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401화: 아들들의 전쟁 (132)
페레이즈 태자와 클라티나 사이에서 서로 되묻기가 반복되자, 결국 페레이즈가 먼저 졌다는 듯 말했다.
“알았소, 알았어. 정말 못 당하겠군. 그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소. 날 초조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보란 듯이 카를로만을 찾아갔던 것 아니오?
섭정 왕비 전하께 충성하면 무슨 이득이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겠지. 아마도 카를로만은 선뜻 승낙하지 않았을 테고 말이오.
내가 카르스덴과 카를로만 형제를 제압하고 나면, 그대는 다시 서부 초원지대의 수장인 카로이라는 자에게도 왕비 전하께 충성하면 케르비오 전체의 지배자가 되도록 지원해 줄 거라는 제안을 할 게 분명하오.
내 말이 틀렸소?”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클라티나가 빙긋 웃으면서 즉답을 피했다. 페레이즈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다시 말했다.
“그대가 섭정 왕비 전하를 위해 나한테 이런 방식으로 압박을 가하는 건 솔직히 좀 불쾌한 일이오.
내가 그 동안 공을 많이 들여온 카를로만 같은 케르비오의 인재들을 노골적으로 포섭하는 방식 말이오.
하지만 카를로만을 찾아가서 밀담을 나눈 일을 더 이상 나무랄 생각은 없소.
그저 왕비 전하의 전갈을 전했을 뿐인 그대를 나무란다면, 그건 곧 그대가 아니라 왕비 전하와 충돌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그대의 의도대로 내가 초조한 나머지 그대의 백부인 크로프트 각하와 덜컥 손을 잡기로 결정하는 일도 없을 것이오.”
페레이즈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음에도, 클라티나는 여전히 여유 있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백부님을 위해서 이곳 저곳에 손을 내밀고 있는 것뿐입니다. 누가 가장 먼저 제 손을 잡아줄지 무척 궁금한데요.
물론 태자 전하께서 지금 당장 제 손을 잡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이것만은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카를로만이나 카로이가 태자 전하보다 먼저 제가 내민 손을 잡는다면, 그 순간 싫든 좋든 태자 전하와 제 백부님은 더 이상 화해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질 겁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그렇게 많은 공을 들인 케르비오와 카를로만을 영영 잃게 되실지도 모르고, 더 나아가, 어쩌면 카를로만, 제 백부님, 그리고 왕비 전하를 한꺼번에 상대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골치 아픈 사태가 실제로 일어나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우호적으로 내민 손을 붙잡고 제가 했던 제안을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페레이즈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클라티나 아가씨, 참는데도 한도가 있소. 나를 너무 몰아붙이지 마시오. 한갓 산짐승도 사냥꾼이 지나치게 궁지로 몰면 필사적으로 반항을 하는 법이오.
하물며 나는 절대로 나약한 산짐승 따위가 아니라 당당하고 자부심 강한 플로젠 왕국의 기사요.
그 점을 잊지 말고, 나와 그대 백부 사이의 화해를 주선하려면 조금 더 온화하고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좋을 것이오.”
페레이즈의 말을 듣자, 클라티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바로 그래서 제가 지금 여기 온 겁니다.
제가 태자 전하를 만나러 온 목적은, 어차피 빤히 다 알고 계시는 카를로만과의 밀담 이야기 같은 걸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카를로만에게 손을 한번 내밀었으니, 태자 전하께도 우호의 손길을 한번 더 내밀기 위해서이지요.”
“나한테 어떻게 우호의 손길을 내밀 작정이란 말이오?”
페레이즈가 미심쩍은 듯 묻자 클라티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오늘밤 하시려는 일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페레이즈 태자가 흠칫 놀라서 물었다.
“그대는 내가 오늘밤에 뭘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소?”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식량과 보급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 진영을 버리고 그 대신 파로크 성채를 기습해서 탈취하실 작정이 아니십니까?
안심하십시오. 카를로만은 전혀 눈치를 못 챈 것 같으니까요.
그 자는 제법 영리하지만 카로이한테 권력을 빼앗기면 어떨까 하는 압박감 때문에 지금 당장은 평소의 날카로움이 좀 둔해져 있습니다.”
페레이즈가 약간 표정을 누그러뜨리면서 물었다.
“그건 나도 짐작하고 있소. 그런데 날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요? 그대는 후보 서기관일 뿐 기사가 아니지 않소?”
“정확히 말하면, 제가 데리고 온 노예 쿠스크가 태자 전하를 도와드릴 겁니다.”
“아, 그 건장한 사내 말이오? 용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겠는데, 중요한 일을 맡겨도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그 사람은 야만족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 배척과 멸시를 받아온 추방자 부족의 일원입니다.
다년간 정권을 쥐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부당한 차별을 방치한 카르스덴 및 카를로만 형제의 가문에 대해 깊은 원한을 지니고 있지요.
안심하시고 그 어떤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그 자에게 맡겨주십시오.
제 노예가 오늘밤에 작은 공이라도 세운다면, 태자 전하께서도 제가 결코 전하께 적대적이지 않으며, 그저 전하의 결단을 재촉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으로 잠시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리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실 겁니다.”
클라티나의 자신 있는 말을 듣고 페레이즈 태자가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그대가 그렇게 신임하는 쿠스크라는 자는 어떻게 해서 노예가 된 거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자는 원래 제 할아버지의 노예였습니다.
저 역시 자세한 사정을 다 아는 건 아닙니다만, 할아버지가 선왕 폐하 휘하에서 야만족들과 싸울 당시, 추방자 신분으로 다른 야만족들에게 붙잡혀 하마터면 온 가족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쿠스크의 부모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쿠스크의 부모는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당시 뱃속에 있던 아기를 노예로 바치겠다고 약속했는데, 할아버지는 전투가 바빠서 됐다고 그냥 보내주셨답니다.
그런데 대략 10년쯤 지난 후에 어떤 젊은 남자가 어린 소년을 데리고 제 할아버지를 다시 찾아와오더니, 예전에 자기 장인 어른이 약속한 일이라면서 막내 처남을 노예로 바칠 테니 받아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쿠스크의 부모는 그 10년 사이에 모두 죽었고, 쿠스크의 매형, 그러니까 누나의 남편이 약속을 이행하겠다면서 데리고 온 거였습니다.”
“매형이라는 작자가 아직 어린 막내 처남을 굳이 노예로 바치겠다고 데려왔다. 그건 뭔가 수상쩍지 않소?”
“물론입니다. 제 할아버지도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어서 굳이 그럴 것 없다고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 젊은 남자가 계속해서 소년을 노예로 받아달라고 고집을 부렸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오히려 쿠스크를 노예로 받아주지 않으면 그 불쌍한 소년이 매형이라는 작자에게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결국 받아주셨다고 합니다.
마침 그때 제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할아버지께서는 노예가 된 쿠스크를 제 아버지에게 축하 선물로 주신 다음, 2년쯤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쿠스크가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절 따라다니게 된 겁니다. 그는 진심으로 제 할아버지에게 감사하고 있으니 믿을 수 있습니다.”
페레이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자라면 믿을 수 있겠지. 그대의 성의는 잘 알았소.
쿠스크에게 시킬 일이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고 곧 사람을 보내서 알려주도록 하겠소. 일단 물러가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클라티나는 군소리 없이 정중하게 인사를 남긴 다음 태자의 막사를 나왔다. 그녀가 떠나자 페레이즈는 새삼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거 야만족을 상대하는 것 보다 저 아가씨를 상대하는 게 더 골치 아프군.”
그러는 동안, 파로크 성채에서는 카란드라가 오늘밤에 성채 수비를 담당하게 된 키오나와 키에란을 만나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페레이즈가 파로크 성채를 기습 공격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대비책을 의논하려고 했던 것이다.
키오나는 어제 전투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규모 병력을 지휘했다가 참패를 당하고 동생인 키에란까지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하룻동안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다가 아까 키에란이 석방되어 돌아온 덕분에 간신히 기운을 조금 회복한 참이었다.
문제는 약간 기운을 차리긴 했지만, 오늘밤에 페레이즈가 파로크 성채를 기습할지도 모르니 대비책을 세워보자는 것 같은 중요한 얘기를 의논할 만큼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는 아직 아니라는 점이었다.
“카란드라님,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십니까? 어제 전투에서 지휘가 엉망진창이었으니, 오늘밤에 파로크 성채도 제대로 수비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렇게 걱정되세요?
예전에는 절 그렇게 믿고 의지하시더니 이제는 또 언제 사고칠 지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처럼 여기시는군요. 그렇죠?”
카란드라가 찾아온 용건을 말하자마자 키오나는 잔뜩 섭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야. 그냥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조심하자는 뜻으로 의논하러 온 거야.”
아무래도 카란드라가 한 말 때문에 키오나의 마음 속 상처가 다시 벌어진 듯했다.
카란드라는 아차 싶어서 어떻게든 상대방을 달래주려고 노력했지만, 키오나는 원망 섞인 눈빛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 일이 뭐가 있나요? 이곳 파로크 성채는 언덕 위에 든든하게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잖아요?
성문을 굳게 닫고 버티면 수만 대군이 한달 내내 공성전을 벌여도 함락 못 시킬 거예요.
그런데 카란드라님은 제가 단 하룻밤도 못 지킬까 봐 그렇게 걱정스러우신 거죠?”
키오나는 어제 전투에서 큰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예전부터 믿고 따랐던 카란드라가 자신을 버렸다고 속으로 크게 원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원망이 너무 커서 적어도 지금 당장은 카란드라가 아무리 다정하게 말을 해도 야속하게 받아들일 것 같았다.
“카란드라님, 제 누님이 아직 피곤해서 이러는 거니 제발 이해해 주십시오.”
그때 키에란이 나서서 좋은 낯으로 카란드라와 키오나 사이를 적당히 중재하려고 애썼다.
그는 페레이즈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자기 누나 보다 훨씬 침착했다.
“방금 전에도 칼마르님이 와서 페레이즈가 오늘밤에 파로크 성채를 기습할 가능성이 있으니, 성채를 단단히 수비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성문 밖으로 출진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갔습니다.
그 직후에 카란드라님께서 오셔서 거의 동일한 말씀을 하시니 누나가 약간 피곤해 하는 겁니다.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키에란의 말을 듣자 카란드라도 불현듯 키오나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길게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전투에서 실패한 것을 자책하고 있는데, 칼마르에 이어서 카란드라까지 연거푸 찾아와 오늘밤에 잘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한 것이다.
키오나의 입장에서는 그게 꼭 자신을 못 믿어서 그러는 것처럼 들려서 고까운 심정이 들 수도 있을 터였다.
거기다 대고 계속 말해봐야 역효과만 더 심해질 테니, 아무래도 지금은 그냥 돌아가는 게 상책일 듯했다.
“걱정 마십시오, 카란드라님. 제가 누님을 잘 보좌하겠습니다.
만약의 사태가 생기더라도 절대로 적의 간계에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고 돌아가셔서 쉬고 계십시오.”
키에란이 정중하게 배웅하면서 말했다. 카란드라는 그 말을 믿고 조금 마음을 놓으면서 키오나의 숙소를 나왔다.
그때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프리트만이 얼른 다가와 인사하면서 말을 걸었다.
“카란드라님, 페레이즈가 이곳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면서요? 오늘밤에 제가 뭘 하면 될지 알려주십시오. 어제 전투에서 실수한 것을 만회하고 싶습니다.”
프리트만은 오늘밤에 정예 보병 300명을 지휘하여 키오나가 지휘하는 궁수들을 도와서 파로크 성채를 수비할 예정이었다.
그 또한 어제 전투에서 카를로만의 지시를 잘못 이행하는 바람에 아군의 참패에 일조하고 말았다면서 크게 자책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다만, 키오나와는 달리 프리트만은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 젊은 부족장의 기운찬 모습을 보면서, 키오나 때문에 잠시 의기소침해졌던 카란드라도 다시 기운을 냈다.
“프리트만, 한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 나는 전투 지휘관이 아니라 너한테 명령할 권한이 없으니, 이건 어디까지나 부탁이다.
물론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는 바람에 일이 잘못될 경우에는 내가 모든 책임을 다 질 것이다.”
“알겠습니다. 무슨 부탁인지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프리트만이 진지하게 묻자, 카란드라도 본격적으로 속마음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오늘밤 페레이즈가 파로크 성채를 기습 공격하더라도 키오나와 키에란이 성문을 굳게 닫고 잘 지킨다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페레이즈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그 자가 이곳 성채를 기습 공격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에는 뭔가 간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고 미리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프리트만의 질문에 카란드라가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페레이즈가 파로크 성채를 노린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이곳 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식량과 보급품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너는 지금부터 병사들을 동원하여 은밀하게 모든 창고마다 땔감을 쌓아 두고 기름도 잔뜩 뿌려 놓아라.
만약 일이 잘못 되어 행여나 페레이즈한테 이곳 성채를 빼앗기게 된다면, 그때는 미련 없이 창고에 쌓인 식량을 모조리 불태워 버려야 한다.
그 놈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곡식 한 톨 주면 안 된다.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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