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465화: 아들들의 전쟁 (196)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나서 페레이즈가 신중한 표정으로 클라티나에게 질문했다.

“만약 카란드라가 정략 결혼 제안을 딱 잘라서 거절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겠소?”

클라티나는 미리 다 생각해 둔 듯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첫 고비는 잘 넘은 셈이지요.

그 다음에 우리는 카란드라에게 자신이 안전하게 잘 있으며 태자 전하로부터 정략 결혼을 제안 받았다는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친필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면 됩니다.

그 편지의 내용 중에 이건 책략이니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것 정도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여자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정중하게 청혼을 했다는 사실만 증명해주면 충분하니까요.

카란드라가 요청 받은 대로 친필 편지를 쓴다면, 제가 그 편지를 가지고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야만족 진영에 갈 생각입니다.

물론 태자 전하께서도 저한테 협상에 필요한 적절한 권한을 부여하는 취지의 신임장을 써주셔야 하겠지요.”

“그대는 야만족 진영에 가서 무슨 말을 할 생각이오?”

“그야 당연히 카로이와 카르스덴을 만나서 정략 결혼 사실을 알리고 저들 사이에 한바탕 큰 파문을 일으킬 생각입니다.

카로이에게는 카란드라와의 약혼을 포기하고 그 여자가 카시우트 경과 결혼하여 넓은 의미에서 태자 전하의 인척이 되는데 동의한다면, 아군이 즉시 파로크 성채를 포기하고 본국으로 철수할 거라고 말할 생각입니다.

만약 거부할 경우, 카란드라는 아군 병사를 잔인하게 제물로 바친 죄로 사형을 면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도 충분히 강조해야겠지요.”

클라티나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파드무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겨우 그런 하찮은 조건으로, 아군 병사들이 많은 고생을 한 끝에 어렵게 점령한 파로크 성채를 포기하고 철수할 수는 없소.”

클라티나는 한심하고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발 부탁이니까 제 말을 끝까지 좀 들어보세요. 카로이도 그런 조건에 쉽게 동의할 리가 없어요.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조건이라면, 오히려 한층 더 달콤하고 유혹적으로 만들어서 상대방을 헷갈리게 만드는 게 책략에서는 아주 당연한 겁니다.

그런 쉬운 이치도 모르면서 중간에서 말을 끊지 마시라고요, 알겠어요?”

대놓고 핀잔을 들은 파드무스는 민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클라티나가 설명을 계속했다.

“또한 카르스덴에게는 누나와 카시우트 경의 정략 결혼에 동의한다면, 그 동안 그의 가문이 우리 왕국에 대해 지은 수많은 죄들이 전부 사면될 것이며, 카란드라 역시 태자 전하의 비호를 받아서 목숨을 건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내용의 협상 조건을 제시할 생각입니다.

물론 이것도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조건이지요.

만에 하나, 카르스덴이 정권을 빼앗기고 머리가 바보가 되었는지 제가 제시한 조건을 덜컥 받아들인다면, 그때는 방심한 그 멍청이를 유인해서 적당한 핑계로 처형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뭐, 그 자한테 조금이나마 판단력이 남아 있다면, 우리가 그렇게 하리라는 걸 뻔히 짐작하면서 틀림없이 거절하겠죠.”

“그렇다면 그대는 협상이 실패할 걸 잘 알면서도 야만족 진영에 가겠다는 말이오?”

“네, 방금 전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카로이와 카르스덴이 제가 제시하는 협상 조건을 절대로 안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

카로이는 카란드라와의 결혼이 소위 케르비오 국왕이 되는 데 필수적인 명분을 제공해 줄 것이니 절대 포기할 수 없고, 카르스덴은 우리 왕국과 태자 전하에 대한 적개심이 엄청나니 역시 결혼에 동의할 리가 없습니다.

다만, 둘 다 머릿속은 꽤 복잡할 겁니다.

무엇보다 정략 결혼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할 경우, 포로로 잡힌 카란드라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겠지요.

또한 카로이는 태자 전하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의 역량에 대해 새삼 진지하게 고민해 볼 것이고, 카르스덴는 자기 누나가 카로이와 결혼하는 게 영 내키지 않던 참이니 이번 정략 결혼 제의를 이용해 둘의 결혼을 훼방 놓을 수는 없을까 하는 궁리를 할 게 뻔합니다.

그래도 두 사람 모두 최종적으로는 이 정략 결혼을 거절하고, 그 대신 다른 조건으로 협상을 제안하여 카란드라를 구하는 한편 태자 전하를 철군시키려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저쪽에서 거절할 가능성이 높은 정략 결혼을 굳이 시도해서 아군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무엇이오?”

“첫째, 협상의 주도권을 쥘 수 있습니다.

공성전 준비가 다 끝난 다음에 저 자들이 무슨 조건으로 협상을 제안해올지, 여기 가만히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둘째로는 야만족 진영 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야만족 수뇌부는 이번 정략 결혼이 책략이라는 걸 짐작하고 최종적으로 거절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 책략의 본질적인 목표는 그런 똑똑한 자들을 속이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카로이나 카르스덴이 아니라 그 아래쪽에 주목해야 합니다.

책략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요.”

클라티나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페레이즈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만족 진영에 강제로 모인 많은 부족 대표들 중에는 틀림없이 카란드라가 꼴 보기 싫은 카로이 대신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

그대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 위해 직접 야만족 진영에 가겠다는 뜻 아니오?”

“정확히 보셨습니다. 제가 가서 최대한 많은 부족 대표들에게 카란드라가 태자 전하의 인척이 되면 이 고통스러운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하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카로이와 카르스덴이 최종적으로 정략 결혼을 거절한다면, 부족 대표들은 자연히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원래부터 오합지졸의 집합체에 불과한 야만족 군대의 사기는 한층 더 크게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이군. 그런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그게 전부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셋째, 태자 전하께서 그렇게 굴복시키고 싶어 하시는 카를로만의 마음도 덩달아 흔들어 놓을 수 있다고 봅니다.”

페레이즈는 카를로만이라는 이름을 듣자 한층 더 눈을 빛냈다.

“이번 책략으로 카를로만의 마음도 흔들어 놓을 수 있다?”

“그렇습니다. 그 젊은이도 우리 왕국에 대한 적개심이 크긴 합니다만, 그래도 자기 형보다 훨씬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따라서 태자 전하의 정략 결혼 제의를 최종적으로 거절하긴 하되, 우선 밀고 당기면서 협상을 좀 해본 다음에 거절하자는 주장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카로이나 자기 형과 또다시 갈등을 빚게 쉽겠지요. 이와 같은 세 가지 이득이 있다면 한번 시도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실패해도 우리한테는 딱히 큰 손해가 없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해 볼 가치가 높은 책략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라티나가 길게 설명을 마치자 페레이즈 태자와 측근 기사들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들 그녀의 물 흐르는 듯한 언변에 감탄하면서도, 과연 이 책략이 그녀가 말한 대로 잘 될까 의심하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야 카시우트가 입을 열었다.

“클라티나 아가씨, 나는 이번 책략의 당사자이니 의견을 말해도 되겠지요?”

클라티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까는 굳이 제 말을 끊어가면서 끼어들더니, 이제 와서 왜 갑자기 그렇게 조심스러워졌나요? 어서 말해보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카란드라에게 정략 결혼을 청하는 건 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저보다 군내 서열이 높고 전공이 많은 기사 분이 청혼하는 게 훨씬 더 그럴 듯해 보일 겁니다.

프레데일 경은 이미 결혼했으니 안 되겠고, 파드무스 경 같은 분이 정략 결혼을 청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자기 이름이 거론되자 파드무스는 다소 당황해 하는 눈치였다.

“이 사람아 왜 갑자기 날 끌어들여? 나도 엄연히 진지하게 혼담이 오가는 사람이 있는 몸이야. 반면에 자네는 아직 아무도 없잖아?”

“앞서 클라티나 아가씨도 제가 자격이 정지된 일개 평범한 기사에 불과하다느니 하는 자세한 사정 같은 건 시시콜콜하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파드무스 경 또한 굳이 혼담이 오가는 사람이 있니 없니 하면서 청혼을 할 필요 없지요.

어차피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을 게 뻔한 정략 결혼이고, 그저 야만족들이 고민하다가 분열하고 혼란에 빠지길 기대하면서 던져보는 미끼에 불과하다면, 저 보다 전공과 서열이 높은 파드무스 경이 훨씬 더 개연성 있는 정략 결혼의 당사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파드무스가 크게 당황해 하고 있을 때, 클라티나가 끼어들어서 말했다.

“이봐요, 내가 열심히 설명한 얘기를 못 들은 거예요? 이번 정략 결혼의 핵심은 태자 전하와 당신이 장차 처남매부 관계가 될 거라는 데 있다고 했잖아요?

파드무스 경이 비록 전하와 오래 전부터 형제처럼 지내온 친구 사이이기는 해도, 딱히 친인척 관계는 아니지요.

아무리 전공이 많고 군내 서열이 높다고 한들, 그게 야만족하고 무슨 상관이겠어요?”

카시우트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끌어댔다.

“음, 그럼, 태자 전하의 진짜 사촌동생인 파르라스 경의 이름을 빌려다 쓰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분도 미혼이고, 워낙 성품이 너그러운 분이니,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되더라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그 분이 여기 계시다면야 당연히 그렇게 했겠지요. 하지만 그 분은 저 멀리, 우리 왕국 북부 지방에 계시지 않습니까?

반면에 카시우트 경, 당신은 여기 있지요. 현장에 없는 사람을 내세워 정략 결혼을 해 봤자 현실성이 없어요.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환상의 보석 보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동전 한 개가 더 가치 있는 법입니다.”

“그럼, 당신이 데려온 노예 쿠스크를 이용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은 야만족 출신이니 차라리 나보다 더 현실적일 겁니다.”

카시우트의 이번 제안은 다른 사람들의 귀에도 다소 궁색하고 무리하게 들렸다. 클라티나는 마침내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핑계는 그만 둬요! 쿠스크는 야만족 출신이긴 해도 엄연히 우리 가문의 노예란 말이에요.

노예가 공주한테 청혼해 봤자, 야만족 진영이 분열하는 건 고사하고 수치와 굴욕감으로 분노할 게 뻔하다는 걸 몰라서 그래요?

도대체 왜 그렇게 온갖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거죠?”

“그건 저······”

카시우트는 여전히 무척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뭐가 그렇게 못 마땅한지 자기 스스로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는 기본적으로 명예를 중시하는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이 불편한 느낌은 단순히 성격에 어긋나는 일을 억지로 수행해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음 속에서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이 답답함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그때 잠자코 있던 페레이즈 태자가 입을 열었다.

“됐다, 카시우트, 네가 워낙 착하고 고지식해서, 아무리 책략이라고 해도 거짓으로 야만족 공주에게 청혼한다는 것 자체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다.

그 심정은 나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책략의 일부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적을 속이는 책략을 쓰는 게 무슨 부끄러운 일이겠느냐?

네가 며칠 전에 이 성채를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수모를 무릅쓰고 적을 유인하는 미끼가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다소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다시 한번 나를 위해 야만족을 분열시키는 미끼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페레이즈의 말투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클라티나의 책략을 한번 실행해 보기로 마음을 굳힌 듯했다.

“카시우트, 너는 일단 포르주와 함께 망루 위에 올라가서 적 진영을 감시하고 있도록 해라.

나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클라티나와 함께 카란드라를 만나러 가서 넌지시 정략 결혼에 대한 운을 떼어 볼 생각이다.

그 여자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나서 우리끼리 다시 얘기를 해보도록 하자.

이번 책략이 네 명예나 경력에는 전혀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아무 염려하지 마라. 알겠느냐?”

페레이즈가 달래듯 말하자 카시우트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됐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걸로 끝내자. 모두 돌아가서 자기가 맡은 일에 전념하도록 해라.”

페레이즈 태자가 해산 명령을 내리자, 측근 기사들은 즉시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서서 깊이 머리를 숙여 보인 다음 총총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카시우트도 썩 개운하지 못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클라티나 아가씨, 우리는 지금 당장 카란드라를 만나러 갑시다.”

페레이즈가 말하자 클라티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 전하, 잊지 마십시오. 이번 정략 결혼이 최종적으로 거절 당할 게 뻔하다고 해도, 저쪽에서 딱 잘라 거절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청혼하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정말 진지하게 정략 결혼을 성사시키고 싶어하시는 것처럼 보여야 야만족 진영이 조금이라도 더 혼란에 빠질 테니까요.”

“잘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페레이즈는 클라티나에게 자신 있게 말한 다음, 그녀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그들 두 사람은 그때까지도 문 밖에서 묵묵히 지키고 서 있던 노예 쿠스크와 합류하여 카란드라의 숙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