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393화: 아들들의 전쟁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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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이즈가 그만 물러가도 좋다고 말하자, 피브르는 거듭 머리를 조아려 보인 다음 서둘러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키르기트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저런 쓰레기 같은 놈! 태자 전하, 저 자의 간사한 말을 함부로 믿으시면 안 됩니다.
저 교활한 작자는 연극 배우가 되었다면 쓸만한 인재가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울리지 않게 기사가 되는 바람에 그 재능을 사람들을 속이는데 악용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클라티나 아가씨가 저 인간을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라는 것만큼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습니다.”
페레이즈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안다. 비록 확증은 없지만 내가 짐작하건대 저 놈은 오늘 밤에 아군 진영에 불을 지르라는 지시를 받고 그 명령에 따르기로 약속까지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 놓고 나서, 그걸 교묘하게 각색하고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서 의심하기 어렵게 만든 다음, 나한테 중요한 정보랍시고 알려준 거야.
자기 딴에는 행여나 일이 잘못 되더라도 여차하면 우리 플로젠 왕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두려고 한 짓이겠지.”
이 말을 듣고 파드무스가 신중하게 물었다.
“혹시 저 작자가 카를로만과 사전에 의논해서 태자 전하를 기만하려 한 건 아닐까요?
다시 말해, 피브르가 방금 전에 했던 말들이 전부 카를로만이 세운 치밀한 작전의 일환인 건 아닌지 좀 걱정스럽습니다.”
“글쎄. 앞서도 말한 것처럼, 저 자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판단하기에는 확증이 부족하다.
하지만 나는 피브르가 그렇게 중요한 책략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자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렵구나.
카를로만도 아마 그런 사실을 충분히 짐작했을 테니, 저 놈에게 무슨 복잡한 고급 책략의 실행 같은 걸 맡기지는 않았을 거야.
저 자는 그저 생존 본능에 따라 매 순간 즉흥적인 계산에 따라 움직일 뿐인 인간이 아닐까?
즉, 저 놈은 야만족에게 체포되는 순간부터, 나와 카를로만 가운데 어느 쪽에 붙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열심히 저울질하느라 바빴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는 나한테 조카딸을 보내어 화해와 협력을 제안한 크로프트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구나. 과연 그 주인에 그 부하라고나 할까?”
그때 카시우트가 허겁지겁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바람에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태자 전하, 저는 명령하신 바와 같이 망루 위에서 망원경으로 카를로만 일행이 머물고 있는 막사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클라티나가 카를로만을 찾아가서 한참 동안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나오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카시우트는 다급하게 말했지만, 페레이즈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별로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나와 카를로만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신중하게 저울질 하고 있는 사람은 피브르 혼자만이 아닌 것 같구나. 정말 그 주인에 그 부하라니까.”
페레이즈가 반쯤 농담 삼아 중얼거린 반면, 진작부터 클라티나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카시우트는 불쾌한 기색을 숨김 없이 드러냈다.
“클라티나, 그 교활한 여자는 십중팔구 섭정 왕비 전하의 지시를 받고 카를로만을 만나러 갔을 겁니다.
왕비 전하는 태자 전하께서 카를로만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걸 눈치채고, 그걸 어떻게든 훼방 놓기 위해 일부러 그런 지시를 내렸을 테고요.
특히나 클라티나가 대낮에 당당하게 카를로만을 만나러 간 것은 태자 전하께 압박을 가하려는 수작이 분명합니다. 절대로 그런 수작에 넘어가시면 안됩니다.”
카시우트는 자기 누나가 페레이즈 태자의 약혼녀였기 때문에, 은근슬쩍 태자를 유혹하려는 클라티나에 대한 감정이 절대로 좋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페레이즈 태자는 손을 들어 그를 진정시키면서 말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클라티나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거다.
만약 당신이 나의 제안을 끝내 거절한다면, 크로프트도 나도 계속해서 섭정 왕비 전하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꾸미고 있는 모든 일들을 적극적으로 망쳐 놓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잔뜩 공을 들여 가면서 손에 넣으려고 하는 인재인 카를로만조차 왕비 전하께 넘어갈지 모른다.
그게 싫다면 지금이라도 내가 가져온 제안을 받아들여 크로프트와 화해하고 협력해라. 어때? 맞는 것 같지?
보면 볼수록 정말 지독한 아가씨가 아닌가? 피브르가 잔뜩 겁을 집어 먹고 벌벌 떠는 것도 당연해.”
“그럼,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클라티나를 불러다가 막사 한 곳에 감금시켜 놓고 엄중히 감시할까요?”
카시우트가 여전히 불편한 표정으로 물었다. 페레이즈는 고개를 내저었다.
“네 기분은 알지만 일단 가만 둬라. 클라티나가 가서 무슨 말을 했든지, 카를로만은 선뜻 그 말에 따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 친구가 그렇게 포섭하기 쉬운 사람이었다면, 내가 지금 이런 고생을 왜 하고 있겠느냐?
그러니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다.
우리는 오늘밤 다른 건 다 잊어버리고 오직 카르스덴의 기습을 역으로 이용해서 파로크 성채를 빼앗는 일에만 전념해야 하니까 말이다.”
페레이즈는 확실하게 마음을 정한 듯 키르기트에게 명령했다.
“키르기트,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니, 카시우트와 둘이서 협력해서 잘 준비해라.
우선 쓸모 없는 막사 네 군데에 땔감을 가득 채우고 거기다 기름을 뿌려둬라. 작은 불씨만 있어도 활활 타오르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막사들의 위치를 나중에 피브르에게 알려줘서 그 자가 불을 지르기 편하게 해주는 것도 잊지 말아라. 지도라도 그려서 전해주는 게 좋겠다.”
키르기트가 빙긋 웃으면서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저한테 맡기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야만족 궁수들로부터 노획한 화살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으니 그걸 땔감으로 쓰면 되겠습니다. 하하하.”
“그거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그 네 군데의 막사 이외에도, 피브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진영 곳곳에 기름 뿌린 땔감 무더기를 더 준비해 두도록 해라.
나중에 불을 지르면 진영 전체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도록 만들란 말이다.
카르스덴이 기세 좋게 아군 진영에 들어왔다가 불길 속에서 실컷 고생하는 꼴을 상상하면서 작업하면 도움이 될 거다.
우리는 그 틈에 텅 빈 파로크 성채를 빼앗아 그곳으로 옮겨가면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키르기트가 머리를 숙여 명령을 받았다. 페레이즈가 이어서 파드무스와 프레데일에게 말했다.
“파드무스, 프레데일, 너희 두 사람은 저녁 연회에 참가하되,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모든 병력이 진영을 비우고 흩어졌다가 파로크 성채로 다시 집결할 수 있게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두어라.
성채를 앞장 서서 공격할 병력, 부상병들을 안전하게 후송할 병력, 남아 있는 보급품과 군마를 이동시킬 병력으로 나누어 각자 임무를 숙지하게 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까딱 실수하면 모든 게 끝장이니까 말이다.”
파드무스와 프레데일도 군소리 없이 머리를 숙여 명령을 받았다. 페레이즈는 특별히 카시우트에게 당부했다.
“카시우트, 네가 클라티나 때문에 기분이 많이 상해 있는 건 잘 안다. 하지만 난 그 아가씨의 어설픈 유혹 따위에 넘어갈 만큼 바보가 아니니 안심해라.
오늘밤 파로크 성채를 점령하려면 네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다른 잡념은 다 버리고 우리가 사전에 의논한 대로 차질 없이 움직여야 한다. 알겠느냐?”
카시우트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걱정 마시고 마음 놓으십시오. 먼저 키르기트 경을 도와준 다음, 이어서 제가 맡은 일을 확실하게 수행하겠습니다.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페레이즈 태자는 그제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막사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각자 맡은 일을 하러 갔다.
오늘밤은 아주 길고 중요한 밤이 될 터였다.
그러는 동안, 피브르는 페레이즈 태자가 지시한 대로 카를로만이 쉬고 있는 막사를 찾아갔다.
방금 전에 클라티나의 방문을 받았던 카를로만은 이번에는 느닷없이 피브르가 찾아오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피브르, 당신은 여긴 왜 온 거요? 페레이즈가 의심하면 어쩌려고?”
카를로만이 놀라서 묻자, 피브르는 여유 있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카를로만 왕자님 걱정 마십시오. 저는 바로 그 페레이즈가 시켜서 여기 온 겁니다.”
카를로만은 더더욱 황당할 뿐이었다.
“페레이즈가 나를 만나러 가라고 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무슨 일이 있었소?”
“차근차근 말씀 드리겠습니다. 방금 전에 페레이즈가 저를 불러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이것저것 캐물었습니다.
케르비오가 저를 회유하지는 않았느냐, 혹시 그 회유에 넘어가서 무슨 간계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니냐, 카를로만은 진짜로 협상을 하러 온 거냐 등등 아주 자세히 따져 묻지 뭡니까?”
카를로만의 입장에서는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뭐라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소?”
“당연히 아주 잘 대답했지요.”
“잘 대답했다는 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대답했다는 소리요?”
“케르비오의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저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카를로만 왕자님은 아마도 진심으로 협상을 하러 왔을 거라고 잘 대답했단 말입니다.”
피브르가 자신 있게 말하자 카를로만은 조금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 잘 대답했다는 건 알겠소.
하지만 당신을 불러다가 이것저것 캐물은 걸 보니, 페레이즈가 이번 기습 작전에 대해 뭔가 눈치챈 게 아닌가 무척 걱정스럽소.”
카를로만은 막연하게 걱정스러워서 한 소리였지만, 피브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과연 카를로만 왕자님, 대단하십니다. 사실 페레이즈는 이번 기습 작전에 대해 다 알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 대화를 옆에서 들은 사람 같았습니다.”
“아니, 뭐요? 그 얘기를 왜 이제 하는 거요?”
카를로만은 당장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버럭 언성을 높였다. 옆에 있던 칼마르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진정하고 더 들어보십시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저는 이번 기습 작전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습니다.
페레이즈가 케르비오 측에 무슨 간계가 있는 게 아니냐고 열 번도 더 캐물었음에도, 저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완강하게 버텼으니까요.
하지만 페레이즈는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오늘밤이나 내일 새벽에 케르비오 병력이 이곳 진영을 기습할 것 같다고 거의 확신하는 듯했습니다.
물론 제가 진영에 불을 지르기로 되어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그저 카를로만 왕자님이 기회를 봐서 직접 불을 지르면서 내응하지 않을까 추측하는 모양이더군요.”
여기서 칼마르가 답답한 듯 따져 물었다.
“여보시오, 피브르. 당신이 기밀을 누설하지 않았는데 페레이즈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안다는 말이오?”
“그거야 저도 모르지요. 케르비오 내부에 페레이즈의 첩자가 있는 건지, 아니면 페레이즈가 그냥 직감적으로 눈치챈 건지, 제가 그걸 정확히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페레이즈는 카르스덴이 파로크 성채 안에 틀어 박혀 있으면 아주 골치가 아픈데 이곳 진영을 기습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와주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건 기습 작전을 확신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소리가 아닙니까?”
카를로만은 괴롭게 신음했다. 물론 피브르가 전적으로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카르스덴이 플로젠 진영을 기습하기 위해 파로크 성채를 나와 출진하는 것이 페레이즈의 입장에서 큰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피브르, 페레이즈가 그런 말을 당신한테 왜 한 거요? 혹시 그 자가 형님을 잡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라도 했소?”
카를로만이 묻자, 피브르는 감탄을 섞어가면서 재빨리 대답했다.
“역시 현명하시군요. 그렇습니다. 페레이즈가 저한테 빈 막사 몇 군데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했습니다.
사전에 그 막사 안에 땔감을 쌓아두고 기름을 뿌려두겠다는 말도 했지요.
그 거센 불길을 보고 카르스덴 왕자님이 쳐들어오면, 페레이즈는 미리 매복해 있다가 거꾸로 기습을 가해서 그 분을 붙잡을 생각인 겁니다.
페레이즈는 잘 하면 오늘밤에 이 전쟁을 완전히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잔뜩 들떠 있습니다.”
칼마르가 이 대답을 듣고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건 좀 이상하구려. 만약 페레이즈가 카르스덴 왕자님을 유인하고 싶다면 자기 휘하의 믿을 만한 병사를 시켜서 진영에 불을 지르게 하면 될 거요.
그런데 왜 직속 부하도 아니고 잘 알지도 못하는 당신에게 그 중요한 역할을 맡긴단 말이오?”
피브르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면서 대답했다.
“거참, 답답하시군요. 페레이즈의 입장에서는 정확히 언제 자기 진영에 불을 질러야 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카르스덴 왕자님의 병력이 미처 언덕 아래에 배치되기도 전에 불을 질러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렇다고 너무 시간을 끌다가 카를로만 왕자님이 먼저 귀중한 보급품이 쌓여 있는 곳에 불을 질러버려도 곤란할 테고요. 그래서 저한테 맡긴 겁니다.”
칼마르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계속 캐물었다.
“그래서? 페레이즈는 왜 당신이라면 정확한 시간에 적절하게 불을 질러서 카르스덴 왕자님을 유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요?”
- 작가의말
2024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 한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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