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0화: 어느 평범한 사제의 비망록
이번에 숙소를 옮기게 되어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내가 아직 철부지였을 때 사제 학교에 제출했던 역사 숙제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게 뭐였냐 하면,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라는 주제로, 실제 역사적 사례를 조사하여 정리하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글짓기를 해오라는 숙제였다.
나는 당시 며칠 밤을 꼬박 새워가면서 ‘암흑시대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아본다’는 내용의 거창한 글을 썼고,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큰 소리로 발표까지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여전히 부끄럽긴 하지만, 의외로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의문과 관련해서 동기 부여를 해주는 측면도 있었다.
그래서 깨끗이 태워버리기 전에, 비망록에 일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어두기로 했다. (언젠가 이걸 보게 될 먼 훗날의 나에게, 부끄럽게 해서 미안하다.)
* * * * * *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륙은 암흑시대 속에서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끔찍한 전란 속에서 제대로 된 기록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래도 다음과 단편적인 기록들이 남아서 당시의 참상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태양이 흐려지고, 달이 사라졌다.
밤하늘의 별들도 빛을 잃었다.
산이 무너지고, 대지가 갈라졌다.
강과 바다도 다 썩어버렸다.
세상의 질서가 모두 무너졌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무언가에 홀려서
괴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 평범했던 사람들이
이렇게나 잔인해질 수 있단 말인가?
이 잔인한 괴물들은 생명을 지닌 것이라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조리 살육했다.
서적, 예술품, 건축물......
모든 문명이 자취를 감추었다.]
처음에는 하필 암흑시대에 태어난 불행을 저주하면서 신들을 원망하던 생존자들도, 나중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자기가 죽을 차례를 기다릴 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모두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 참담한 암흑시대에 두 분의 위대한 현자가 나타났습니다. 감히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황송한,
대현자 성 실레지아
대현자 성 라일브론
두 분의 현자는 이렇게 끔찍한 전란이 계속되는 것은, 사람들의 죄악을 징벌하기 위한 참된 신의 심판이 내린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또한 심판이 내렸다는 것은, 기존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암흑시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거짓된 신들'을 버리고, '참된 신'을 섬겨야만 한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두 분의 현자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그런 놀라운 확신을 갖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그 분들이 대륙 전체를 순례하면서 참된 신 앞에 용서를 구할 것을 간절히 호소하였으며, 그 호소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분들의 가르침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마침내 희망이 생겼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이 암흑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희망을 되찾게 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두 현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으며, 나중에는 이미 손에 피를 묻힌 사람들 중에서도 회개하고 복종하는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군사력을 지닌 자들 말입니다.
마침내 두 분의 현자는,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바로 이곳, 대륙 서남부의 성지 레노스에서 참된 신의 용서와 자비가 이 땅에 내려졌음을 엄숙히 선언했습니다.
동시에 여전히 살육과 파괴를 멈추지 않고 있는 괴물들을 상대로 위대한 성전을 선포하였습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 성스러움과 위대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두 현자가 신의 용서와 자비를 선포한 이후,
태양이 빛을 되찾았고,
밤하늘에 달과 별이 돌아왔다.]
그렇습니다. 참된 신의 은총이 이 땅에 내려졌다는 명백한 증거가 모든 사람들의 눈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후 절망이 아닌 희망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영웅들이 신의 이름으로 괴물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릴 때마다, 암흑시대의 끝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참된 신이 누구의 편인지는 분명했지만, 거짓된 신들을 따르는 괴물들도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성전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고, 안타까운 희생과 비극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영웅들은 질서를 회복하고 평화를 되찾는데 성공했습니다.
한때 영원히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평화가 어렵게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대륙 전체가 폐허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살아 남은 이들은 이제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성지에 모여 황폐해진 문명을 재건하기 위한 지혜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회의 끝에, 두 번 다시 암흑시대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 신의 이름으로 성스러운 대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협정이 체결된 해를 현자력 원년으로 정하여 영원히 기념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현자력 원년에 체결된 대협정에 따라, 대륙에는 다음과 같은 4개의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대륙 동부 지방: 플리아인의 카스트레아 왕국
대륙 서부 지방: 발리아인의 가르데스 왕국
대륙 남부 지방: 헬리아인의 네필린 왕국
대륙 중부 지방: 틸리아인의 밀레디아 왕국
각 왕국의 위치, 영토, 거주민은, 두 번 다시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최선을 다해 조정하고 또 조정한 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4개의 왕국뿐만 아니라, 두 분의 위대한 현자를 중심으로 건설된 2개의 신전이 신앙과 문명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우선 대협정이 체결된 성지 레노스에는 성 라일브론 신전이 세워져서 올바른 신앙을 감독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대륙 중앙의 성산 산리모 위에도 성 실레지아 신전이 건설되었으며, 이후 그곳은 소위 문명의 감시자 노릇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륙의 거의 대부분 지역에 질서와 평화가 돌아왔지만, 가장 춥고 척박한 북부 지방에는 정식 국가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참된 신의 뜻에 복종하여 무기를 내려놓는 것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성전에 맞서 저항한 자들이 그곳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 괴물 같은 자들은 전쟁에 패배한 뒤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었음에도 끝끝내 회개와 복종을 거부했으며, 결국 국가를 이룰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춥고 황량한 땅에서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합당한 처벌이지요.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다시 안정을 찾았습니다.
폐허 위에서 문명을 다시 일으키는 일은 물론 힘들었지만, 사람들은 전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루도 빠짐 없이 신의 자비로움을 찬양하면서, 영원히 올바른 신앙을 버리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사람들은 암흑시대에서 살아남아서 문명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참된 신의 자비로운 은총 덕분이라고 확신했으며, 너나 할 것 없이 이 땅을 ‘자비의 대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자비의 대륙
그 따스한 호칭 안에는 평화와 번영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눈앞에서 참된 신의 자비와 은총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신앙심이 강하고 선량한 성품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선량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리고, 다시 어리석은 짓을 시작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현자력 100년이 채 되기 전부터, ‘자비의 대륙’에서는 어느새 새로운 전란의 불씨가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4개의 왕국이 쪼개져 만들어진 크고 작은 나라들이 서로 싸우고 있으며, 대협정이니 올바른 신앙이니 하는 말들은 날이 갈수록 비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위해 또다시 무언가에 홀린 듯 손에 피를 묻히고 있을 것이며, 대륙 전역에서 피비린내가 점점 짙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땅에는 어리석은 사람들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라면 지금 극심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신은 과연 다시 한번 이 땅에 자비와 은총을 베풀 것인가 하는 불안감.
혹시 이번에야말로 어리석은 사람들을 완전히 파멸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이러한 의문에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하 생략)
* * * * * *
암흑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부분은 그래도 멀쩡한 편이다.
하지만 이 다음부터는, 우리가 신 앞에서 회개하고 자비를 구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느니, 대륙의 모든 군주들에게 당장 전쟁을 멈추고 신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을 요구한다느니 하면서,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나고 똑똑한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다. (정말 부끄럽다)
아, 과거의 순진했던 나 자신이여!
이런 글을 정말 내가 썼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창피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순수한 열정과 패기가 부럽기도 하구나.
명색이 사제 서품을 받은 몸으로 할 말은 아니겠으나, 솔직히 지금의 나에게는 과거와 같은 확신이 더 이상 없다.
암흑시대는 정녕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시작되었고, 한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한 자비로운 신의 은총 덕분에 끝이 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인간 세상에서 벌어진 일들을 멋대로 신의 뜻으로 해석하여 적절하게 이용했던 것뿐일까?
다시 찾아온 전란의 시대를 종식시키려면, 무엇보다 이런 근본적인 의문부터 고민해 봐야 할 터인데, 왜 여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긴, 어린 시절의 나 자신조차 이상한 확신에 차서 부끄러운 글을 썼을 정도이니, 다른 누구를 이상하다고 여기겠는가?
그러니 이번에 다짐하건대, 나 자신부터 앞장서서 저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사제로서 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의무일지도 모르니까.
뭐, 그런 각오를 다지게 해준 것에 조금은 감사하면서, 이제부터 나는 이 부끄러운 글을 태우러 가야겠다.
<어느 평범한 사제의 비망록>
- 작가의말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다소 길다고 생각되는 문단마다 엔터를 추가하는 작업을 하다가, 결국 서문에 해당하는 제 0화를 전반적으로 손질했습니다. 핵심 내용은 그대로 두되, 그걸 좀더 자연스럽게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첫 연재라 부족한 점이 많고, 문피아의 시스템에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지적 사항이 들어오면, 작가로서 제 의도를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극 수용하겠으니, 기탄 없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고, 이렇게 적당히 손질해 가면서, 일단 작품 하나를 완결시키는 것이 목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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