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405화: 아들들의 전쟁 (136)
느닷없이 나타난 정체불명의 케르비오 병사들이 홀로 서 있는 페레이즈를 습격하자, 지켜보던 카를로만과 칼마르가 오히려 더 놀랐다.
“카를로만 왕자님, 저건 앞선 여러 전투에서 사로잡힌 아군 포로들입니다! 제가 얼굴을 아는 병사들도 있습니다.
이 혼란을 틈 타서 갇혀 있던 곳에서 빠져 나온 게 아닐까요?”
칼마르가 다급하게 상황을 살피면서 말했다.
카를로만은 아직 술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데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가 계속 발생하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그는 비록 대단히 영민한 젊은이였지만, 지금은 불행히도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약점이 부각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케르비오 병사들은 복수심에 사로잡혀 페레이즈에게 용감하게 덤벼들었다.
어떤 덩치 큰 사내가 그 병사들을 거의 선동하듯이 지휘하면서 그들의 복수심에 한층 더 불을 붙였다.
어둠 속에서 그 건장한 남자가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누군가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죽여라! 페레이즈를 죽여라! 죽은 형제들의 복수를 하자!”
그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는 멀찌감치서 듣고 있는 카를로만과 칼마르의 가슴 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드는 느낌이었다.
하물며 가까이서 듣는 포로들의 심정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터였다. 그들은 저절로 복수심에 불이 붙어서 허술한 무기를 휘두르면서 혼자 서 있는 페레이즈에게 달려 들었다.
페레이즈는 손에 들고 있던 피리를 느긋하게 갑옷 안으로 밀어 넣은 다음, 달려드는 케르비오 포로들을 맨주먹으로 한 명씩 후려쳐서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에는 여유가 넘쳤고, 건장한 체격에서 발산되는 힘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주먹에 얻어 맞은 병사는 마치 묵직한 철퇴에 얻어 맞은 것처럼 머리가 깨지고 입과 코에서 한꺼번에 피를 뿜어내면서 나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페레이즈는 때때로 주먹으로 후려치는 게 아니라, 덤벼드는 적의 목을 움켜쥐고 목뼈를 으스러뜨리기도 했다.
그의 커다란 손아귀에 한번 목이 붙잡혔다 하면 아무리 건장한 사내라고 해도 순식간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면서 목뼈가 부서진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가 서 있는 주위에는 순식간에 머리가 깨지고 목이 꺾인 포로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쌓였다.
“카를로만 왕자님, 칼마르님, 이대로 계속 구경만 하실 겁니까? 포로들도 저렇게 열심히 싸우는데 우리는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페레이즈가 맨주먹으로 케르비오 포로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눕히는 모습을 보면서, 500명의 병사들 가운데 용감한 자들이 피가 끓는 듯 버럭 소리쳤다.
“어떤가, 카를로만 형제?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리겠나? 여기서 날 잡을지, 아니면 파로크 성채로 돌아갈지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걸세.”
페레이즈는 달려드는 포로들을 계속 맨손으로 쓰러뜨리면서, 태연히 카를로만에게 소리치는 여유까지 보였다.
페레이즈의 비범한 용력에 놀란 케르비오 포로들이 주춤하자, 아까부터 그들을 계속 선동하면서 지휘하고 있던 건장한 사내가 손에 들고 있는 사람 목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겁 먹지 마라! 페레이즈도 한낱 인간일 뿐이다! 이 모가지의 주인처럼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계속 공격해라!”
그 남자가 포로들의 등을 떠밀면서 재촉하자 또다시 몇 명이 페레이즈에게 덤벼들었다가 눈깜짝할 사이에 죽임을 당했다.
“저 자는 누구지? 왜 자기는 싸우지 않고 다른 포로들의 등만 떠밀고 있는 거지?”
카를로만은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왕자님!”
그때 500명의 병사들 가운데 가장 용감하고 성급한 자 수십 명이 카를로만이나 칼마르의 허락도 없이 페레이즈를 향해 달려들었다.
곧이어 그 기세에 휩쓸리듯 500명 가운데 절반 가량의 병사들이 우르르 그들을 따라갔다. 카를로만과 칼마르도 미처 말릴 수가 없었다.
한동안 맨손으로 적 포로들을 상대하던 페레이즈는, 제대로 무장을 갖춘 적 보병이 수백 명 몰려오는 것을 보자 마침내 등에 짊어지고 있던 양손 대검을 뽑아 들었다.
비록 그가 자주 사용하는 도끼창은 아니었지만, 그 대검 또한 실로 묵직하고 위압감이 넘치는 무기였다.
페레이즈가 양손 대검을 힘껏 후려치자 가장 앞장 서서 덤벼들던 케르비오 보병 한 명이 투구와 두개골이 한꺼번에 쪼개지면서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 자의 쪼개진 머리에서 피가 확 쏟아지는 광경을 보자, 도끼창이 없는 걸 보고 그나마 살짝 안심하면서 덤벼들었던 병사들의 기세가 단숨에 확 꺾여 버렸다.
그러자 페레이즈가 거꾸로 과감하게 치고 나가면서 대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페레이즈는 오른손만으로 거침없이 묵직한 대검을 휘두르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적병을 닥치는 대로 베어버렸다.
그 대검의 위력이 워낙 강력해서 평범한 보병들의 가죽 갑옷이나 나무 방패, 쇠 도끼 등으로는 아예 막을 수조차 없었다.
상대방이 한 손으로 휘두르는 대검에 스치기만 해도 갑옷이 쪼개지고 방패가 박살 나며 도끼가 부러지니, 보병들은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이 괴물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 도무지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페레이즈는 오른손으로 대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왼손으로는 아까처럼 맨손으로 적병의 목뼈를 꽉 움켜쥐고 으스러뜨리거나 부러뜨려 버렸다.
대검에 살이 쪼개지거나 맨손에 뼈가 부서진 케르비오 병사들의 시체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어느새 페레이즈 주변에 병사들의 시체가 많이 쌓여서 방벽 비슷한 게 만들어질 지경이었다. 바닥도 병사들이 흘린 피로 인해 검붉은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카를로만 왕자님,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당장 카르스덴 왕자님께 연락해서 이곳 진영을 공격하라고 하십시오.
케르비오 왕국 최고의 전사인 카르스덴 왕자님께서 직접 많은 병력을 이끌고 달려와서 집중 공격을 하신다면, 제아무리 페레이즈라고 해도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코르제가 계속 죽어가는 아군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카를로만이 봐도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칼마르 아저씨, 형님을 부르세요. 약속된 신호가 있을 것 아닙니까?”
칼마르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있던 전령의 등을 떠밀면서 말했다.
“가라! 가서 카르스덴 왕자님께 지금 당장 이곳 진영을 공격해 주십사 하고 청해! 어서!”
명령을 받은 전령은 급히 플로젠 진영 밖으로 달려간 다음, 사전에 약속된 대로 양손에 횃불을 하나씩 들고 서로 엇갈리듯 힘차게 흔들면서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카르스덴 왕자님! 적 진영을 공격해 주십시오!”
카르스덴은 칼마르가 보낸 전령이 횃불 두 개를 흔들면서 달려오는 것을 보자 금방 약속된 신호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언덕 위 불타는 적 진영에서 싸우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긴 했어도, 도저히 대규모 매복 부대가 들고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카르스덴 왕자님! 어서 적 진영을 공격하십시오! 어서요!”
칼마르가 보낸 전령은 요령 있게 함정을 피해가면서 언덕 아래까지 달려와서 다시 크게 소리쳤다.
“대체 무슨 일이냐? 적 진영 안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카르스덴이 묻자, 전령이 숨을 헐떡이면서 대답했다.
“일이 이상하게 꼬였습니다. 매복 부대는 없고, 페레이즈 놈이 혼자 남아서 아군 선발대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 놈이 말하기를, 나머지 플로젠 병력은 파로크 성채를 공격하러 갔다고 합니다.”
“뭐라고? 페레이즈가 진영에 혼자 남아 있고, 나머지 병력은 파로크 성채를 공격하러 갔다고?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카를로만 왕자님와 칼마르님이 어서 적 진영을 공격하시랍니다. 지금이 페레이즈를 죽일 수 있는 기회라면서요.”
카르스덴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어도 얼른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다.
“카르스덴 왕자님, 빨리 결정을 내리십시오. 전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선택지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파로크 성채를 구하러 회군할 것인지. 아니면, 여기 남아 있는 페레이즈를 잡기 위해 돌격할 것인지. 둘 중 하나 아닙니까?"
페르구스가 옆에 있다가 말했다. 카르스덴은 재빨리 최선을 다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페레이즈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사실은 식량과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플로젠 본국으로 철군을 시작한 것일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추격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나머지 병사들을 모두 먼저 철군시킨 다음, 혼자 뒤에 남아서 만용과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카르스덴은 여기서 잠깐 파로크 성채 방향을 힐끔 바라보고 나서 생각을 계속했다.
‘만약 페레이즈가 정말로 전 병력을 시켜 파로크 성채를 공격하게 했다고 해도, 나는 이미 그럴 줄 알고 당초 계획보다 많은 병력을 성채에 남겨 두고 온 상태다.
그 많은 병력이 난공불락의 성채를 단 하룻밤도 지키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지금은 차라리 전력을 다해 페레이즈를 잡는 게 더 낫다. 페레이즈만 잡으면 이 전쟁은 무조건 우리가 이길 테니까.’
카르스덴은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고 도끼를 높이 치켜들면서 소리쳤다.
“자랑스러운 케르비오의 용사들아! 지금 당장 언덕 위 적 진영을 공격해라! 페레이즈를 죽이는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카르스덴이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은 우렁차게 함성을 지르면서 호응했다.
“너는 앞장 서서 아군 병력을 언덕 위까지 안내하도록 해라.”
카르스덴이 명령하자 칼마르의 전갈을 가지고 왔던 전령은 즉시 횃불을 들고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쩌면 좋습니까?”
카르스덴의 병력이 언덕 위로 서둘러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파사엘이 페르구스에게 물었다.
“당황할 것 없다. 이건 모두 사전에 예상했던 그대로야. 내가 기병 절반을 이끌고 카르스덴의 뒤를 따라서 적 진영으로 올라가겠다.
거기서 상황을 봐 가면서 대처할 테니, 자네는 나머지 병력과 함께 부상병들을 보호하면서 언덕 아래에 그냥 남아 있도록 해.
절대로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알았나?”
파사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명령을 받았다.
페르구스는 곧 카르스덴이 지휘하는 병력의 꽁무니를 따르듯이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언덕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언덕 위의 플로젠 진영에서는 페레이즈가 혼자서 양손 대검을 휘두르면서 케르비오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쓰러뜨리는 중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진영 내부에서는 치솟는 불길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온통 적병의 피를 뒤집어 쓴 채 계속해서 일방적인 학살을 벌이는 페레이즈의 모습은 무시무시한 괴물 그 자체였다.
“내가 왔다! 페레이즈는 어디 있느냐?”
마침내 카르스덴이 병력을 이끌고 플로젠 진영 안으로 진입했다.
다만, 이미 불길이 상당히 강해져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병사들은 선뜻 진영 안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출입문 밖에서 머뭇거렸다.
“형님, 페레이즈는 여기 있습니다!”
카를로만이 자기 형의 목소리를 알아 듣고 어둠 속에서 크게 소리쳤다.
카르스덴은 동생의 목소리를 따라 페레이즈가 싸우고 있는 현장까지 급하게 달려왔다.
휘하 병사들은 불길을 두려워하면서 다소 느릿느릿 그 뒤를 따랐다.
“너는 지금 여기서 뭘 머뭇거리고 있는 거냐? 전력을 다해 페레이즈와 싸우든지, 아니면, 빨리 진영 밖으로 나오든지 했어야지!”
카르스덴이 카를로만 곁으로 다가와서 말 위에 올라탄 채 큰 소리로 나무랐다.
그때 풀려난 케르비오 포로들을 선동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던 건장한 남자가 카르스덴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카르스덴 왕자님, 페레이즈가 많이 지쳤습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어서 전력을 다해 공격하십시오!”
그러자 그 사내를 수상하게 여긴 칼마르가 앞을 가로막았다.
“넌 누구냐? 어느 부족 소속이지? 정체를 밝혀라! 왜 아까부터 직접 싸우지 않고 소리만 질러대는 거냐? 저의가 뭐냔 말이다!”
카르스덴은 칼마르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무심코 문제의 남자를 바라보다가 퍼뜩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일전에 길 위에서 잠깐 마주쳤던 카마 부족 출신의 쿠스크라는 남자였다. 사람이라기 보다는 야생 동물에 가까운 그 외모는 도저히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네 놈은?”
카르스덴이 자신을 보면서 놀란 표정을 짓자, 쿠스크는 정체가 들켰다는 걸 깨닫고 즉시 본색을 드러냈다.
그가 다짜고짜 칼마르에게 칼을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내가 어느 부족 소속이냐고? 네 놈들이 지금껏 멸시하고 괴롭힌 카마 부족 출신이다!”
쿠스크가 회심의 일격을 가하긴 했지만, 칼마르도 경험이 풍부한 전사답게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즉시 자신의 칼을 뽑아서 상대방의 칼을 막았다.
문제는 쿠스크의 용력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점이었다. 칼과 칼이 부딪히는 순간, 칼마르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칼을 놓쳐 버렸다.
칼마르가 당황해서 비틀거리는 순간, 쿠스크가 그때까지도 왼손에 들고 있던 사람의 목을 휙 하고 던졌다.
칼마르가 무심코 그걸 받아 들고 보니, 그건 바로 카를로만과 페레이즈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던 가짜 연락관 피브르의 머리였다. 아주 처참하고 끔찍한 몰골이었다.
역전의 용사인 칼마르조차 일순 깜짝 놀라서 그 머리를 내던지고 말았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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