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388화: 아들들의 전쟁 (119)
페레이즈 태자가 부드러운 말투로 칭찬을 하자, 케르비오 인질들은 감격한 표정으로 머리를 깊이 숙이면서 입을 모아 대답했다.
“아닙니다, 태자 전하. 상은 조금도 바라지 않습니다.
국왕이 되겠다는 야심에 눈이 먼 카르스덴이 감히 반란을 일으킨 이상, 인질인 저희들은 진작에 죽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저희들의 목숨을 살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공을 세울 기회까지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저희들은 이미 넘치도록 충분하게 상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도 무슨 일이든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충성하겠습니다.”
페레이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한번 그들을 크게 칭찬한 다음 카시우트를 시켜서 데리고 가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막사 안에 단 둘이 남게 되자 프레데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자 전하, 이런 말씀 드리기는 참으로 송구합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했을 때, 방금 전에 우리 쪽으로 전향한 인질들이 했던 말들은 카를로만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화가 나고 불쾌한 소리였을 겁니다.
케르비오를 굴복시키기 위해 진심으로 그 영리한 젊은이를 이용하실 작정이라면, 그런 식으로 도발하신 게 과연 최선이었을까요?”
페레이즈가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깔끔하고 보기 좋은 수단은 아니지. 나도 가능하면 저 인질들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카시우트에게 막사 뒤쪽에서 인질들을 데리고 대기하고 있으되, 내가 부르기 전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사전에 당부를 해 놓았던 거야.
가능하면 저들을 부르지 않은 상태에서 카를로만과 환담을 잘 끝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결국 왜 부르신 겁니까?”
“카를로만이 내 생각보다 훨씬 영리하고 심지가 굳었기 때문이야. 비록 나이는 젊지만 아는 것이 많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더라고.
그러니까 많은 부족이 그를 따르는 것이며, 또 형인 카르스덴이 자꾸만 동생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거겠지.
얘기를 나눠볼수록 점점 더 탐이 나는 인재임에 틀림없어.
저런 인재를 꼭 내 밑에 두고 싶어. 저 젊은 친구가 나한테 진심으로 충성을 다 바친다면, 최고의 케르비오 공작이 될 수 있을 거야.
심지어 카를로만이라면, 언젠가 케르비오 공작이 아닌 케르비오 국왕으로 삼아도 전혀 아깝지 않을 것 같아.
물론, 그 모든 건 어디까지나 카를로만이 나한테 충성을 바치게 되었을 때의 얘기겠지.”
어떻게든 카를로만의 충성심을 얻고 싶다는 페레이즈 태자의 말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인 것 같았다. 프레데일이 또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런 식으로 전향한 인질들을 시켜서 도발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태자 전하께서 물러가서 저녁식사 때까지 쉬고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가 잘 살펴 보니, 카를로만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과연 그 혈기 왕성하고 주관이 뚜렷한 젊은이의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까요?”
페레이즈가 그다지 밝지 못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압도적인 힘으로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상대가 의외로 만만치 않아서 끈질기게 저항한다면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어?
이쪽이 다치기 전에 상대방을 죽여버리거나 혹은 어쩔 수 없이 비겁한 수단을 써서라도 제압하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가능하면 카를로만을 죽이기는 싫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마음을 흔들어 놓는 길을 택했던 거야.
이런 편법을 써서라도 저 똑똑한 젊은이의 굳건한 의지를 흔들어 놓고 확고한 신념을 망가뜨려야지.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에 있던 집을 헐어버려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카를로만의 머릿속에 나와 플로젠 왕국에 충성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의지와 신념이 형성되도록 만들 작정이야.”
사실 페레이즈도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심 카를로만을 설득해서 굴복시키는 게 당초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어려울 듯하다는 걱정은 벌써부터 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차하면 카를로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이용해서 케르비오를 플로젠의 지배하에 둬야겠다는 생각도 본격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기사 키르기트가 막사 안으로 들어와서 정중히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태자 전하, 아까 명령하신 대로 문제의 가짜 연락관인 피브르라는 자와 대화를 나누어 봤습니다.
그 자는 어찌어찌 해서 자신이 가짜 연락관이라는 사실을 이미 눈치챈 모양이었습니다.
또한 신임 남부 총독의 조카딸인 클라티나로부터 부당하게 미움을 사는 바람에 억울하게 사지로 내몰렸을 뿐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꼭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태자 전하를 뵙게 해달라는 애원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페레이즈 태자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그 피브르라는 자에게, 혹시 클라티나에 대한 원한 때문에 야만족에게 투항하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한번 물어봤느냐?”
키르기트가 대답했다.
“예, 뭐, 일단 물어보긴 했습니다.
당연히 펄쩍 뛰면서 자기는 행실이 다소 문란하긴 해도 매국노는 아니라면서 절대로 조국을 배신하지는 않는다고 한사코 부정하더군요.
물론 배신자가 자신이 배신했다고 순순히 인정할 리는 없으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만.”
페레이즈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도 자기 행실이 문란하다는 사실은 인정했구나. 알았다. 우선 사람을 시켜서 이 회담용 탁자를 좀 치워라.
그리고 그 가짜 연락관 피브르를 이리 데려와라. 내가 몇 가지 물어봐야겠다.”
한편, 그러는 동안 카를로만과 칼마르는 기사 파드무스의 안내를 받아 제법 크고 좋은 막사 안에 자리잡고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편히 쉬고 계십시오. 나중에 연회 준비가 다 끝나면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파드무스는 정중하게 인사를 남기고 나서 떠나 버렸다.
즉시 카를로만을 따라온 직속 부하들이 막사를 빈틈없이 둘러싸고 플로젠 병사들의 접근을 잔뜩 경계했다.
하지만 딱히 그렇게 경계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플로젠 병사들은 사전에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카를로만 일행이 머물고 있는 막사 근처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았다.
다들 이런 저런 작업을 하느라 몹시 바쁜 것 같았다.
“페레이즈, 이 악랄한 놈! 감히 우리측 인질들을 회유하고 전향시켜서 나를 조롱해? 이 비열하고 음흉한 악당 같으니!
내 언젠가 반드시 네 놈에게 오늘 당한 수모를 갚고야 말겠다!”
막사 안에서 같은 편 사람들하고만 있게 되자, 카를로만은 참았던 분노를 한꺼번에 폭발시키면서 페레이즈를 사정 없이 욕하기 시작했다.
평소 적이 되어 싸우면서도 페레이즈의 위엄과 능력에 대해서는 깊이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던 카를로만으로서는 지극히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고정하십시오. 아까 저 역시 하마터면 그 다섯 매국노들에게 주먹을 날릴 뻔했다가 왕자님께서 먼저 화를 내시는 바람에 겨우 참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왕자님 심정은 잘 압니다만, 지금 이렇게 화를 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도 참을 테니 왕자님께서도 화를 삭이십시오.”
칼마르도 여전히 분노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잠시 동안, 카를로만과 칼마르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스스로 냉정을 찾음과 동시에 상대방이 진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애썼다.
그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코르제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저는 페레이즈의 막사 앞에 도열해 있다가, 막사 뒤쪽에 숨어 있던 케르비오 사람 다섯 명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불쑥 나타나서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안에서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카를로만 왕자님의 의지와 언변이 너무 뛰어나서 페레이즈가 도저히 말로는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까, 비열한 수단을 써서 왕자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려고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합니다.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 얼른 잊어버리십시오.”
그나마 조금씩 냉정을 되찾아가면서 카를로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안다.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나 역시 사람이다. 알면서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걸 어쩌겠나?
심지어 그 다섯 명은 모두 북부 평야지대 출신일 뿐만 아니라, 내가 키르토크에서 인질 생활을 했을 당시, 무료함을 달래려고 몇 번 어울려서 대화하곤 했던 친구들이야.
그때는 다들 성실하고 인품이 훌륭한 젊은이들이었어. 그랬는데 잠시 못 본 사이에 이렇게 매국노가 되었다니, 나는 지금 무슨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칼마르가 그 말을 받아서 말했다.
“페레이즈의 의도는 명백합니다.
그 자는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충성심이 강한 케르비오 왕국 사람들조차 마음대로 회유할 수 있음을 과시하면서 정신적으로 왕자님을 압박하는 겁니다.
자, 봐라, 카를로만, 네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나는 얼마든지 회유하여 전향시킬 수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너는 도대체 누구를 믿고 감히 계속해서 플로젠 왕국에 맞서 저항할 작정이란 말이냐?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 심복 부하들을 회유하여 밤중에 네 목을 가져오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어서 빨리 내 요구 조건을 받아들여 얌전히 무릎을 꿇어라. 페레이즈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카를로만이 한층 더 진정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마르 아저씨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페레이즈, 그 사악한 놈의 위협을 곧이곧대로 받아 들인다면, 결국 우리는 무한한 불신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심지어 우리가 있는 이 북부 평야지대의 충성스러운 부족들 조차 전혀 신뢰할 수 없지요.
그들 또한 언제 그 다섯 명처럼 페레이즈에게 넘어가서 매국노가 될지 모르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극도의 불안과 의심 속에서 위태롭게 플로젠에 대한 저항을 이어가든지, 아니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페레이즈에게 굴복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놈의 수작에 절대로 넘어가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왕자님께서는 제가 페레이즈의 회유에 넘어가서 케르비오 왕국을 배신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칼마르가 묻자, 카를로만은 즉시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속된 말로, 나는 내 손이 나를 배신하더라도 칼마르 아저씨는 절대로 케르비오 왕국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칼마르가 모처럼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 정말 고마운 말씀입니다. 이 땅에는 저보다 몇 배는 더 유능하고 충성심이 강한 인재가 많이 있습니다.
페레이즈가 교활하게 케르비오 왕국 사람 몇 명을 회유하여 매국노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우리 모두를 배신시키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시고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코르제도 기다렸다는 듯이 거들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카를로만 왕자님. 수천 명의 병사들 사이에도 비겁한 자 한 두 명쯤은 반드시 있기 마련 아닙니까?
하물며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케르비오 땅에 매국노 몇 명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 비열한 인간 한둘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 땅에는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으니까요.”
칼마르와 코르제가 거듭 격려하자, 카를로만도 일시적으로 흔들렸던 마음을 완전히 가다듬고 결연하게 말했다.
“칼마르 아저씨 고맙습니다. 코르제, 자네도 말 잘해줬네. 자네 같은 부하들이 있는 한 나도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칼마르가 기쁜 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과연 카를로만 왕자님이십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페레이즈가 이 땅 사람 가운데 가장 회유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왕자님일 겁니다.
그 자 입장에서는 가능하면 왕자님의 비위를 맞추고 기분 좋게 해서 자기 편으로 넘어오게 만들고 싶겠지요.
그런데도 저런 비열한 수단을 써서 왕자님을 도발하고 마음을 뒤흔들어 놓으려 한 것은, 오히려 페레이즈가 그만큼 절박하고 초조한 상황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코르제도 말한 것처럼, 왕자님과 말싸움에서 정공법으로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저런 비겁한 수를 쓴 게 분명합니다.”
“이젠 정말 마음 속에 아무런 혼란도 의심도 없습니다. 페레이즈가 무슨 비겁한 수작을 부리든 말든, 우리는 당초 계획한 대로 밀고 나가면 그만입니다.
이따가 저녁 때 성대한 연회가 열리면 그 동안 굶주리고 지친 플로젠 놈들이 우리가 가져 온 술과 고기를 즐기면서 최소한 조금이라도 방심하게 될 겁니다.
그런 다음, 우리한테 전향한 피브르가 같이 항복한 병사들을 데리고 진영 곳곳에 불을 지르면, 그 불길을 본 형님이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총공격을 감행하겠지요.”
카를로만의 말을 듣고 칼마르가 문득 걱정을 늘어놓았다.
“카를로만 왕자님, 이제 와서 뒤늦게 이런 소리를 해 봤자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무의미한 걱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다.
그래도 전 피브르라는 작자를 정말 믿어도 되는 건지 자꾸만 마음에 걸립니다.
진심으로 항복한 건지 여부도 당연히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과연 다른 플로젠 놈들의 눈을 피해 제대로 진영에 불을 지를 수 있을지도 영 미덥지 못하거든요.
사실 저는 항복의 진실성 보다 그 자의 능력이 더 미심쩍습니다.
유능한 놈이었다면 애초부터 죽어도 좋은 미끼 노릇이나 떠맡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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