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454화: 아들들의 전쟁 (185)

카를로만은 원래 추방자들에 대해 딱 평균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케르비오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차별하지도, 그렇다고 더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그 추방자 집단에 속한 웬 짐승 같은 놈과 싸우다가 칼마르는 왼팔을 잃었고 크리겔은 목이 잘렸으니,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호의적으로 봐줄래야 봐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현 상황에서는 싫든 좋든 추방자들로부터 정예병과 식량을 보충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은 그 또한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마르와 크리겔이 당하던 순간을 생각하면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

“카를로만 왕자님, 추방자 놈들은 잊어 버리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이나 합시다.”

한참 동안 카마 부족의 병력이 행진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코드니가 말했다. 카를로만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들에게는 투석기를 만드는 일이 더 급했다.

내일 저녁까지 투석기를 완성하지 못하면 크로키가 카로이를 충동질해서 그들을 가만 내버려둘 턱이 없었다.

그러니 언제까지 저 추방자 집단에만 신경 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를로만, 코드니, 칼마르가 애써 찝찝한 기분을 물리치고 다시 투석기 제작에 전념하는 동안, 카마 부족의 병력은 카푸스의 지시에 따라 진영 안의 정해진 장소에서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채 추가 지시를 기다렸다.

이어서 카마 부족의 대표들이 언덕 위로 올라가서 카로이를 만나 인사를 하기로 했다.

카로이는 지휘 막사에서 위엄 있게 자리에 앉아 측근들과 함께 카마 부족의 부족장 케이타의 인사를 받았다.

“카마 부족의 부족장 케이타입니다. 위대한 케르비오 왕국의 새로운 섭정 각하 카로이님께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카로이를 향해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보이는 케이타 부족장은 그다지 마르지도 살찌지도 않은 지극히 평균적인 체격의 중년 남자였다.

다만, 그의 뒤에 대단히 건장한 체격을 한 두 사람이 서 있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무척 왜소해 보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케이타의 왼쪽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우락부락한 근육질 사내로, 케이타 보다 덩치가 한 3배는 되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피부를 터뜨릴 듯 팽팽하게 단련된 전신 근육에서는 가만 있어도 꿈틀꿈틀 약동하는 힘이 느껴졌다.

거기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한데 뒤섞여서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팔다리에도 털이 수북하게 많아서 마치 사람이 아니라 맹수처럼 보였다.

케이타의 오른쪽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여자였는데, 그녀 역시 키가 헌칠하게 크고 팔다리가 두꺼운 근육질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카로이의 막사를 지키는 호위병들 중에도 그녀 보다 체격이 건장하고 근육이 잘 발달된 사내는 없는 듯했다.

옆쪽의 맹수 같은 사내 보다는 외모가 훨씬 수려했고 조금이나마 우아한 여성미도 느껴졌지만, 그래 봤자 어지간한 사내들을 포식자 앞의 사냥감으로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위압적인 모습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두 명의 근육질 남녀가 케이타의 뒤쪽에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은, 지휘 막사 안에 모인 카로이의 측근들에게 상당한 압박감을 주었다.

그들이 모시고 서 있는 부족장의 권위 또한 자연히 높아지는 것 같았다.

“먼 길 오느라고 수고했네, 케이타 부족장. 카마 부족이 이번 전쟁에서 나를 도와주기로 한 건 참으로 현명한 결정이네. 그 공적을 내가 결코 잊지 않을 걸세.”

카로이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는 진작에 크로키로부터 조만간 카마 부족에서 정예 병력이 지원군으로 당도할 것이니 그들이 오면 호의적으로 대해서 확실한 지지 세력으로 만들라는 조언을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케이타 부족장, 이번에 병력과 물자는 어느 정도 가지고 온 거요?”

페르구스가 지휘 막사 안에 있다가 불쑥 물었다. 케이타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병력은 정예 보병 2천명입니다. 또한 짐마차 100대에 식량을, 또 다른 100대에는 의약품 등 기타 군수 물자를 가득 싣고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짐마차를 끌고 오는데 사용된 말 400필과 좋은 전투마 600필 등 도합 1천필을 함께 바치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지휘 막사 안에 있던 카로이의 측근들은 정예 보병 2천명, 마차 200대 분량의 식량과 보급품, 그리고 말 1천필을 바친다는 얘기를 듣고 은근히 놀랐다.

지금까지 그들이 무시했던 추방자 집단의 세력이 이 정도로 강해져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페르구스도 다소 놀라면서 물었다.

“케이타 부족장, 내가 알기로 카마 부족의 인구는 약 1만명 정도라고 들었는데, 거기서 정예 보병 2천명을 징발했다면 건강한 남자들의 씨가 말랐겠군. 안 그렇소?”

케이타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카마 부족의 숫자는 거의 2만명에 달한 지 오래입니다. 방금 말씀하신 1만명은 벌써 20년 전 통계입니다.

하긴, 예나 지금이나, 각 부족은 물론 케르비오 왕국에서도 카마 부족의 정확한 실태를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다들 막연하게 1만명쯤으로 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요.”

“뭐라고? 거의 2만명이나 된다고?”

“그렇습니다. 거기다 험하고 거친 환경에서 살다 보니, 카마 부족에는 남성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으며, 다들 체력이 좋고 고생을 잘 견디는지라 정예병을 육성하기가 다른 부족보다 훨씬 쉽습니다.

원래는 정예 병력 3천명을 이끌고 오고 싶었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카로이님께서 다스리시는 서부 초원지대에 거주하는 카마 부족 사람들로부터 징발한 병력이 아직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며칠 안으로 서부에서 징발한 1천명이 추가로 도착해서 3천명을 채울 겁니다.”

여기까지 듣고, 이번에는 카로이의 사촌동생 파네스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나는 카마 부족이 각 부족에서 공식적으로 추방된 자들뿐만 아니라, 세금이나 징병을 피해 마을을 떠난 유랑민, 전쟁터에서 달아난 탈영병, 다른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도망친 탈주범 등을 닥치는 대로 받아들인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숫자가 그렇게 많이 늘어난 것 아닌가?”

케이타가 태연히 대꾸했다.

“그건 크나큰 오해입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여러 가지 이유로 부족에서 추방된 불쌍한 사람들이, 출신 부족의 보호 없이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돕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집단일 뿐입니다.

저희 부족을 마치 범죄자들의 도피처 같은 집단으로 생각하신다면 그건 카마 부족을 멸시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에 속은 겁니다.”

파네스가 계속 따져 물었다.

“카마 부족과 관련해서는, 초적, 산적, 마적 같은 도적단을 포섭해서 동맹을 맺었다느니, 방비가 허술한 마을에서 부녀자를 납치해서 강제로 부족 남자들의 아내로 삼기도 했다느니 하는 안 좋은 소문이 많이 돌고 있네.

그것도 전부 잘못 알려진 사실이거나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거짓말이란 말인가?

이번에 자네가 이끌고 온 병력 중에도 혹시 도적단 출신이 포함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

“그건 극히 일부 사례가 극도로 과장된 소문으로 퍼져 나간 것에 불과합니다.

카마 부족의 인원수가 늘어나다 보면 당연히 일각에서는 안 좋은 일들도 생길 수 있겠죠.

저는 일부러 병력과 보급품을 가지고 카로이님 휘하에서 싸우기 위해 밤낮으로 달려온 겁니다.

그런데 어느 집단에서나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몇몇 안 좋은 사건들을 확대 해석해서 저를 마치 죄인처럼 심문하시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입니다.”

“난 솔직히 추방자 집단에는 별다른 편견이 없지만, 도적단과 함께 피를 흘리면서 싸울 생각은 없네. 그래서 확인하려는 거야.”

파네스가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크로키가 끼어들었다.

“파네스님, 지금은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고 일손이 많이 필요할 때입니다.

추방자든 도적단이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군 밑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서 공을 세우겠다고 왔으면 공평하게 기회를 주셔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전쟁이 끝나서 여유가 생긴 다음에, 세운 공과 지은 죄를 차근차근 비교해서 상벌을 정하는 게 합리적이고 공정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이쯤 되자 카로이가 끼어들어 파네스를 말렸다.

“파네스, 이제 됐다. 크로키의 말이 옳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아라. 케이타 부족장, 과거는 묻지 않겠다.

앞으로 내 밑에서 충성을 다 한다면, 내가 케르비오 왕국의 새로운 섭정으로서 카마 부족을 정식 부족으로 공인해 주고, 그 부족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지난날 지은 죄를 전부 사면해 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다른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플로젠과 싸워서 전공을 세우는 데에만 집중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케이타는 즉시 머리를 깊이 숙여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방금 그 약속을 지켜주신다면, 저희 카마 부족은 케르비오 왕국의 새로운 섭정 각하께 영원히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섭정 각하라는 말이 아주 듣기 좋군.”

카로이는 흐뭇하게 웃다가 문득 케이타의 뒤쪽에 서 있는 두 명의 남녀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런데 자네와 함께 온 두 사람은 누구인가? 소개 좀 해주게.”

케이타는 얼른 건장한 체격의 남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사람은 제 아내의 남동생, 다시 말해, 제 처남인 카프탄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저희 카마 부족 내에서 가장 체격이 크고 힘이 센 용사입니다.

나중에 파로크 성채를 탈환하는 전투가 벌어지면 기필코 앞장 서서 성벽을 오르겠다고 벼르고 있으니 활약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까부터 줄곧 팔짱을 낀 채 오만한 태도로 서 있던 카프탄은 그제서야 카로이를 향해 살짝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과 맹수 같은 외모에 비하면 마찬가지로 얼굴이 험상궂은 크로키가 차라리 미남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케이타는 이어서 카프탄 옆에 서 있는 근육질의 여자를 소개했다.

“옆에 있는 여자는 카프탄의 아내인 팔라나입니다. 카마 부족에서 가장 뛰어난 여전사입니다.

이들 부부는 제가 가장 신임하는 용사들이며 이번에 공을 세우고 싶다고 해서 데려온 것입니다.”

팔라나 또한 지금껏 무뚝뚝하게 서 있다가 케이타가 자신을 소개한 다음에야 가볍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하하하, 카마 부족에는 역시 인재가 많군. 나중에 페레이즈와 싸우게 되면 활약을 기대하겠다.”

카로이는 적당히 덕담을 해주고 접견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때 아까부터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카르스덴이 불쑥 나섰다.

“잠깐, 케이타 부족장, 혹시 자네의 처남 카프탄에게는 형제가 또 있지 않나?”

케이타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카프탄의 누나는 제 아내이고, 그에게 다른 형제는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보게. 내가 며칠 전에 바로 이곳 진영에서 카프탄과 굉장히 닮은 남자와 한바탕 크게 싸운 적이 있네.

그는 자신이 카마 부족 출신이라고 소리치면서 짐승처럼 사납게 날뛰었고, 결국 내 부하 칼마르의 왼팔을 잘라버리기까지 했지.

그 자가 누구인지 혹시 짐작 가는 바가 없는가?”

“카르스덴 왕자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과 싸웠다면 페레이즈의 부하일 텐데, 카마 부족 출신 중에 페레이즈의 부하가 있을 턱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 자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어내서 대충 떠들어댄 게 분명합니다.”

“정말인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전 방금 말씀하신 그 남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짐작가는 바도 없습니다.”

케이타 부족장이 단호하게 잘라 말하자 카르스덴도 더 이상 추궁할 수가 없었다. 크로키가 짜증스럽게 끼어들었다.

“카르스덴, 카마 부족의 정예 병력은 내가 어렵게 설득해서 아군에 가세하게 만든 거다.

너는 내 공적을 질투해서 엉뚱한 트집을 잡으려는 모양인데, 아무 증거도 없이 막연히 생김새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형제가 있느니 어쩌니 따지는 건 도대체 뭐 하는 짓거리냐?

헛소리 말고 그만 입 닥쳐라. 알았느냐?”

카르스덴은 속으로 분노가 끓었지만, 실제로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더 이상 아무도 할 말이 없으면, 케이타 부족장은 이만 물러가도 좋다. 가서 병사들을 편히 쉬게 하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해라.”

카로이가 명령하자, 크로키가 얼른 말했다.

“주군, 카마 부족을 포섭한 사람은 바로 접니다. 그러니 제가 직접 병사들에게 막사를 배정하고 가져온 식량과 보급품을 접수하는 일을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카로이가 선선히 허락하자, 그 일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케이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카프탄과 팔라나를 데리고 지휘 막사 밖으로 나갔다. 물론 크로키도 함께였다.

지휘 막사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으슥한 장소에 이르자, 케이타는 카프탄과 팔라나에게 주변을 경계하라고 지시한 다음, 크로키를 붙잡고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크로키, 카르스덴이 좀 전에 한 말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카프탄의 형제가 그 자와 싸워서 부하의 팔을 잘라버렸다니?”

“저도 그 싸움 현장에 있었던 게 아니라 제 눈으로 확실히 본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나중에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들어보니, 플로젠의 신임 남부 총독이 페레이즈에게 보내는 명령서를 가지고 온 젊은 여자한테 체격이 건장한 케르비오 출신 노예가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크로키가 얼른 대답했다. 그는 사실 케이타가 틀림없이 자신에게 묻고 싶은 게 많으리라 짐작하고 카로이에게 부탁해서 일부러 따라 나온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족장님은 예전에 막내 처남을 플로젠에 노예로 바친 적이 있었죠? 이름이 쿠스크라고 했던가요?”

크로키는 문득 생각난 듯 덧붙여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