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395화: 아들들의 전쟁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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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카를로만과 칼마르가 나름대로 꼼꼼하게 계획을 세웠을 무렵, 피브르도 키르기트를 찾아가서 카를로만이 자신의 말을 믿고 오늘밤 자정에 불을 지르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마침 키르기트는 카시우트와 함께 페레이즈 태자가 명령한 대로 진영 곳곳에 기름을 뿌린 땔감을 준비해 두는 중이었다.
“알았다. 수고했다. 내가 태자 전하께 잘 보고 드리겠다. 그리고 이건 네가 나중에 불을 질러야 할 막사 네 곳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다.
저 놈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매사 조심해서 행동하거라.”
피브르는 진영 지도를 받아 들고는 괜히 주변을 잔뜩 경계하면서 슬금슬금 멀어져 갔다.
그런데 그가 떠나가고 키르기트와 카시우트가 다시 일을 계속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칼마르가 가까이 다가왔다.
키르기트와 함께 있던 카시우트는 칼마르를 보자마자 일순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는 자신을 감쪽같이 속여서 모든 명예를 잃게 만든 칼마르를 여전히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아마도 평생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넌 여기서 뭣 하는 거냐? 왜 얌전히 네 주인과 함께 막사에 틀어 박혀 있지 않는 거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카시우트가 성난 표정으로 소리쳐 물었다. 칼마르는 상대방을 비웃으면서 대꾸했다.
“왜 내가 막사 안에 틀어 박혀 있어야 한다는 말이오?
난 죄인이 아니오. 카를로만 왕자님을 모시고 당신네 태자와 평화 협상을 하러 온 사절단의 일원이란 말이오.
여기서 죄인이 있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일 것이오.”
“뭐가 어쩌고 어째?”
상대방이 노골적으로 싸우자는 듯한 태도로 나오자 카시우트는 한층 더 분노했다. 칼마르는 여전히 조롱 섞인 말투로 대꾸했다.
“벌써 다 잊었소? 당신은 지난 번에 거느리고 있던 부하를 모조리 잃고 속옷 바람으로 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나는 치욕을 겪지 않았소?
그게 불과 얼마 전 일인데, 벌써 아주 신수가 훤해 보이는구려.
태자의 처남이 될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중용되다니, 플로젠의 군법이 얼마나 허술하고 당신네 태자가 얼마나 불공정한지 잘 알 것 같소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키르기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뻔한 도발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적국의 진영에 사절단으로 왔으면 누가 일부러 시비를 걸어오더라도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꾹 참고 넘어가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칼마르는 오히려 시비를 걸지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도 아니고, 경험이 풍부한 중년의 용사가 어린애처럼 싸움을 걸고 있으니, 마찬가지로 경험이 풍부한 기사인 키르기트의 눈에는 당연히 수상해 보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죽일 놈! 감히 플로젠 왕국과 태자 전하를 모욕해?”
그런데 평소 똑똑하던 카시우트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그 도발에 걸려들었다.
카시우트가 다짜고짜 칼마르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걸 보자 키르기트는 대경실색했다.
칼마르의 입장에서도 도발이 너무 쉽게 성공하는 바람에 살짝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카시우트에게 싸움을 걸기 위해 여러 가지 대사를 준비해 왔는데, 그런 대사를 거의 쓸 필요가 없었다.
“야, 이놈아! 나는 사절단의 일원이야! 감히 누구를 때리는 거냐?”
칼마르는 속으로 기뻐하면서 카시우트에게 달려들어 험악하게 멱살을 잡았다.
두 사람은 예전에 불타는 진영 내에서 치열하게 맞붙어 싸웠을 때처럼 다시 한번 격렬하게 몸싸움을 시작했다. 키르기트는 깜짝 놀라서 그들을 뜯어 말렸다.
“두 사람 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키르기트가 안간힘을 써서 둘을 말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카시우트와 칼마르 모두 약골이 아닌지라 혼자서 말리는 게 그다지 쉽지 않았다.
그들 주변에는 곧 싸움을 구경하려는 병사들이 모여들었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많은 병사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카시우트와 칼마르는 서로 죽기 살기로 뒤엉켜 싸웠다.
카시우트는 당연히 진심으로 칼마르를 때려 죽이고 싶었다.
칼마르도 처음에는 상대방을 도발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감정이 격해져서 진심으로 싸우게 되었다.
두 사람의 기세가 너무나 험악하고 흉흉하다 보니, 키르기트가 싸움을 말리지 못해 쩔쩔 매는 걸 보면서도 주변에서 아무도 감히 도와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고 있을 때, 한 거구의 사내가 둘러서서 구경하는 병사들을 헤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바로 클라티나가 데려온 노예이자 케르비오 족의 추방자들로 구성된 카마 부족에 속한 쿠스크였다.
그 사내는 얼굴이 짐승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긴데다가 덩치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남자였기 때문에, 키르기트 조차 그가 다가오자 기세에 눌려서 저절로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둘 다 싸움을 멈추십시오.”
쿠스크는 태연하게 카시우트와 칼마르의 사이에 끼어들더니,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 두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떼어 놓았다.
갑작스러운 방해꾼에 의해 어이없이 제압당하자, 그들 둘은 깜짝 놀라서 버둥거리는가 하면 고래고래 소리치기도 했다.
“이거 놔! 당장 놓으라고!”
카시우트는 쿠스크의 왼손에, 칼마르는 오른손에 붙잡혔는데, 마치 힘센 장사 여러 명에게 붙잡힌 것처럼 아예 꼼짝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절대로 힘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쿠스크의 용력은 그들 둘을 합친 것 보다 더 센 듯했다.
결국 카시우트와 칼마르는 무의미한 반항을 포기하고 얌전히 몸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쿠스크도 두 사람을 놓아주면서 각각 반대 방향으로 거칠게 떠밀어 버렸다.
그들 둘이 억센 힘에 밀려 바닥에 나가 자빠지는 것을 보고, 구경하던 병사들이 놀라서 탄성을 질렀다.
“태자 전하께서 오셨다! 모두들 물러서라! 어서!”
그때 파드무스가 크게 소리쳐서 웅성거리는 병사들을 물러나게 했다.
실제로 페레이즈 태자가 파드무스와 함께 싸움 현장에 나타난 것을 보자, 병사들은 흠칫 하면서 급히 머리를 숙이고 길을 만들어 주었다.
곧이어 카를로만도 크리겔과 코르제를 데리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여기서 무슨 소란이 일어난 건가?”
파드무스가 페레이즈를 대신하여 큰 소리로 따져 물었다.
카시우트는 얼굴에 심하게 멍이 들었고 입술이 터졌으며, 옷이 다 찢어져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씨근거릴 뿐 얼른 대답을 못했다.
“키르기트, 말해 봐라.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러자 페레이즈가 직접 키르기트에게 물었다. 키르기트는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싸움이 있었습니다. 카를로만 왕자를 따라온 사절단의 일원인 저 자와 카시우트 사이에 시비가 붙었던 겁니다.”
그제서야 카시우트가 언성을 높여 항변했다.
“저 사악하고 교활한 작자가 저를 비롯해서 플로젠 왕국과 태자 전하를 모욕했습니다. 그래서······”
페레이즈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카시우트에게 물었다.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이것만 말해 봐라. 누가 먼저 손찌검을 했느냐? 너냐?”
카시우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제가 먼저 때렸습니다. 하지만 그건······”
페레이즈가 손을 들어 카시우트의 말을 엄하게 막았다.
“네가 상대방을 먼저 때렸다면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양국의 엄숙한 합의에 따라 정식으로 평화 협상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네가 감히 사절단의 일원을 때렸으니 이는 절대로 가벼운 죄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사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꾹 참으라고 명령하지 않았느냐? 내 지시를 어겼으니 더더욱 중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키르기트, 네가 직접 카시우트를 끌고 가서 일단 막사에 가둬 놓아라. 나중에 엄히 처벌하겠다.”
키르기트는 즉시 머리를 숙여 명령을 받았다.
그는 절망과 후회 때문에 풀이 죽고 표정이 어두워진 카시우트의 등을 떠밀면서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잠시 지켜보고 있던 카를로만이 다가와서 말했다.
“태자 전하, 공정한 처분에 감사 드립니다. 저 또한 칼마르를 대신하여 사과 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제 부하 가운데 한 명이 복통을 일으키는 바람에, 제가 칼마르에게 나가서 더운 물이라도 구해 오라고 했던 거였습니다.
그런데 설마 이런 사단이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페레이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카시우트가 먼저 손찌검을 한 것이니 자네는 사과할 필요가 전혀 없네. 그보다 자네 부하가 복통을 일으켰다면, 내가 아군 군의관에게 가서 봐 주라고 하지.”
카를로만이 정중하게 사양했다.
“아닙니다. 그저 사소한 복통일 뿐입니다. 태자 전하의 부하들 가운데에도 부상자가 많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바쁜 군의관에게 일거리를 늘려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태자 전하께서 카시우트에게 엄한 처분을 내리셨으니 저도 가만 있을 수는 없고 상응한 조치를 해야겠지요.
저 또한 소란을 일으킨 칼마르를 파로크 성채로 돌려보내서 처벌을 받게 하겠습니다. 그래야 제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 같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래야 자네가 편하다면 마음대로 하게.”
페레이즈가 선선히 동의하자, 카를로만은 칼마르에게 눈짓을 하면서 말했다.
“칼마르, 어서 태자 전하께 사과하시오. 그리고 지금 당장 파로크 성채로 돌아가서 형님께 사정을 설명 드리고 죄를 청하도록 하시오.”
칼마르는 짐짓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페레이즈 태자에게 머리를 숙여 보인 다음, 기운 없이 축 늘어진 모습으로 진영 출입문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봐라, 저 칼마르라는 자를 안전하게 언덕 아래까지 안내해 줘라. 그리고 카를로만 왕자의 막사로 더운 물과 복통약을 가져다 주도록 해라.”
페레이즈 태자가 명령했다. 카를로만은 가볍게 머리를 숙여서 감사 인사를 했다.
“태자 전하의 배려에 감사 드립니다. 저는 이만 막사로 돌아가서 저녁 연회를 기다리겠습니다.”
부하들과 함께 막사로 돌아가기 전에, 카를로만은 그때까지도 팔짱을 낀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쿠스크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 사내의 건장한 체격과 험상궂은 외모는 카를로만 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움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카를로만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맹수에 가깝게 생긴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기 막사로 돌아갔다.
카를로만이 현장을 떠나자, 멀리서 구경하고 있던 클라티나가 웃으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태자 전하께서는 과연 일 처리가 공정하시군요. 감동했습니다.”
페레이즈는 쿠스크를 가리키면서 클라티나에게 말했다.
“싸움을 말려줘서 고맙소. 그런데 아가씨가 데려온 이 자는 힘이 정말 장사인 것 같소.
카시우트는 물론이고, 칼마르라는 자도 결코 약골이 아닌데, 그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는 걸 손쉽게 뜯어 말렸으니 말이오.”
클라티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봤자 태자 전하의 용력에는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마음 푹 놓으십시오.”
클라티나의 말에는 어쩐지 뼈가 있는 것 같았다. 페레이즈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나는 이 자의 용력은 전혀 걱정하지 않소. 내가 진짜 걱정하는 건 당신의 언행이오.”
클라티나가 빙긋 웃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제가 아까 카를로만의 막사를 찾아간 일이 걱정되신다면 전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제 백부님과 화해하고 앞으로 잘 지내기로 약속만 해주신다면, 제가 카를로만에게 한 말들은 전부 의미를 잃게 될 겁니다.
물론 전하께서 제 백부님의 제안을 끝내 거부하고 우리가 영원한 적으로 남게 된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지겠지만요.”
페레이즈는 아직도 주변에 구경하는 병사들이 남아 있는 걸 보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여기는 그런 얘기를 나누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 같소. 나중에 내 막사로 찾아오시오. 거기서 다시 진지하게 의논해 봅시다.”
클라티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페레이즈는 파드무스와 함께 자기 막사로 돌아갔고, 여전히 남아서 구경하던 병사들은 백부장들이 나서서 큰 소리로 꾸짖은 다음에야 각자 맡은 바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페레이즈 태자가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자, 그 막사 안에는 이미 키르기트가 카시우트를 데리고 와 있었다.
카시우트는 페레이즈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얼른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키르기트, 내 말을 잘 알아들었구나. 잘했다.”
페레이즈가 키르기트를 칭찬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키르기트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당연히 금방 알아 들었지요. 제가 태자 전하와 함께 싸운 게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그래서 이 친구를 데리고 전하의 막사로 와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페레이즈는 이어서 카시우트를 바라보면서 가볍게 나무랐다.
“카시우트, 너처럼 똑똑한 친구가 그 칼마르라는 자의 도발에 왜 그렇게 쉽게 걸려든 거냐?”
여전히 얼굴에 멍 자국이 선명한 카시우트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그냥 그 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 속이 터질 것 같고 눈이 뒤집혀 버렸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제 자신을 전혀 통제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무슨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페레이즈가 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카시우트, 전쟁터에 여러 번 나가다 보면 재수가 없어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실수를 저질렀다는 자체 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실수가 마음의 짐으로 남아서 자꾸만 올바른 판단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야.
이런 식으로 칼마르라는 자의 얼굴을 볼 때마다 계속 과거의 실수가 생각나서 이성을 잃고 날뛰게 된다면, 네가 앞으로 어떻게 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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