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406화: 아들들의 전쟁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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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빈틈을 노려서 칼마르의 코앞에까지 접근한 쿠스크는 무서운 기세로 칼을 휘둘렀다.
경험 많은 칼마르도 피브르의 잘린 머리에 신경 쓰느라 그만 그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깜빡 놓쳐 버렸다.
그는 다급한 김에 왼손을 들어 날아오는 칼날을 막았다. 당연히 그 무서운 일격을 사람의 뼈와 살이 막아낼 수는 없었다.
가죽 팔 보호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칼마르의 왼팔은 전완부 중간에서 깨끗이 잘려 나가고 말았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목이 잘리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판이었다.
칼마르의 왼팔에서는 당장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면서 크게 짧아진 왼팔을 움켜쥔 채 비틀거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다들 너무 놀란 나머지 몸이 굳고 머릿속이 텅 비어서 재빨리 반응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카르스덴! 우리 부족을 박해한 원수! 죽어라!”
쿠스크는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맹수처럼 돌진해서 카르스덴이 타고 있던 말을 어깨로 들이 받아 버렸다.
그건 마치 공성추가 성문을 때린 것처럼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카르스덴이 타고 있던 말은 상당히 자질이 뛰어나고 훈련도 잘 된 일급 전투마였지만, 쿠스크가 전력을 다해 들이 받자 큰 충격을 받고 놀라서 길길이 날뛰었다.
말의 입장에서 보면 쓰러지지 않고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 대신, 등에 타고 있던 카르스덴이 아차 하는 순간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쿠스크는 기다렸다는 듯 살기를 띠고 넙적한 도축용 칼을 맹렬히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아예 숨통을 끊어 놓을 듯한 기세였다.
이러다간 카르스덴이 페레이즈나 플로젠 기사가 아니라 뜬금없이 추방자 출신 낯선 사내의 손에 가축처럼 도살될 판국이었다.
그 아슬아슬한 순간, 놀랍게도 동생인 카를로만이 용감하게 장검을 뽑아 들고 자기 형을 보호하려고 나섰다.
최근 형제간의 갈등이 무척 심각했음에도 위급한 순간이 되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던 것이다.
카를로만도 결코 허약한 젊은이가 아니었지만, 쿠스크의 무시무시한 용력에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상대방이 내리친 칼을 한번 대충 막았을 뿐인데도 카를로만이 들고 있던 호신용 장검이 장난감처럼 뚝 부러져 버렸다.
곧이어 쿠스크가 가슴팍을 힘껏 걷어차자, 자세가 무너진 젊은 왕자는 흉곽이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을 받으면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카를로만 왕자님!”
카를로만이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는 모습을 보자, 옆에 있던 크리겔이 깜짝 놀라면서 불쑥 용기를 냈다.
그는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 쿠스크의 두꺼운 허리를 붙잡고 악착같이 매달렸다.
“넌 또 뭐냐? 방해하지 마라!”
쿠스크는 짜증스럽게 몸을 틀어 크리겔의 머리카락을 왼손으로 거칠게 휘어잡더니, 억센 힘으로 그 젊은이를 자기 허리에서 손쉽게 떼어냈다.
이어서 그는 상대방의 머리를 난폭하게 뒤로 젖혀서 목이 무방비 상태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 순간 카를로만은 곧 끔찍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자기도 모르게 크리겔을 향해 허우적거리듯 손을 내밀었다.
곧이어 쿠스크는 인정사정 없이 크리겔의 목을 오른손에 든 넙적한 칼로 힘껏 후려쳤다.
코엔 부족 부족장의 서자로 얼떨결에 전쟁에 참전했던 그 용감한 젊은이는, 경악한 표정 그대로 얼굴이 굳은 채 숨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그의 머리는 몸통에서 깨끗이 분리되어 쿠스크의 왼손에 남았으며, 머리를 잃어버린 몸통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실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크리겔!”
카를로만이 비통하게 소리치자, 쿠스크는 왼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크리겔의 머리를 마치 조롱하듯 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그의 용력과 무자비한 모습은 평생 전쟁터에서 거칠게 살아온 케르비오의 전사들조차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더러운 추방자 놈 같으니!”
그새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카르스덴은 문자 그대로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며 쿠스크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쿠스크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즉시 칼을 휘둘러 맞서 싸웠다.
쿠스크의 칼과 카르스덴의 도끼가 거세게 격돌할 때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섬뜩한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둘 다 괴물 같은 힘을 자랑했기 때문에 칼날과 도끼날이 서로 접촉할 때마다 어둠을 찢고 붉은 불꽃이 뿜어져 나올 정도였다.
카르스덴은 몇 번 칼과 도끼가 맞부딪히자마자, 추방자 출신의 이 난폭한 사내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용력을 지녔음을 실감하고 몹시 놀랐다.
그는 소년 시절 이후 줄곧 케르비오 왕국 최고의 전사로 손꼽혔으며, 개인적인 무력으로는 지금껏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밀려본 적이 없었다.
역시 용맹하기로 유명했던 그의 아버지 또한 장남이 모든 면에서 자기 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전사라면서 언제나 자랑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런데 상대방의 괴물 같은 힘은 그가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수준이었다.
카르스덴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음을 직감하고 한층 더 정신을 집중해서 쿠스크와 맞서 싸웠다.
주변에서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불길도, 오늘밤 작전이 실패했다는 사실도 전부 다 잊은 채 오직 싸움에만 전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카르스덴 역시 한 순간에 칼마르나 크리겔처럼 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카르스덴과 쿠스크는 불타는 플로젠 진영을 무대로 삼아 원수처럼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감히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만, 그 와중에서도 코르제는 누구 보다 먼저 냉정을 되찾고 급히 칼마르의 잘린 왼팔을 단단히 묶어서 지혈을 해주었다.
“제법이로구나.”
한바탕 치열하게 싸우고 나자 쿠스크 또한 카르스덴의 힘이 만만치 않음을 인정하면서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카르스덴 못지 않게 그도 은근히 놀라면서 긴장하고 있었다. 이 맹수 같은 사내 또한 태어나서 단 한번도 이토록 강한 상대와 싸워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카르스덴의 부하 병사들이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딱히 두렵지 않았지만, 수천 명이 한꺼번에 덤벼든다면 쓸데없이 여기서 목숨을 잃게 될 터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 말에서 떨어졌을 때 기습적으로 카르스덴을 죽이지 못한 이상, 오늘 이 자리에서 그를 죽일 가능성은 실질적으로 사라졌다고 봐야 옳을지도 몰랐다.
“칼마르 아저씨······ 크리겔······ 다 내 잘못이다. 내가 주제 넘게 이런 무모한 기습 작전을 구상하는 바람에 일이 이 지경으로 망가진 거야.
그냥 얌전히 카로이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좋은 방법을 찾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두 사람 모두 무사했을 텐데.”
카를로만은 자기 형이 쿠스크와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했다.
서로 분리된 채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는 크리겔의 머리와 몸통, 칼마르의 잘린 왼팔,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의 흔적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는 검붉은 핏물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그 처참한 광경이 그의 마음을 한층 더 깊은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카를로만 왕자님,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지금은 한가롭게 절망할 때가 아닙니다!
형님께서 저 추방자 놈과 싸우느라 바쁘시다면 마땅히 왕자님께서 대신 지휘를 하셔야지요.”
왼팔이 잘린 칼마르가 고통을 참으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실제로 주변에서는 불타는 진영 안으로 꾸역꾸역 진입한 케르비오 병사들이 통제를 잃고 우왕좌왕 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카르스덴과 쿠스크의 무서운 대결에 감히 끼어들 엄두도 낼 수 없었고, 여전히 대검을 휘두르면서 적병을 베고 있는 페레이즈에게 앞장 서서 덤벼들 자신 또한 없는 듯했다.
다시 말해, 수천 명의 병사들이 그냥 지나가던 구경꾼이나 다름 없는 신세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카를로만 왕자님, 오늘밤 작전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여기서 손을 놓아버리시면 안 됩니다.
작전 실패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도 지휘관의 책임이 아닙니까? 어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칼마르의 왼팔을 단단히 묶어서 지혈을 한 코르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제서야 카를로만도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여전히 둘 중 하나였다. 여기서 계속 싸워서 페레이즈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진영을 빠져나가 파로크 성채로 돌아갈 것인가?
만약 페레이즈가 적당히 싸우다가 슬그머니 불타는 자기 진영에서 탈출했다면, 카를로만도 전혀 망설이지 않고 파로크 성채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페레이즈는 불길이 점점 거세지는 와중에서도 불 타 죽는 것 따위는 전혀 겁나지 않는다는 듯, 이리저리 날렵하게 움직이면서 갈팡질팡하는 케르비오 보병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기에 바빴다.
“코르제, 네 임의로 병사 50명을 골라서 칼마르 아저씨와 크리겔의 시체, 그리고 술에 취한 내 직속 부하들을 데리고 진영 밖으로 먼저 탈출해라.
난 여기 남아서 조금 더 싸워 보겠다.”
카를로만이 정신을 가다듬고 명령을 내렸다.
코르제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주변에 멍하니 서 있는 보병들 가운데 50명을 골라서 카를로만 왕자님의 뜻이니 자기 지시를 따르라고 단호하게 말함으로써 재빨리 그들을 자기 지휘하에 넣었다..
코르제는 그 50명과 함께 부상 당한 칼마르, 크리겔의 분리된 머리와 몸통, 술에 취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카를로만의 직속 부하들을 수습하여 플로젠 진영 출입문 쪽으로 신속하게 달려갔다.
카를로만은 그 빠르고 정확한 일 처리를 보면서 새삼 코르제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병들은 뭣 하느냐? 어서 형님 주변을 둘러싸고 저 더러운 추방자 놈이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해라! 어서!”
카를로만이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잠시 구경꾼이 되어버렸던 케르비오 보병들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통제가 필요한 건 보병들뿐만이 아니었다.
“기병 가운데 말이 겁먹은 자들은 당장 진영 밖으로 나가라. 그리고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말을 탄 자들은 페레이즈를 집중적으로 노려라!”
카를로만은 이어서 기병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그제서야 기병들 또한 정신을 바싹 차리고 페레이즈를 향해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페레이즈 태자가 지금까지 혼자서 적병의 시체가 주변 바닥에 즐비하도록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타고난 괴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우왕좌왕 하는 적 보병을 각개격파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케르비오 보병들은 쿠스크를 포위하고, 기병들은 페레이즈에게 덤벼드는 식으로 어느 정도 군기와 통제가 회복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페레이즈는 가장 먼저 달려드는 적 기병 한 명이 내지른 창을 슬쩍 피한 다음, 왼손으로 그 창을 붙잡고 힘껏 잡아 당겼다.
그의 엄청난 힘을 감당하지 못한 케르비오 기병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페레이즈는 오른손에 든 대검으로 그 자를 단숨에 두 토막으로 쪼개 버렸다.
곧이어 덤벼든 두 번째 기병은 대검 손잡이를 양손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말 다리를 후려쳐 간단히 처리했다.
이런 방식으로 페레이즈는 적 기병 여러 명을 도보 상태에서 손쉽게 처리했지만, 그렇게 계속 버티면서 무모하게 위험을 감수하는 건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케르비오 보병들에게 포위된 채 카르스덴과 아슬아슬하게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쿠스크 역시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저 야수 같은 사내도 지금 당장은 페레이즈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중이 아닌가?
자기 부하가 아니라고 해도 행여나 잘못되게 내버려두는 건 영 뒷맛이 개운하지 못한 일이었다.
페레이즈는 마침내 이 불타는 진영과 작별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쯤이면 파로크 성채로 몰려간 휘하 병사들이 무슨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리라는 기대감도 들고 있었다.
그는 결심을 굳히자, 계속해서 덤벼든 케르비오 기병 둘의 허벅지를 각각 신속하게 대검으로 베어 낙마시켰다.
페레이즈는 낙마한 적 기병들을 향해 재차 대검을 휘둘러 둘 다 죽여버린 다음, 주인을 잃은 말 한 필에 훌쩍 올라탔다.
그리고 나머지 한 필은 왼손으로 고삐를 잡아 끌면서 쿠스크를 포위한 케르비오 보병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돌진했다.
페레이즈가 오른손을 대검을 휘두르면서 거침없이 돌진하자, 케르비오 보병들로서는 그 기세를 막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
당장 보병 몇 명이 페레이즈의 대검에 찍혀 목숨을 잃었고, 아직 불완전했던 포위망은 어이 없을 만큼 간단히 흩어져 버렸다.
페레이즈는 카르스덴과 쿠스크, 두 괴력의 사나이들이 맞붙어 싸우는 틈새로 과감하게 뛰어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쿠스크, 그만 떠나자. 어서!”
페레이즈는 그냥 말뿐만이 아니라 대검을 휘둘러 카르스덴이 전력을 다해 내리친 도끼를 가볍게 튕겨내 버리기까지 했다.
쿠스크에게 치열한 접전에서 몸을 뺄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것이었다.
쿠스크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가 느닷없이 페레이즈의 방해를 받은 카르스덴은 흠칫 놀라면서 뒤로 물러났다.
사실 카르스덴이 페레이즈와 직접 무기를 맞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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