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II - 일보전진(一步前進) <06>
이철 덕분에 한숨 돌린 한노산이 흩어진 정신을 수습하고는 다시 덤벼들었다.
귀혼내력이 이제 2할도 채 남지 않았다.
위현룡은 두 사람의 협공을 받으면서 문득 수면을 취하고 있는 홍후인을 떠올렸다.
(선배님께서는 이 지경까지 몰리게 되면 어서 환령검법을 쓰라고 호통을 치셨겠지...)
길길이 날뛸 홍후인을 상상하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허나 위현룡은 끝까지 환령검법을 사용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귀혼검법만으로도 능히 고수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위현룡의 보검이 목덜미를 노리며 들어오는 이철의 대검을 슬쩍 밀치면서 부드럽게 앞으로 뻗어나갔다.
이 검초는 위현룡이 환령검법을 쓰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낸 새로운 귀혼검초의 조합이었다.
사실 귀혼검법은 현란하면서 쉴새없이 몰아치는 점에서 청성파 검법의 특징과 잘 맞아떨어졌다. 거기다가 위현룡 역시 오랜 세월 청성파 검법에 미쳐 산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어느 순간에 위현룡은 귀혼검법에 대하여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엄청난 수의 변초를 조합할 수 있는 귀혼검법에 여러 가지 검법들의 특성을 부여해보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공상이 시초였다.
지금까지 위현룡은 귀혼검초가 청성파 검법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위현룡이 청성파 검법에 길들여져 있기에 나온 이론일 뿐이었다.
무림에는 헤아릴 수도 없는 검법이 존재한다.
만일 그것들 중 귀혼검법과 융화될 수 있는 특징을 찾아 접목시킬 수 있다면 귀혼검법은 전혀 새로운 분위기와 위력을 띄게 될 것이다.
이철을 지나쳐 한노산을 노리고 뻗은 귀혼검초식의 바탕은 가장 부드럽다는 무당파 검법과 가까웠다.
쾌속(快速)적인 검법을 버리고 무당파의 느리면서 유(柔)한 검초를 염두에 두고서 만든 조합인 것이다.
물론 위현룡은 무당파 검법을 견식 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한노산을 몰아세우던 귀혼검법과 정 반대의 느낌을 지닌 검법을 찾다보니 단순히 무당파 검법을 떠올려 본 것뿐이었다.
완만하면서도 유(柔)한 검법.
위현룡이 알고 있는 것들 중에 그런 검초는 오래 전 마교 교주 허석문에게 전수 받은 검초식이 있었다.
처음 그 검초식을 접하면서 얼마나 황홀해하였던가.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예술적이고 아름답던 검초식들이 귀혼검법과 합쳐지자마자 놀랄만한 위력과 공격로를 수없이 생산하고 있었다.
위현룡은 서두르지 않았다.
한노산을 노리고 뻗은 검초는 가장 느리면서도 적은 변화를 머금고 있는 검초였다.
잔잔한 파도처럼 들어오는 검을 보면서 한노산은 얼른 뒤쪽으로 이보(二步) 움직였다가 좌측으로 몸을 반쯤 틀어서 위현룡의 하체를 노릴 준비를 하였다.
의외로 허점이 많이 보여서 날카로운 반격을 준비한 것이었다.
그 순간 직진하던 위현룡의 검이 반경을 타고 넓게 한번 휘둘러졌는데, 이것은 이철의 개입을 원천봉쇄하는 동시에 한노산의 기습 시점을 흐트러트리는 효과를 주었다.
막 공격하려던 이철이 주춤거렸다.
(이것 봐라?)
격전의 경험이 꽤 많은 한노산이었다.
위현룡이 이철을 막는데 신경을 집중한 덕분에 눈앞에 중요한 혈들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천우(天佑)의 기회였다.
어느새 근접거리를 확보한 한노산은 위현룡의 목을 노리고 사납게 후려쳤다.
소름끼치는 칼바람소리가 울렸다.
"끝났다!"
한노산은 정말 이렇게 속단하였다.
하지만 위현룡은 마치 덫을 놓고 있던 노련한 사냥꾼처럼 한노산의 검을 자신의 검으로 부드럽게 휘감더니 느닷없이 안면으로 다섯 배로 불어난 검기공을 내질렀다.
귀혼검초 중 내력소모가 극심한 본초식을 사용한 것이었다.
-검법에 있어서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검(劍)이 부릴 수 있는 만가지 변화 중 어떤 것을, 어떤 시기에 택하는가에 의해 갈려진다네.-
자신의 오른 팔이 못 쓰게 되었을 당시 대장장이였던 적무평에게 받은 가르침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를 이해를 하지 못했었다.
허나 약왕문에서 직접 적무평의 검법을 경험하고 나서는 새삼 깨달았다.
목숨이 오고가는 격전에서는 검법의 우위가 아닌 적절한 공격시기야말로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임을 말이다.
한노산은 생각지도 못했던 위치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혈색이 확 변했다.
방어초식을 준비하기도 전에 이미 피부 가까이 귀혼검공이 느껴졌으므로 그 짧은 찰나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어떤 출혈도 각오해야한다고 보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한줌의 핏물이 공중으로 뿌려졌다.
다섯 갈래로 뻗어 나온 귀혼검공에 어깨와 옆구리를 스쳐 맞고는 뒤로 비틀거렸다.
흑처 무사들은 수장이 위현룡에게 당하자 황급히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 보다 먼저 이철이 대검을 휘두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비키거라. 한대협은 내가 보호할 것이다!"
그가 호기롭게 나섰으므로 흑처 무사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위현룡! 너를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가래 끓는 목소리로 위현룡에게 호통을 한번 친 그는 뒤에서 신음하고 있던 한노산에게 다급히 물었다.
"괜찮소?"
"나는...괜찮소. 어서 그 자를 막으시오...어서!"
"그보다 피가 너무 많이 나오고 있지 않소. 정말 괜찮은 것이오?"
이철이 걱정스럽다는 듯 한노산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다.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걱정해주는 이철과는 달리 한노산은 뭔가 등골이 서늘한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다.
'스윽' 하는 살집을 헤집는 소리가 어디선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한노산은 뒤쪽으로 펄쩍 뛰면서 고통스런 비명을 흘렸다.
"이...이철! 네 놈이!!"
"젠장...빗나갔잖아..."
이철이 아쉽다는 투로 인상을 찌푸리자 한노산이 뚝뚝 떨어지는 피를 강제로 지혈하면서 고래고래 악을 썼다.
"감히 나를 죽이려 들어!! 이철 네 이 놈!!"
"흥! 너무 그리 열내지 마시오. 솔직히 한노산하면 마교 내에서 음흉하기로 소문난 위인인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온전히 믿겠소?"
이렇게 빈정거린 그는 아직 비틀거리는 한노산을 재차 일검을 날렸다.
그를 죽여 아예 후환을 끊으려는 것이었다.
"나를 보호하라!"
한노산의 숨넘어가는 듯한 소리에 흑처의 무사들이 우르르 이철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이철의 수하들 역시 무기를 휘두르면서 흑처의 무사들과 혼전을 벌였다.
위현룡과의 싸움이 이상하게 진행되면서 종국엔 한노산과 이철의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언뜻 보면 두 패는 막상막하였다.
아무리 흑처가 정예라지만 등천대 출신인 이철의 무사들도 만만치 않았고, 더군다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 흑처의 전력의 반을 차지하는 한노산은 부상 중이었다.
한노산은 아군이 패할 기미가 보이자 다급해졌다.
여기서 위현룡이 기회를 노리고 공격해온다면 완전 죽은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얼른 수하에게 업힌 그는 흑처의 무사들에게 공격의 수위를 낮추지 말라 명한 뒤 자기는 혼자 살기 위해 냉큼 줄행랑을 쳤다.
"저 놈을 끝까지 추격해서 반드시 잡아야한다."
이철이 목청이 터져라 부르짖으면서 좌우에서 달려드는 흑처의 무사들을 헤치고 추격을 개시하려했다.
만일 한노산을 놓치게 되면 나중에 어떤 후환이 뒤따를 지 몰랐다.
때문에 이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한노산을 죽여 북주산에 깊이 묻어야만 했다.
"비켜라. 비켜!!"
대검을 미친듯이 휘두르며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흑처의 무사들을 쫓아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그들의 벽을 뚫을 재간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한노산은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져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빌어먹을!! 저 자식을 눈앞에서 놓치다니!!"
아쉬움과 걱정스러움이 뒤섞인 한탄이 절로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소재파악을 한 대천마교에서 북주산을 중심으로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칠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이를 부득부득 갈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것들을 모조리 죽여버려라!!"
도망치고 죽고 다쳐서 얼마 남지 않은 흑처의 무사들을 이철의 수하들이 완전히 포위하였다.
화풀이라도 할 겸 이 것들을 모조리 도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이때 위현룡이 이철의 앞을 가로 막아섰다.
"수장이 패퇴 당하였으니 그들은 그만 보내주십시오."
"뭐라고!"
이철은 자신도 모르게 화가 벌컥 나서 위현룡에게 핏대를 세웠다.
"이놈들을 살려두면 또 날 잡으러 온단 말이다. 안 된다. 모두 죽일 것이다!"
"그냥 살려 보내주십시오."
위현룡의 목소리가 엄해졌다.
여기서 이철은 이제 어찌해야 할지 상당히 고민이 되었다.
위현룡과 다시 일전을 벌여야하긴 하겠는데 아까 그가 보여준 무위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더군다나 기력도 많이 떨어졌고 수하들도 상당한 피해를 본 상황이었다.
아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본들 솔직히 위현룡과 다시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뒤에 수하들은 자신의 이런 갈등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눈치없이 무기를 들은 채 어서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약간 떨떠름해진 이철은 짐짓 여유를 부리면서 검을 집어넣었다.
"야! 너!"
일단 위현룡에게 호통부터 내질렀다.
그래야 수하들 앞에서 체면도 서고 위현룡의 기를 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씀하시오."
이철에게 싸울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위현룡도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감히 날 치겠다고 북주산에 오른 건 참으로 괘씸하나 오늘은 그냥 봐 줄 테니 냉큼 돌아가라."
위현룡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철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냉랭한 위현룡의 대답에 이철은 자신도 모르게 당황하여 냉큼 반문하였다.
"왜...왜?"
"당신들이 산아래 마을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아내기까지는 절대로 물러갈 수가 없습니다."
확고한 요청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의 청을 받아들일 시 위현룡에게 무서워서 청을 들어준 것처럼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거부한다면 화가 난 위현룡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수하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위현룡의 한마디가 복음처럼 들려왔다.
"어차피 여기 계속 머무르고 있으면 조만간 대천마교에서 몰려들지 않겠습니까?"
"그...그렇겠지..."
"그럼 하루속히 여기를 떠나는 게 나을 것이라 봅니다만...."
고맙게도 위현룡이 잠시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을 되새길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의 말대로 한 시각이라도 빨리 북주산을 벗어나 멀리멀리 도망치지 않으면 앞날에 크나큰 재앙이 닥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두 검을 거두거라!"
수하들에게 이런 명을 내린 그는 연이어 목청을 돋구었다.
"난 대천마교의 자랑스런 등천대 수장이다! 내가 북주산에 있는 건 도적질이나 하려는 게 아니고 잠시 몸을 추스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뻔뻔스런 이철의 열변에 듣고 있던 북주산 도적들은 어이가 다 없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쳐서 자신들의 두목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어서 도적질을 하여 재물을 가져오라고 등 떠다민 게 누구였던가.
덕분에 자신들은 하루종일 도적질을 해야만했고, 무림인들에게 봉변을 당하여 죽은 동료들도 부지기수였다.
그에 반해 이철과 그의 똘마니들은 그저 가져다 받치는 재물과 식량에 호의호식하면서 편하게 지낸 세월이 여러 날이다.
생각할수록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랐지만 북주산 도적들은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 이철은 이런 더러운 곳에서 나와 불의를 타파하고 협을 세우는 데 일생을 바칠 것이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위현룡이 빙그레 웃으면서 찬사를 보내자 이철은 한껏 우쭐해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마치 좋은 친구라도 된 것 양 위현룡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말을 건넸다.
"뭐 아무튼 자네는 북주산 도적놈들 따위는 이제 걱정 말게나. 내가 떠나기 전에 모두 해산시켜 놓을 것이니..."
"정말이십니까?"
"아무렴! 설마 나 이철이 한번 약조한 것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릴 그런 위인으로 보이는가?"
이 대목에서 북주산 도적들은 또 한번 치를 떨었다.
북주산을 접수한 뒤, '나는 북주산 형제들을 내 가족처럼 아끼고 보살 필 것이며 녹림의 무리들 중에서 으뜸으로 만들겠다.' 라고 얼마나 강조를 하면서 명세를 했는지 아직까지도 귓가에 생생히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돌변하여 조강지처 내팽개치듯 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강제해산을 시킨다고 한다.
"우린 이제 뭐 먹고살지?"
"뭘 어째...다른 녹림의 무리라도 알아봐야지..."
"저 자식이 떠나면 우리끼리 여기서 새로 시작하면 되는 거 아냐?"
"이 사람이 미쳤나! 대천마교에서 몰려 온대잖아. 모두 죽고 싶은 거야?"
이런 속삭임이 북주산 산적들 사이에 열띤 토론처럼 오고갔지만 끝내는 이철의 뜻대로 강제 해산을 당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북주산 산적들은 찍소리 한번 못하고 대충 짐들을 챙겨서 하산을 시작하였고 그 후로 북주산에는 산적들이 일절 출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철은 대천마교에서 추격해올까 두려워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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