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443화: 아들들의 전쟁 (174)

현재 카로이가 거느리고 있는 병력은 서부 초원지대에서 동원한 정예 기병 5천명과 보병 5천명, 그리고 중부 산악지대에서 추가로 징발한 정예 궁수 5천명, 도합 1만 5천명이었다.

그 외에도 역시 5천명에 가까운 일꾼들이 짐마차를 끌고 가축을 몰면서 수송 부대 역할을 하고 있기도 했다.

이런 대규모의 병력은 현재 케르비오 족 사이에서 카로이의 영향력이 얼마나 엄청난지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언덕 위에서 구경하던 북부 평야지대 사람들은 2만에 가까운 대군이 점점 다가올수록 그 위세에 압도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카를로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많은 병력 가운데, 카로이가 가장 아끼는 5천명의 기병은 유난히 좋은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5천명 중에서도 특히나 신분이 높고 좋은 말을 탄 2천명의 기병은 각자 자신이 속한 부족의 깃발을 자랑스럽게 한 손에 든 채 선발대로 맨 앞에 서서 전체 대열을 인도하는 중이었다.

칼빈 부족의 부족장이자 서부 초원지대의 여러 부족을 다스리는 수장인 카로이 또한 특별히 제작된 화려한 갑옷으로 몸을 감싼 채 아름다운 백마를 타고 선두 대열에 끼어 있었다.

2천명의 기병 모두 좋은 말과 장비를 지니고 있었지만, 카로이의 백마와 갑옷이 너무나 훌륭한 탓에, 언덕 위에서 구경하는 평야지대 사람들은 물론, 파로크 성채에서 바라보던 페레이즈까지도 카로이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카로이는 서부 초원지대를 제패한 수장답지 않게 대단히 수려한 외모를 지닌 미남이었다.

피부는 평생 험한 일이라곤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을 듯 곱디 고왔지만, 눈빛만큼은 수많은 적병을 쓰러뜨린 역전의 용사 이상으로 몹시 날카로워 보였다.

카로이는 사실 선대 부족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원래 같으면 장남인 형의 충실한 보좌관으로 살아가야 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악랄한 음모를 통해 바꾸려 했다.

여러 해 동안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획을 세운 끝에, 형이 사실은 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라 숙부와 어머니가 간통해서 낳은 사생아라는 끔찍한 소문을 날조해서 퍼뜨렸던 것이다.

카로이의 교활한 계략에 따라 그 터무니 없는 모함은 재판에서 뜻밖에 사실로 인정 받았으며, 숙부와 형은 꼼짝 없이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 또한 간통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늙은 아버지인 선대 부족장 역시 그때까지 장남이라고 믿고 있었던 청년이 사실은 부인과 동생이 간통해서 낳은 불륜의 소생이라는 재판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아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순조롭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칼빈 부족의 신임 부족장이 된 카로이는, 우선 자신에게 반대하는 많은 친척들을 숙청하여 권력을 확고하게 했다.

그런 다음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부 초원지대의 부족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굴복시켜 젊은 나이에 초원지대의 수장이라고 불리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선왕인 카라미르가 생전에 케르비오 왕국의 건국과 플로젠과의 전쟁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에도, 카로이는 네필린 공화국을 먼저 쳐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 요청을 거절할 만큼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알고 본다면, 그의 수려한 외모와 고운 피부가 더 이상 만만해 보이지 않을 터였다.

카로이의 바로 뒤쪽에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덕분에 피의 숙청에서 살아남고 중용되기까지 한 2명의 사촌 동생들이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중이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키가 크고 건장해서 마치 남자처럼 보이는 여전사였는데, 카로이에게 숙청 당한 숙부의 딸인 카밀라였다.

카로이의 친사촌 여동생인 그녀는 도끼를 즐겨 사용하는 초원지대 기병들과는 달리 플로젠이나 네필린의 기사들처럼 긴 창을 들고 있었다.

언뜻 생각하면, 카밀라는 자기 친아버지가 형수와 간통해서 사생아를 낳았다는 말도 안 되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억울하게 처형까지 당했으니 사촌 오빠인 카로이를 깊이 원망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아버지를 배신하고 사전에 카로이와 공모하여 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몰래 만나는 걸 목격한 적이 있다고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나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숙청을 면했음은 물론, 지금은 기병 사령관에 임명되어 카로이 휘하의 수많은 정예 기병을 실질적으로 통솔할 만큼 신임 받는 심복이 되어 있었다.

카로이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또 다른 한 명의 사촌 동생은, 콜린 부족의 부족장이자, 카로이의 외숙부의 아들인 파네스라는 청년이었다.

카로이의 외숙부는 그의 누나가 황당한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억울하게 간통죄를 뒤집어 쓴 채 감옥에 갇혔으니 당연히 그 음모를 꾸민 조카에게 크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조카와 맞서던 그는 결국 누나가 간통을 저지르는데 협조했다는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 당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그를 도와 카로이에게 저항한 두 아들도 마찬가지로 숙청을 피하지 못했다.

카로이에게 반발하다가 숙청 당한 사람의 친아들이었으니, 파네스 역시 상식적으로 보면 카로이에게 원한을 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파네스는 카로이와 손을 잡은 덕분에 숙청을 면했음은 물론, 선대 콜린 부족 부족장이었던 그의 아버지 및 계승 서열이 앞섰던 두 형이 모조리 숙청 당한 덕분에 자연스럽게 부족장까지 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는 자신과 묘하게 비슷한 처지이자 공동 운명체가 된 카로이에게 충성을 다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로이는 이렇게 충성스러운 사촌 동생 두 명을 포함하여 2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대열의 선두에 서서 당당하게 행진했다.

기병 선발대의 뒤쪽에서는 5천명의 보병들이 역시 큼직한 깃발들을 높이 치켜든 채 위엄 있게 따라오는 중이었다.

보병을 총지휘하는 사람은 카로이의 심복 부하이자, 키온 부족의 부족장인 카푸스라는 인물로, 키는 작지만 어깨가 떡 벌어지고 건장한 그는 초원지대 부족들 사이에서 작은 거인이라고 불릴 만큼 용맹하고 유능한 보병 사령관이었다.

보병들 뒤쪽으로는 중부 산악지대에서 새로 징발된 5천명의 궁수들이 있었다.

그 궁수들의 명목상 지휘관은 케렌 부족 부족장 클로리안의 아들이자 키오나의 오빠인 칸레이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절반 이상이 카로이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궁수들 다음에는 5천명에 가까운 일꾼들이 식량과 보급 물자가 가득 실린 짐마차, 도살하여 식량으로 쓸 가축, 기병들이 사용할 예비 군마 등을 끌고 수송대 역할을 하면서 따라오는 중이었다.

보병, 궁수, 수송대의 좌우에는 각각 1천명의 기병들이 배치되었고, 대열 최후미에도 역시 1천명의 기병들이 배치되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전투 병력만 1만 5천명, 수송 부대를 포함하면 거의 2만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이 가지런한 대열을 이루어 파로크 성채 옆을 지나 북동쪽 언덕으로 향하는 모습은, 실로 하나의 도시가 통째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언덕 위에서 지켜보던 평야지대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카로이에게 맞설 희망이 없다면서 다들 한탄했다.

심지어 카를로만까지도 저런 대군 앞에서는 케르비오 왕국의 정권을 속절없이 내줄 수밖에 없겠다고 확신하면서 깊은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파로크 성채에 있는 높은 망루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페레이즈 태자는 그들과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그는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카로이의 병력을 한참 동안 관찰하다가, 문득 망원경을 파드무스와 프레데일에게 차례대로 건네주면서 의견을 물었다.

“너희들은 저 병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미 맨눈으로 적 증원군을 자세히 살펴보던 파드무스는, 망원경을 이용해 추가로 조금 더 관찰하고 나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뭐, 돈을 많이 처바른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화려하게 행진해서 어리석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그들의 마음 속에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한 전시용 군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파드무스는 피식 웃으면서 옆에 있는 프레데일에게 망원경을 건네주었다.

“저도 전시용 군대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더더욱 저 화려한 껍데기를 확실하게 박살 내서 그 실체가 얼마나 공허한지를 온 세상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프레데일 역시 잠시 적 병력을 망원경으로 살펴본 다음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 너희들의 말이 다 옳다. 저 군대 자체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하나 실속이 없는 행진용, 전시용 군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지.

다만, 우리는 잘 알지만 평범한 야만족들은 그걸 알 턱이 없다.

아마 대부분의 야만족은 눈으로 보이는 겉모습에 압도되어 카로이에게 심리적으로 굴복하게 될 것이다. 그건 나로서는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다.”

페레이즈 태자가 신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저 전시용 군대를 철저하게 박살내서 카로이의 기세를 꺾을 생각이다.

아군은 카로이 또한 지금까지 우리에게 패배한 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형편없는 작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야만족 사이에 강하게 심어줘야 한다.

카로이와의 협상은 그런 다음에야 차근차근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페레이즈 태자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카로이는 화려한 갑옷 차림으로 좋은 백마에 올라 기병들과 함께 위풍당당하게 행진하여 언덕 바로 아래에 도착했다.

“명령이다. 이곳에 진영을 세워라. 최소한 3만 병력이 여유 있게 주둔할 수 있는 넓은 진영이어야 한다.”

카로이가 그의 좌우에 있는 두 명의 사촌 동생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즉시 친사촌 여동생인 카밀라와 외사촌 동생인 파네스가 큰 소리로 그의 명령을 다른 부하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2만에 가까운 병력은 차례차례 언덕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각자 짐을 내려놓고 신속하게 진영 건설에 착수했다.

병력 숫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언덕 위에 포진하려고 하면 아무래도 공간이 부족하고 여러 모로 불편한 게 많을 듯했다.

따라서 카로이는 대담하게도 언덕 아래 평지에 진영을 세우기로 했던 것이다.

그는 휘하 병력의 숫자는 물론, 사기, 장비, 정예한 등 모든 면에서 자신이 있었고, 기습을 받았을 때 자칫 지키기 어려울 수 있는 평지에 진영을 세우면서도 아무런 근심이 없어 보였다.

카로이가 언덕 아래에 도착한 것을 보자, 언덕 위 진영에 있던 크로키는 페르구스와 함께 서둘러 달려 내려갔다.

“주군, 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미 모든 사전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크로키가 페르구스를 제쳐두고 먼저 나서서 카로이에게 말했다.

“오, 크로키, 정말 수고가 많구나. 그렇지 않아도 어제 네가 보낸 전령으로부터 자세한 보고를 받았다.

아주 잘했다. 덕분에 내가 큰 수고를 덜게 되었구나. 네 공적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카로이가 손짓을 하자 그의 부하 가운데 한 명이 훌륭한 백마 한 마리를 끌고 왔다. 카로이가 지금 타고 있는 백마만은 못해도 상당히 좋은 말이 분명했다.

“이 백마는 내가 예전에 사냥 나온 네필린 놈들을 기습해서 죽이고 노획한 것이다. 너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상으로 하사하겠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일해주길 바란다. 내가 네 공적을 잊지 않고 나중에 반드시 더 큰 상을 내려주겠다.”

크로키는 즉시 머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한 다음 의기양양하게 그 백마에 올라탔다.

“주군, 여러 가지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둘이서만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도 괜찮겠습니까?”

페르구스가 크로키를 못마땅한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두 분께서 긴요한 말씀을 나누실 거라면 언덕 위 진영에 있는 지휘 막사를 쓰십시오.

그 막사는 원래 플로젠의 페레이즈가 쓰던 것인데 제법 넓고 좋습니다.

거기서 전임 케르비오 왕국의 섭정이자, 이제는 카로이님의 용맹한 기병 대장이며, 조만간 충성스러운 처남이 될 카르스덴도 접견하셔야지요.”

크로키가 빙긋 웃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카로이는 즉시 언덕 아래에 진영이 건설될 때까지 언덕 위에 있는 진영 내 지휘 막사에 임시로 머물기로 결정했다.

“카로이님, 산악지대 궁수들은 만약을 대비해서 언덕 중턱에 포진하려고 합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궁수들이 언덕 아래로 지원 사격을 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궁수 5천명을 지휘하여 카로이를 따라온 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카로이도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좋다면서 선선히 허락했다.

비록 자신감에 넘쳐서 언덕 아래에 진영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언덕 위에서 궁수들이 지원 사격을 해주는 것까지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칸레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궁수들과 함께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는 궁수들에게 언덕 중턱에서 대기하면서, 혹시나 플로젠 병력이 파로크 성채에서 뛰쳐나와 진영 공사를 하는 아군을 공격하지 않을지 충분히 경계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 칸레이는 소수의 믿을 만한 부하들과 함께 언덕 위 진영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그가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거의 폐인이 다 되어버린 여동생 키오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