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480화: 아들들의 전쟁 (211)

크로키가 힘주어 말했다.

“부족장님 아드님은 이제 다 컸습니다. 성인식까지 치렀으면 다 큰 게 아니고 뭐겠습니까? 원래 아버지 눈에는 아들이 마냥 어리게 보이는 법이지요.

이런 일에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야 하니, 제 생각으로는 친혈육인 아드님이 가장 적임자입니다.”

크로키가 아무리 자신 있게 설득해도 케이타는 계속 망설였다.

“하지만 내 아들은 실전 경험이 거의 없어. 이건 아주 위험한 일이 아닌가?

차라리 내 처남인 카프탄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저 친구는 용력도 출중하고 경험도 많거든. 어떻게 생각하나?”

케이타가 카프탄을 곁눈질하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그 거구의 사내는 멀지 않은 곳에서 우람한 팔뚝을 교차시켜 팔짱을 낀 채 주변을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그 충직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크로키가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안됩니다. 카프탄을 보냈다가, 만약 그 자가 부족장님의 뜻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대신, 부족장님을 제쳐두고 자기가 직접 페레이즈와 내통하려 들면 어쩝니까?

아무리 가까운 인척이라고 해도 처남은 결국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에 불과합니다.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처남 보다는 아드님을 보내는 게 훨씬 낫습니다.”

크로키가 거듭 아들을 보내라고 권했지만, 케이타는 여전히 망설이면서 결정을 유보했다.

“자네 뜻은 잘 알았네. 카로이도 아직 확실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 듯하니, 나도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네.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지.”

케이타는 크로키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다음, 카프탄과 팔라나를 데리고 총총히 멀어져 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크로키가 짜증스럽게 침을 탁 뱉었다.

“멍청한 놈. 카로이도, 케이타도, 결국 다 똑같은 놈들이야. 둘 다 어리석고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지. 이렇게 쉬운 문제 하나 빨리 결정하지 못해서야······

이젠 정말 플로젠으로 전향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구나. 페레이즈나 섭정 왕비에게 붙어서 플로젠 왕국의 케르비오 총독이라도 되는 게 훨씬 낫겠다.

에이, 답답한 놈들 같으니.”

크로키는 험상궂은 얼굴 가득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자기 막사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카를로만은 언덕 아래 진영에 돌아왔다. 표정은 심각했고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때까지도 공성 무기 제작에 한창 바쁘던 코드니, 칼마르, 코르제가 반갑게 맞이했다.

“꽤 오래 걸리셨군요.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건 저······”

카를로만은 문득 이 얘기는 많은 사람들이 듣는 곳에서 할 만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일꾼들에게 하던 작업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내려 놓은 다음, 코드니, 칼마르, 코르제와 함께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세 사람이 긴장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자, 카를로만은 언덕 위 진영의 지휘 막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대한 자세히 알려주었다.

물론 그의 막사 밖에서는 신임하는 직속 부하들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끔 엄중히 지키고 있었다.

“카를로만 왕자님, 정말 포르주의 안내를 받아서 비밀 통로를 이용해 파로크 성채 안으로 잠입하실 작정입니까?”

이야기를 다 들은 코르제가 대뜸 놀라면서 물었다.

“아직 카로이가 최종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십중팔구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왜 그래? 이게 함정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카를로만이 묻자 코르제가 한층 더 언성을 높여서 대답했다.

“당연히 함정이지요. 포르주는 뻔한 함정을 파 놓고 누가 됐든 아군 진영의 유력 지휘관을 유인해서 잡으려는 속셈입니다.

또한 크로키는 그런 속셈을 이미 눈치챘으면서도 일부러 그 함정에 카를로만 왕자님을 밀어 넣어서 페레이즈의 손을 빌려 제거하려는 게 분명합니다.

지금쯤이면 카로이 또한 크로키의 꿍꿍이를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카로이가 내일 왕자님에게 포르주의 안내를 받아 파로크 성채로 잠입하라는 지시를 내린다면, 그건 그 자가 크로키의 뜻을 받아들여 왕자님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겁니다.”

칼마르도 옆에 있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거들고 나섰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무슨 수를 쓰든지 이번 구출 임무에서 빠지시는 게 좋겠습니다.”

카를로만은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저라고 왜 그런 생각을 안 해봤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페레이즈에게 붙잡혀 정략 결혼 책략에 이용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누님을 구출하는 임무입니다.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소중한 누님을 구하러 가기 싫다고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전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코르제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크로키는 아마도 왕자님의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성격까지 고려해서 제 발로 뻔한 함정에 들어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는 겁니다.

현명하신 왕자님께서 설마 그걸 모르시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런데도 정녕 이런 하찮은 간계에 당하실 작정입니까?”

카를로만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 말이 다 옳다. 나도 내가 지금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아.

그래도 카로이가 내일 나한테 파로크 성채 안으로 잠입해서 누님을 구출해 오라는 명령을 정식으로 내린다면 도저히 거절하지 못할 것 같다.”

카를로만의 성격을 잘 아는 코르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줄곧 잠자코 있던 코드니가 입을 열었다.

“소중한 가족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건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저 또한 가족이 인질로 붙잡혀 있다면, 설사 함정이 있다고 해도 위험을 무릅쓰고 구하러 갈 겁니다.

바로 최근에도 크로키가 마을 사람들과 제 가족을 인질로 잡아서 병력을 모아 오라고 했을 때, 저는 놈의 간계에 놀아난다는 걸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잠자코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 말을 듣고 코르제는 어쩐지 카를로만을 너무 몰아세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소 민망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버지 말씀이 옳습니다. 좀 전에는 제 말이 지나쳤습니다. 이건 현명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지요.

저부터도 어떤 악당이 가족을 인질로 삼고 유인한다면 제 발로 함정에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도저히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왕자님을 따라서 구출 작전에 참여하는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그 함정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칼마르가 물었다.

“카를로만 왕자님, 크로키가 제안한 대로 병력이 구성된다면, 왕자님의 직속 부하 가운데 10명, 북쪽 변경지대 출신 병사 가운데 10명, 추방자 집단 가운데 10명을 뽑아서 데려가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그 30명 가운데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건 왕자님의 직속 부하 10명뿐입니다.

추방자 집단이야 말할 것도 없고, 북쪽 변경지대는 포르주의 아버지인 페르돈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이니까요.

따라서 임무 수행 도중에 나머지 20명이 모조리 적으로 돌변하는 최악의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계셔야 합니다.”

코르제가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말했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직속 부하 10명을 선발하실 때 특히 신중을 기하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스스로를 추천하겠습니다.

저도 따라가고 싶으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파로크 성채 안에서 무슨 돌발 사태가 생기든, 제가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카를로만은 흠칫 놀라면서 손을 내저었다.

“코르제, 방금 전에 네 입으로 이게 함정이 거의 틀림없다고 말했잖아? 나는 누님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하지만, 넌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네 가족은 파로크 성채가 아니라 바로 여기 있으니까 말이야. 넌 이곳에 남아서 네 아버님을 도와 계속 공성 무기를 만드는 일에 전념하도록 해라.”

카를로만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코르제는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싫습니다. 왕자님이 누님을 구하기 위해 함정인 걸 뻔히 알면서도 걸어 들어간다면, 저는 왜 왕자님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면 안 되는 겁니까?

저는 비겁한 놈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왕자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이상, 위험한 임무일수록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뭔가 도움을 드리고 싶단 말입니다.

제발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카를로만은 코르제의 충성심에 내심 크게 감동했다. 하지만 얼마 전 전투에서 가까운 친구들을 많이 잃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지라 무척 망설여졌다.

거기다 코르제의 아버지인 코드니가 바로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선뜻 데려가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코르제, 날 따르기로 결심했다면 내 명령에 따라야지. 넌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잖아? 그냥 여기 남아서 아버지를 도와 공성 무기를 만드는 게 좋겠다.”

“지금은 공성 무기를 만드는 것 보다 왕자님을 지키는 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절 꼭 데려가 주십시오.”

카를로만이 아무리 말려도 코르제는 반드시 따라가겠다고 끝까지 우겨댔다. 두 젊은이가 이런 식으로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코드니가 끼어들었다.

“카를로만 왕자님, 행여나 저를 생각해서 코르제를 데려가지 않으시려는 거라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전 제 아들을 믿습니다.

코르제가 곁에서 도와드린다면, 왕자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실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더 높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제 아들을 데려가 주십시오.”

그래도 카를로만이 계속 망설이고 있으려니까, 이번에는 칼마르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코르제를 데려가기 싫으시다면, 차라리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카를로만은 깜짝 놀라서 한층 더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칼마르 아저씨,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부상 당한 몸으로 어딜 간단 말입니까?”

칼마르가 빙긋 웃으면서 반농담으로 물었다.

“혹시 왼팔을 잃었다고 저를 폐인 취급하시는 겁니까?”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잘 알잖아요? 만에 하나 제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칼마르 아저씨는 제 몫까지 형님을 보좌해야 할 것 아닙니까?”

“하하하, 저를 높이 평가해서 하신 말씀이라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카르스덴 왕자님을 보좌하는 것 보다 지금은 카를로만 왕자님을 도와 카란드라님을 무사히 구출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한테는 아직 오른팔이 남아 있습니다. 이미 오른팔만 가지고 싸우는 연습도 시작했으니, 절대로 짐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위험한 임무에서는 제가 지닌 풍부한 실전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래도 너무 위험합니다.”

“카란드라님을 구하고 싶은 심정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데려가 주십시오.”

칼마르의 고집 또한 젊은 코르제 못지 않게 완강했다.

카를로만은 이쪽 저쪽의 두 고집불통을 상대하느라 정말 골치가 아팠다. 그러자 코르제가 다시 한번 재촉했다.

“카를로만 왕자님, 이럴 때일수록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시면 안 됩니다. 그냥 저와 칼마르님을 둘 다 데리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는 결코 왕자님을 모시고 함께 함정에 빠져 죽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같이 힘을 합쳐 페레이즈의 함정을 극복하고 카란드라님을 무사히 구출하려고 가는 거란 말입니다.”

코드니도 옆에서 거들었다.

“왕자님의 다른 부하들도 어차피 가족이 있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코르제만 특별 취급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건 제 아들뿐만 아니라 아버지인 저한테도 수치스러운 일이니까요.

우리는 지금 엄연히 전쟁 중입니다. 중요한 전투에는 가장 신뢰할 만한 병사를 데려가는 게 당연한 법 아닙니까?

자신과 부하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는 전투에서 결코 이길 수가 없지요.

그러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마시고 오직 필요한 능력만 고려해서 데려갈 병사를 선발하도록 하십시오.”

이쯤 되자 카를로만으로서도 코르제를 데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칼마르만큼은 차마 데려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칼마르 아저씨는 여기 남아서 코드니 부족장과 함께 공성 무기를 만드십시오. 저는 코르제를 비롯해서 젊은 직속 부하 10명을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명령이니 더 이상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까?”

칼마르는 여전히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카를로만의 권위를 존중하여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코르제는 자기 뜻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고 있을 때, 갑자기 카를로만의 막사 밖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막사 밖을 지키고 있던 그의 직속 부하들이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부하 한 명이 다급히 막사 안으로 들어와서 카를로만에게 보고했다.

“카를로만 왕자님, 페르돈이 꼭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지금 자신을 안 만나면 반드시 후회하실 거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페르돈, 그 자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온 거지?”

카를로만은 조금 당황했다. 코드니가 옆에서 신중하게 말했다.

“일단 한번 불러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페르돈은 포르주의 아버지입니다.

포르주가 페레이즈와 짜고 무슨 함정을 파 놓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지금은 놈의 속내를 조금이라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칼마르와 코르제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카를로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페르돈을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했다.

“다들 여기 계셨군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시는데 불청객으로 찾아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페르돈이 여느 때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