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II - 심천패왕(深川覇王) <35>
적무평의 조언을 경청하던 동방유조가 결단을 내리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채대협. 이 좁은 새외에서 우리끼리 아웅다웅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물 안에 개구리 같은 새외인들을 비웃지 않겠소? 나는 채대협이 새외에 대한 자긍심을 잊지 않기를 바라오.”
월천교가 신경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채겸이 공공연하게 월천교가 적벽관에 흡수된 것을 인정했으므로 협정에 크게 어긋난 것은 없다고 판단했다.
하여 동방유조는 채석주 대인의 인품과 식견을 믿고 그의 장자인 채겸도 믿어보기로 하였다.
영리한 채겸은 그의 속뜻을 십분 이해했다. 자신의 아버지도 저런 이야기를 종종해왔던 것이다.
새삼 교주라는 자리가 참으로 버거운 자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자신도 월천교 교주가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공감이 된 것이었지만, 최소한 대의를 위한 저런 깊은 고뇌와 혜안이 필수불가결함을 깨달은 것이다.
“팔황문은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새외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옵니다.”
채겸의 이 굳은 다짐은 동방유조가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이내 흡족한 표정을 지은 그는 채겸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팔황문은 채석주대인의 뜻을 이어받은 자가 이끌어나가야 할 것이오. 그러니 채대협이 잘 이끌어주시오.”
지금 동방유조가 내뱉는 이 말은 적월교의 공식적인 표명이나 마찬가지였다.
곁에 있던 채건영과 채목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상상했던 대로라면 적월교 교주가 자신들을 보호하고 반역자 채겸을 처단하는데 앞장서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이 당연한 상상은 보기 좋게 깨져버리고 남은 것은 냉정한 세상의 이치였다.
권력에서 밀려난 자의 최후.
지금까지 채겸과 그의 모친을 핍박했던 그들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인 것이다.
채겸은 벌벌 떨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 나직하나 당당하게 말했다.
“팔황문은 내가 맡겠소.”
그 말을 듣는 순간 채건영은 차가운 검이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채겸의 험상궂은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더 무시무시하게만 보였다.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교주에게 보냈지만 돌아오는 따뜻한 눈길은 하나도 없었다.
팔황문의 반역자로 전락한 자신들을 채겸의 처결에 그대로 내던져버린 것이다.
“사...살려주시오...”
난생 처음으로 읊조려본 말이었다.
죽음을 예감한 채건영이 급히 무릎을 꿇으며 애원하자 옆에 있던 채목영도 같이 부복하면서 울부짖었다.
“채대협! 아니 형님, 우리들은 그래도 같은 피가 섞여 있지 않소.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제발 자비를....”
채겸은 아무런 말없이 그들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드디어 되찾은 팔황문에 대한 소회(所懷)때문일까 아니면 후환을 끊기 위한 고심일까.
뭔가 섬뜩함을 느낀 채건영은 피를 토하듯 소리치면서 채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그럼 식솔만이라도 살려주시오.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오!!”
채겸의 검이 천천히 뽑혀져 나왔다. 그걸 먼저 본 동생 채목영이 악을 쓰며 비명을 질렀다.
“으악! 안 돼! 형님! 나 좀 살려주시오!!”
순간 그것이 발버둥치는 그들에게 떨어졌다.
자신들의 목이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한 채건영과 채목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난 당신들을 처단할 아무런 이유가 없소.”
바로 눈앞에 채겸의 검이 지면(地面)을 뚫고 깊게 박혀있었다.
뜻밖의 소리에 채건영과 채목영은 공포로 반쯤 뒤집어진 눈을 번쩍 뜨며 채겸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을 살려줄 것이오.”
하늘에서 내려오는 복음을 들은 채씨 형제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무의식적으로 울음을 터트리면서 바짝 엎드렸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채대협 감사합니다.”
“허나...조건이 있소.”
채겸의 말에 그들은 얼른 젖은 눈동자를 위로 향했다. 혹시나 불가능한 조건을 들어서 다시 죽이려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한 것이다.
“팔황문을 떠나시오. 당신들과 식솔들을 모두 살려주고 편히 살 수 있게 재물도 줄 것이오. 그러나 살면서 절대로 팔황문을 언급하지 말 것이며 이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말아야 할 것이오.”
그 말에 그들은 감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설마 이렇게까지 관대한 처분이 내려질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희들은 영원토록 채대협의 인정에 깊이 감복할 것이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동의한 것으로 알겠소. 지금 당장 팔황문으로 가서 식솔들과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떠나시오. 만일 내가 돌아갔을 때까지 거기 있는 다면 내가 건 조건은 모두 무효가 될 것이오.”
채겸의 최후통첩에 그들은 벌떡 일어나 읍을 한번 하자마자 허겁지겁 팔황문으로 향해 달렸다.
아직까지는 채겸을 온전히 못 믿고 있기에 혹시나 마음이 바뀔까 겁이 났던 것이다.
“일처리가 나쁘지 않군.”
채겸이 어떻게 나올지 흥미롭게 주시하던 동방유조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적월교가 팔황문을 핍박하지 않는다면 팔황문은 절대로 적월교와 척을 지지 않을 것입니다. 팔황문 문주로서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채겸이 재차 약조를 강조하자 동방유조는 호탕하게 웃었다.
“채대협이 그런 소인배가 아님을 잘 알고 있으니 굳이 맹세까지 안 해도 되오. 그리고 적대협께서 중재한대로 나는 이행할 것이니 서로 간에 불신은 접어두십시다.”
이로써 복잡했던 모든 분쟁과 앙금은 말끔히 사라졌다.
적무평은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교주. 그럼 난 이만 가보겠소.”
“신경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적대협, 혹여 적월교를 방문하시는 일이 있으시다면 미리 연락을 주십시오. 온 마음을 다해 성의를 마련할 것입니다.”
“그럴 일은 없기를 바라오.”
적무평은 이 한마디를 남긴 채 발걸음을 돌려 위현룡에게 향했다.
“여전히 소란스러운 친구일세...”
위현룡은 적무평이 미소를 띠며 다가오자 얼른 다가가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적대협!”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그대로 있었다. 서로 할 말이 많았지만 침묵으로 각자의 평원무사(平穩無事)를 교환하고 있었다.
“소녀. 적무평대협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사를 올리옵니다.”
매요비가 대표로 정중히 읍을 했고, 뒤에 있던 한목풍과 동령문 문주 목현탁은 무릎을 꿇고 최상의 예를 다했다.
“적당이들 하시오. 별일 아니었으니...”
적무평이 손사래를 치면서 예를 물리자 위현룡이 급히 물었다.
“마교사람들은 모두 안녕하신거지요?”
“모두 잘들 있네. 마교를 재건해야하니 모두들 정신없이 바쁘다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자네 이야기는 끝이 없이 계속 나오더군.”
위현룡은 한숨 돌리면서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든든한 적무평도 있고 적월교도 보호해주겠다고 했으니 더 이상 고난은 당하지 않으리라.
그때 위현룡에게 다가와서 깊이 고개를 숙이는 자가 있었다.
적무평의 제자라는 사람이었다.
“위대협. 소인을 알아보시겠는지요?”
위현룡은 그 말에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누군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현룡아...저 녀석 그 녀석이 아니냐? 왜 그때 약왕문에서 적무평의 수하 한명을 살린 적이 있지 않았느냐.]
먼저 알아본 홍후인의 말에 위현룡은 아! 하는 탄성을 질렀다.
제갈무에게 당해 큰 부상을 입고 죽음직전까지 갔다가 구사일생한 그 사람이었다.
당시의 부상의 정도로 보면 살아날 확률이 높지 않았는데 이렇게 살아남은 것을 보면 운이 억세게 좋은 사람은 맞는 듯하였다.
위현룡은 반가운 낯빛을 내비쳤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 당시 위대협이 아니었더라면 소인은 이미 저승에서 떠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대협의 명운에 제가 약간의 도움을 보탠 것에 불과하니 과히 괘념치 마십시오.”
“저 같은 자에게 대협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소인은 스승님과 위대협의 구명지은(救命之恩)을 평생 마음에 간직하며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상대가 너무 황송해하자 위현룡은 왠지 쑥스러워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대협의 위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위현룡이 자꾸 대협이라 호칭하자 당황하던 그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인은 임자헌이라고 합니다. 위대협께서 친히 제 이름을 부르시기엔 대단치 않은 무명소졸이옵니다. 그리고 대협이라는 호칭은 제발 거두어주십시오.”
위현룡은 빙그레 웃었다.
“다 같은 무림인들이고 지위고하도 없는데 대협이라 부르는 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저 같은 무림공적보다 적무평대협을 모시는 임대협이야말로 더 훌륭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 위명에 자부심을 가지셔도 됩니다.”
확실히 대천마교 일개 말단 무사에서 새외에 존경받는 적무평의 제자가 된 그의 인생 역전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새외인들이 그의 제자가 되기를 염원했지만 이룬 사람은 극소수였으니 말이다.
임자헌은 더욱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막상 위현룡이 자신에게 적무평대협을 모시는 사람이라 말하는 대목에서는 존경심과 자긍심을 얼굴에 가득 표출해내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던 적무평이 위현룡의 어깨를 꽉 잡으면서 말했다.
“이제 가보도록 하겠네. 어서 마교사람들에게 적월교와의 협정을 알려야하니. 그리고 아직 누명을 벗는 일은 요원한 것 같은데 서두르지 말고 인내하다보면 반드시 해결의 실마리가 다가올 걸세.”
위현룡은 그의 조언에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처음에는 조급했던 게 사실입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일이 다 시기가 있고 순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대협의 말씀대로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며 노력할 것입니다.”
“좋은 마음가짐일세.”
이때 채겸이 다가와서 적무평에게 정중한 포권을 올렸다.
“팔황문 문주 채겸이라 합니다. 적월교와의 전면전을 예방해주신 적무평대협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리겠나이다.”
“여기 채형님은 제 의형제이십니다.”
위현룡의 덧붙인 소개에 적무평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주위를 훑어보며 말했다.
“살다보면 잃는 사람들도 있고 얻는 사람들도 있는 게지. 이렇게 자네를 도울 사람들이 많으니 꼭 불운한 인생만은 아닌 것이네. 그럼 또 보세나.”
이런 말을 남긴 적무평은 제자 임자헌과 함께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역시 바람과 같은 사람이로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홍후인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뒤로 적월교와 대막천궁 역시 약조대로 모두 물러갔으며 그날 이후 적벽관과 월천교 그리고 팔황문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
매요비는 슬쩍 뒤로 물러나면서 채겸에게 은밀히 물었다.
“선생께서는...”
선생이라 하면 위현룡을 주군으로 생각하며 따르는 성운비를 칭하는 것이었다.
“그 분은 월천교와 협상이 끝나자마자 바로 떠났소이다. 뭐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던데 물어봐도 대답은 해주지 않더이다.”
“그렇군요.”
그를 만나 감사의 인사와 성공의 자축을 함께 나누고 싶었는데 그냥 떠나버려서 왠지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가 떠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의 발걸음은 늘 중요한 목적지로만 향해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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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한 편 올라갑니다.
이 편을 포함한 몇 개의 전편들이 쓰기 제일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리더군요.
그럼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바라면서 물러갑니다.
그리고 좋은 댓글들 정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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