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524화: 아들들의 전쟁 (255)
카르스덴은 왼팔에서 느닷없이 강렬한 통증이 느껴지자마자 대뜸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너무 방심했구나!’
파드무스가 기습적으로 쏜 석궁 화살은 왼쪽 위팔 부위에 박혀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해, 팔꿈치 보다 조금 위쪽이었다.
그리 심한 부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카르스덴을 놀라게 해서 카시우트를 도끼로 찍으려다 말고 멈칫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간발의 차이로 목숨이 연장된 카시우트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서 반 토막 남은 칼로 카르스덴이 타고 있는 말의 피부를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고 긁어댔다.
물론 건장한 전투마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무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피부에 생채기가 잔뜩 난 말이 아프고 놀라서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왼팔을 다친 카르스덴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낙마해 버렸던 것이다.
비록 낙마하긴 했지만, 카르스덴은 바닥에 형편없이 쓰러지진 않았다. 적절한 낙법으로 금세 자세를 바로잡고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석궁! 석궁을 들어라! 카르스덴을 쏴 죽여라!”
파드무스는 재빨리 석궁을 다시 장전하면서 주변에 있는 보병들에게 소리쳤다.
플로젠 보병들은 기본적으로 석궁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언제든 석궁병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실제로 카시우트가 거느린 병사들 중에는 당초 지붕 위에 배치되어 카를로만에게 석궁을 쏘기로 되어있었던 병사들이 많았다.
다만, 사태가 고약하게 틀어져서 주변 건물에 불이 붙고 한바탕 난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석궁병들 조차 칼을 들고 백병전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파드무스의 지시에 따라 살아남은 보병 가운데 10명 정도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석궁을 급하게 집어 들었다.
그들이 신속하게 장전과 조준을 마치고 일제히 화살을 발사하려는 걸 보자, 카르스덴은 흠칫 놀라면서 반사적으로 대처할 방법을 찾았다.
이대로 가만 있다간 제아무리 용력이 뛰어난 장사라고 해도 화살꽂이 신세가 되고 말 터였다.
카르스덴은 방금 전에 자신을 떨어뜨린 전투마를 억센 힘으로 붙잡고 억지로 방향을 틀어서 날아오는 화살을 막는 방패로 삼았다.
불쌍한 전투마는 10여발의 석궁 화살을 온몸에 맞고 구슬픈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실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방패 역할을 했던 전투마가 죽어버리자, 카르스덴은 또 다시 석궁 앞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뒤쪽에 있는 무너진 잔해에서 누군가 우렁찬 기합과 함께 불 타고 남은 거대한 대들보를 번쩍 들어올린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사람은 놀라운 괴력을 발휘하여 들고 온 대들보를 플로젠 병사들에게 내던졌다.
한창 석궁을 재장전하고 있던 보병 두 명이 운 나쁘게도 대들보에 깔려 쓰러졌다. 나머지 병사들 역시 질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카르스덴이 돌아보니, 그 거대한 대들보는 바로 카프탄이 내던진 것이었다.
“카프탄, 지금 뭐 하는 거냐? 왜 나를 도우러 왔느냐? 잔해를 치우고 비밀 통로 출구를 개방하는 일을 우선시 하라고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하지 않았더냐?”
카르스덴이 왼팔에 화살이 박힌 채 나무라듯 말했다. 기껏 자기를 도와준 사람에게 하는 얘기 치곤 다소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한 말투였다.
카프탄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자기 뒤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아내인 팔라나가 수십 명의 케르비오 병사들과 함께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잔해가 치워지고 비밀 통로 출구가 다시 열렸던 것이다.
카르스덴은 잠깐 멍해졌다. 설마 이렇게 빨리 작업이 끝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오늘 지독히 운 좋은 줄 아십시오.”
카프탄은 카르스덴을 향해 이렇게 짤막하게 말한 다음, 팔라나와 함께 본격적으로 전투에 가세했다. 둘 다 처음에는 맨주먹으로 적병을 후려치면서 싸웠다.
그들의 억센 주먹에 얻어 맞은 병사들은 마치 건장한 전투마에게 뒷발차기를 당한 듯 두개골이 부서지거나 흉곽이 골절되면서 멀리 나가 자빠지고 말았다.
곧이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쓰러뜨린 플로젠 병사가 떨어뜨린 칼을 빼앗아 들고 거침없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카르스덴은 그 틈에 왼팔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고 전사한 적병의 옷자락을 찢어서 상처를 싸맸다. 그다지 깊은 상처가 아니어서 당장 싸우는데 큰 지장은 없을 듯했다.
응급 치료가 끝날 무렵, 지하 공동에 갇힌 병사들을 지휘하라고 남겨 놓은 플린트가 카르스덴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여기 있다는 말은 비밀 통로 출구가 확실히 개방되었음을 의미했다.
“카르스덴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충성스러운 부하인 플린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괜찮다. 그보다 상황은 어떠냐?”
카르스덴이 반가워하면서 되물었다.
“천만다행으로 잔해 몇 개를 치우자 출구가 쉽게 개방되어 병력이 비밀 통로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사다리를 이용해서 지하에 있던 병사들이 계속 위로 올라오는 중입니다.
또한 힘센 병사 몇 명을 시켜 출구 주변의 잔해를 계속 더 많이 치우라고 지시했으니 안심하십시오.”
플린트의 말을 듣자 카르스덴은 모처럼 승기가 자신에게 기울고 있음을 확신했다.
‘이렇게 운이 좋은데 오늘밤 파로크 성채를 탈환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놈이 될 것이다. 반드시 승리해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말겠다.’
카르스덴은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그는 플린트와 함께 도끼를 휘두르면서 플로젠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꺼져가던 불길에 연료를 잔뜩 집어 넣은 것처럼, 비밀 통로 출구 주변을 무대로 하는 전투는 다시 한번 겉잡을 수 없이 치열해졌다.
카르스덴의 기세가 오른 것과는 정반대로, 파드무스와 카시우트는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각자 무기를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급한 김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칼을 집어 들고 몰려오는 적병을 베기 시작했다.
둘 다 잠시 동안 다른 고민을 할 겨를도 없이 칼을 휘두르느라 바빴다.
그렇게 해서 가까운 곳에 있는 케르비오 병사들을 모두 베어버리고 나자, 파드무스는 간신히 페레이즈에게 보고하기 위해 전령을 파견할 여유가 생겼다.
“너는 어서 태자 전하께 가서 카르스덴이 야만족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비밀 통로를 이용해 성채 내부로 침입했다는 사실을 자세히 보고해라. 아울러 지원 병력을 더 보내달라고 말씀드리거라! 어서!”
명령을 받은 전령이 부리나케 달려가는 것을 보고, 파드무스는 다시 가쁜 숨을 고르면서 전황을 살펴보았다.
플로젠 보병들은 상당수가 전사했지만 기병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이리저리 말을 달리면서 케르비오 보병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이는 바람에 팔라나와 함께 처음 달려나온 수십 명의 병사들은 삽시간에 전멸당하고 말았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비밀 통로의 출구가 개방된 상태라서 케르비오 병사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카르스덴, 카프탄, 팔라나 모두 용력이 특출난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일당백의 용맹을 과시하면서 각자 수많은 플로젠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보병은 물론이고, 기병조차 세 사람의 용력 앞에서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의 활약이 너무나 대단한 탓에 나름 유능한 용사인 플린트의 존재감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플린트는 자신의 용력과 용맹이 카르스덴, 카프탄, 팔라나에게 못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적병과 직접 맞붙어 싸우기 보다 병사들을 지휘하는데 전념했다.
아직도 남아서 거치적거리는 잔해를 더 많이 치우고, 지하에 있는 병사들이 최대한 빨리 지상으로 올라와 전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지휘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현재 케르비오 족의 지원 병력은 오직 한 개의 사다리와 하나의 출구를 이용해서 공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먼저 지하 공동에서 사다리를 이용해 무너진 낡은 가옥의 지하실까지 올라온 다음, 거기서 다시 계단을 이용해서 지상으로 올라와 전투에 가세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자칫하면 병목 현상이 일어나 병력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플린트는 무엇보다 그런 병목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 써서 관리하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케르비오 병사들은 일렬로나마 끊임없이 지하 공동에서 지하실로, 지하실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싸움에 참여할 수 있었다.
반면에 플로젠 측의 지원 병력은 오지 않았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쌍방의 수적 격차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카르스덴, 카프탄, 팔라나는 한동안 마구잡이로 플로젠 병사들을 학살한 다음, 각자 주인을 잃은 말을 한 필씩 잡아 타고 본격적으로 적 기병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들 셋이 작정하고 기병만 노리고 잡아대자, 원래 200명이나 되던 기병대의 숫자도 점점 빠르게 줄어갔다.
카르스덴은 이리저리 말을 몰고 돌아다니면서 도끼를 휘둘러 플로젠 기병을 닥치는 대로 쓰러뜨렸다.
그 와중에 문득 아까 적병에게 구속된 파스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새 멀리 끌려가 버린 줄 알았는데, 형세가 워낙 위급하다 보니 파스카를 데려가던 적병들이 근처 건물 틈새에 숨어서 신중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르스덴은 당연히 용감하게 싸우다 붙잡힌 동족을 그냥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재빨리 달려가서 플로젠 병사 셋을 단숨에 도끼로 찍어버리고 파스카를 구출했다.
“괜찮으냐? 부상이 심한 것이냐?
카르스덴이 걱정스럽게 묻자 파스카가 고통을 참으면서 감사와 사과를 동시에 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르스덴 왕자님.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이 몸으로는 적과 제대로 싸우기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해한다. 거기서 안전하게 숨어 있도록 해라. 다만, 나도 너를 특별히 신경 써서 지켜줄 만한 여유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적병이 떨어뜨린 칼을 집어 들고 너 자신을 최대한 방어하거라.”
파스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금 전에 죽은 플로젠 병사가 떨어뜨린 칼을 집어 들었다. 양팔에 모두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칼을 든 손이 저절로 덜덜 떨렸다.
그래도 빈손으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적병에게 속수무책으로 다시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비밀 통로의 출구를 빠져 나와 지상으로 올라오는 케르비오 병사들의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났다.
부도덕한 짓이긴 해도 생계를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하느라 산전수전을 다 겪은 카마 부족 병사들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투입되자, 플로젠 병사들은 한층 더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점에서 플로젠 보병들은 거의 다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고 쓰러진 상태였다.
남은 건 오직 기병뿐이었는데, 그들은 드넓은 평야가 아니라 공간이 한정된 성채 안에서는 전투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곤란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기병에게는 그저 보병 보다 좀더 이동 속도가 빠르고 다소 높은 위치에서 창을 휘두를 수 있다는 장점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는 현재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거기다 케르비오 족의 지원 병력이 계속 늘어나면서 기병대가 마음 놓고 움직일 공간은 갈수록 더 줄어만 갔다.
카시우트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케르비오 보병을 정신없이 칼로 찌르고 베느라 잠시 동안 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한숨 돌리고 주변 상황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다.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이 난리가 났다는 죄책감도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치고 괴로운 와중에서도 카시우트의 머릿속에서는 한가지 확신이 들었다. 이대로 계속 싸우면 안 된다는 확신이었다.
비밀 통로에서 쏟아져 나오는 케르비오 족이 점점 더 늘어남에 따라, 플로젠 기병들은 운신의 폭이 좁아져 제자리에서 창만 휘두르다가 수적으로 우세한 야만족에게 둘러싸여 하나 둘씩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이건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카시우트는 즉시 가까운 곳에서 싸우고 있는 파드무스에게 달려가서 말했다.
“파드무스 경, 이렇게 계속 싸우면 안 됩니다. 분하지만 여기서 물러나야 합니다.”
파드무스는 당장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절대 안 된다! 태자 전하께서 곧 지원 병력을 보내주실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카르스덴의 용맹도 만만치 않거니와, 저 자가 데려온 야만족 보병도 보통 사나운 게 아닙니다.
이래가지고는 태자 전하께서 당장 지원군을 보내주신다고 해도 한 두 명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적어도 500명 이상의 정예 보병이 전열을 갖추고 차근차근 저 놈들을 밀어붙이지 않으면 제압하기 어렵단 말입니다.
그런데 야만족의 대규모 병력이 한창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어디서 500명의 보병을 빼내와서 전열을 갖춰 싸우게 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카르스덴이 성채 안으로 더 깊숙이 침입하게 내버려둘 순 없다. 저 놈은 당장 동문 쪽으로 달려가서 안쪽에서 성문을 열려고 시도할 것이다.
안팎에서 협공을 당하면 동문은 뚫리고 만다. 그러면 이 성채는······”
파드무스는 여기서 말 끝을 흐렸다. 카시우트가 한숨을 쉬면서 그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오늘밤은 우리가 한방 먹었습니다. 참으로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만, 아무래도 이 성채를 지키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좁은 성채 안에서 야만족과 혼전을 벌인다면, 아군의 장점이 전혀 발휘되지 못할 테니까요. 간신히 승리한다고 해도 병력 손실이 막심할 건 자명한 일입니다.
기세가 오른 야만족이 며칠 후 병력을 정비하여 다시 공격을 가해온다면 그때는 정말 모두 전멸 당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남은 전력이라도 수습해서 안전하게 철수하는 게 최선책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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