물을 강탈이나 분실 당했을 시 원래 표물의 가치인 열배를 배상하는 것이 국법이 정한 일반적인 규정이오. 그런데 고약하게도 이번 계약서를 확인해보니 그 당시에 보상규정을 백배로 명시한 것이 확인 되었소. 어찌 된 영문인지 계약서가 본 표국의 종이와 양식을 따른 것임에도 열배가 아닌 백배로 되어 있었고 우리가 받은 운송료가 금자 한 냥이었으니 자그마치 금자 백냥을 보상하라고 통보가 온 것이라네.”
“금자 백냥이라... 우리 아미파의 반년 예산이군요. 하하. 그럼 법적으로 국법이 정한 일반적 규정이 우선입니까? 아님 개인 간의 계약서의 내용이 우선입니까?”
“그거야 국법이 정한 최대가 열 배이니 법적인 책임은 금자 열 냥 이네.”
“그럼 열 냥만 지불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혈문에서는 내일까지 백 냥을 지불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엄포를 한 것이 문제라는 거네!”
“하하하 가만있지 않겠다는 것은 무력으로 표국을 강탈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이미 혈문은 두 군데의 작은 표국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빼앗았네. 그에 성이 차지 않는지 아미파와는 구원(舊怨)도 있으니 우리에게 칼을 내민 것으로 보이네.”
내용을 들어보니 가볍지 않은 일이며 이런 중차대한 일임을 사전에 본산에 알렸을 텐데 사조가 굳이 나서서 자기를 보낸 사실을 돌이켜 본 상유는 국주를 보며
“제가 판단할 때도 내일의 일이 간단치는 않겠습니다. 어차피 그들이 결심하고 달려든다면 열 냥이니 백 냥이니 하는 것은 애당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급적 무예를 익히지 않은 사람들은 대비를 시키시고 내일의 결전에 대비를 하시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허허. 자네는 태평하기도 하네. 말로만 싸운다면 뭐가 걱정이란 말인가?”
국주는 어려보이는 상유의 말이 지당함에도 괜히 비아냥대는 말투로 대꾸를 했다.
“하하하. 최태식 국주님! 말씀을 가려서 하시지요? 제가 비록 나이가 어리고 신풍 표국이 본 아미파를 후원하신다 하더라도 전 아미파를 대표해서 나온 일대제자입니다. 지금 제게 ‘자네’라고 하셨습니까?”
“......”
표국주는 돌변한 상유의 기세와 말에 당황하여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미파를 대표해 나온 제 말을 그렇게 들으신다는 것은 곧 본산의 결정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좋습니다. 저에게 내일의 일을 맡기실 의향이 없으시다면 지금이라도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상유가 일어서자 옆에 있던 이대제자들도 일어설 수밖에 없었는데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본산의 일대제자이며 책임을 맡고 나온 이라면 표국주가 그렇게 쉽게 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간다면 내일의 일은 어찌 대처한단 말인가? 최소한 아미파의 직전제자들이라도 있어야 물리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것이 아닌가. 최 표국주 당황하며 급히 일어나 상유에게 다가가 포권을 취하며
“본 국주의 생각이 짧았소. 너그럽게 봐주시게나.”
아직도 말을 짧게 하는 국주였지만 상유 역시 그냥 돌아 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다만 온당한 대접을 받아야 하겠기에 불가불 그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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