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473화: 아들들의 전쟁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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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티나는 카로이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만약 파로크 성채를 두고 전면적인 공방전이 벌어진다면, 저 들판에 있는 오합지졸 가운데 최소한 절반은 그날 안으로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성벽 아래에는 무모하게 돌격하다가 전사한 병사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겠지요.
태자 전하께서 굳이 이번 정략 결혼을 제안한 이유는, 어리석은 지배자의 과욕 때문에 허무하게 죽어갈 노인과 어린애들을 불쌍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휘하 병사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제발 이번 정략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클라티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아, 물론 애당초 저 들판에 모여 있는 수만 명의 병사들을 최대한 많이 죽게 만드는 게 원래 목적이라면 문제는 다르겠지만요.”
카로이는 아픈 곳을 찔린 듯 책상을 탕 치고 화를 벌컥 내면서 소리쳤다.
“닥쳐라! 너는 여기 협상을 하러 온 것이냐? 아니면, 싸움을 도발하려고 온 것이냐?”
측근들이 보기에도 카로이가 이토록 언성을 높여 화를 내는 건 무척 드문 일이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현실을 깨우쳐 주려고 왔을 뿐입니다. 당신네는 힘으로는 결코 태자 전하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기 전에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덜 불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태도가 아닐까요?
카란드라와 카시우트 경의 정략 결혼은 태자 전하께서 당신네의 처지를 최대한 배려해서 제안한 것이니,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신중하게 고려해 보셔야 할 겁니다.”
“그런 황당한 정략 결혼 따위는 아예 거론할 가치도 없다! 카란드라는 내 약혼녀이다. 세상에 그 어떤 남자가 자기 약혼녀를 제물로 바쳐서 평화를 구걸한단 말이냐?
그건 케르비오 왕국의 섭정으로서뿐만 아니라, 한 남자로서도 평생 씻을 수 없는 큰 수치가 될 것이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겠다.”
카로이의 태도는 무척 완강했지만 클라티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평범한 남자라면 몰라도, 케르비오의 섭정이라면 오히려 더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뭐라고?”
“평범한 남자라면 평생 자신의 자존심과 욕심만 챙기면서 이기적으로 살아도 딱히 나무랄 사람 없습니다. 하지만 일국의 지도자는 그렇게 하면 안 되죠.
평범한 남자가 자기 한 목숨 살자고 사랑하는 아내를 포기한다면 수치스러운 일이 될지 몰라도, 일국의 지도자가 많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소중한 사람을 포기한다면 역사에 길이 미담으로 남게 될 겁니다.
다시 말해, 남자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니 못하겠다고 딱 잘라 말하는 건, 결국 당신에게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헛소리 집어 치워라! 무엇보다 카란드라님 본인이 이 결혼을 원하지 않고 있단 말이다.”
“거참, 이 세상에 정략 결혼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여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 것 같아요?
정략 결혼이란 건, 안 할 수만 있다면 안 하고 싶은 게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카란드라님 본인으로서는 당연히 이 정략 결혼이 전혀 달갑지 않겠죠.
그런데 제가 따로 얘기를 나눠보니, 사실 그 분은 카로이님과의 정략 결혼도 내키지 않았지만 대국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정략 결혼이란 원래 다 그런 것이니,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략 결혼을 무조건 기각하는 건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클라티나의 말솜씨는 상당히 능수능란하고 교묘했다. 영리한 카로이조차도 쉽게 언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카로이님, 만약 카란드라님이 당신과의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을 바꾼다면 그 즉시 약혼을 취소할 건가요?”
“그건······”
카로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카를로만이 나서서 말했다.
“이 세상에 정략 결혼을 좋아하는 여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느냐는 말에는 일리가 없지 않지만, 카시우트와 누님의 정략 결혼은 경우가 완전히 다르오.”
“그래요? 뭐가 어떻게 다른데요?”
카를로만이 방금 전에 자신이 읽어준 카란드라의 사적인 서신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누님이 이 편지에서 이번 정략 결혼은 아군 진영을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간계이니 절대로 넘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소?
우리는 이런 뻔한 계략에 넘어갈 만큼 어리석지 않단 말이오.”
클라티나는 이미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것 또한 카란드라님이 개인적으로 이번 정략 결혼이 달갑지 않은 탓에 감정을 실어서 내뱉은 말에 불과합니다. 뭐, 그 심정은 저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해요.
포로로 붙잡힌 것도 억울한데, 갑자기 낯선 이국 남자와 정략 결혼을 하라고 하니, 태자 전하께서 아무리 정중하게 사정을 설명하신다 한들 영 내키지 않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래서 편지에 그런 말을 적어 놓은 걸 테고요.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적어도 태자 전하께서는 진심으로 양국의 평화와 우호를 위해 카란드라님을, 더 나아가 카르스덴 왕자와 카를로만 왕자를 인척으로 맞이하고 싶어 하신다는 점을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간계를 부리려고 했다면, 카란드라님의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이런 편지를 검열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겠습니까?
이 편지야말로 오히려 이번 정략 결혼이 계략이 아니라 진심임을 보여주는 방증입니다.”
클라티나는 카를로만 뿐만 아니라 막사 안의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힘주어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는 예전부터 플로젠과 케르비오가 형제의 나라가 되어 힘을 합쳐 주변의 적국을 토벌하자는 주장을 일관성 있게 해오셨습니다. 그건 여기 계신 분들께서도 다 아시겠지요?
이번 정략 결혼도 그런 일관된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일 뿐 결코 간사한 계략 따위가 아닙니다.
평소 그런 주장을 전혀 하지 않던 사람이 뜬금 없이 정략 결혼이니 인척이 되자느니 하는 얘기를 꺼냈다면 당연히 의심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번 경우는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자 카르스덴이 지극히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닥쳐라! 페레이즈와 인척이 된다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건 아마 페레이즈도 원하지 않을 터. 그 놈은 진작부터 날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었단 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를 어떻게든 죽이려 애쓰던 놈이 오늘 갑자기 나와 한 집안 식구가 되고 싶다고 손을 내민다면, 그게 계략이 아니고 도대체 뭐란 말이냐?”
클라티나가 픽 웃으면서 대답했다.
“카르스덴 왕자님, 태자 전하께서 당신을 어떻게든 죽이고 싶어 한다는 확신 자체가 완전히 틀렸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진정으로 당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요.
멀리 갈 것도 없군요. 며칠 전, 당신이 파로크 성채를 잃고 소수의 패잔병과 함께 이곳 언덕으로 도망쳐 왔을 때, 태자 전하께서 마음을 독하게 먹고 총공격을 가했다면 당신이 이렇게 아직 살아 있을 것 같아요?
지난번 전쟁에서 당신의 아버지가 불행한 일을 당했기 때문에 태자 전하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적인 원한은 잠시 접어두고 큰 그림을 보십시오.
카란드라님과 카시우트 경의 정략 결혼은, 크게는 수만 명의 무고한 병사들이 헛된 죽음을 당하지 않게 지켜주는 길인 동시에, 작게는 당신네 가족을 지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족을 지키다니? 그게 무슨 헛소리냐?”
“카란드라님이 포로로 잡힌 플로젠 왕국 병사를 아주 끔찍한 방법으로 당신네가 믿는 조상신에게 제물로 바쳤다는 사실은 우리도 이미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신네 형제는 국가와 국가간의 엄숙한 약속을 어기고 거듭 플로젠 왕국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지요.
따라서 카란드라님, 카르스덴 왕자님, 카를로만 왕자님, 당신들 3남매는 원칙대로라면 사형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까짓 사형이 무슨 대수냐? 나는 온몸이 난도질 당해서 죽는다고 해도 전혀 두렵지 않다!”
“카르스덴 왕자님, 당신 자신은 두렵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카란드라님은 과연 어떨까요?
그 분은 케르비오의 샤먼이랍시고 플로젠 왕국은 물론 이 대륙에 존재하는 그 어떤 국가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미신에 근거하여 잔혹한 방법으로 포로를 죽였단 말입니다.
그건 그냥 처형이 아니라 화형이나 교수척장분지형 같은 종교적인 방법으로 처형 당할 수도 있는 크나큰 죄이지요.
아시겠습니까? 플로젠 왕국이 비록 엄격한 법치국가이기는 합니다만, 태자 전하께서 오늘밤에 당장 약식 재판을 열어 군법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란드라님을 불태워 죽여버려도 할 말이 없다는 뜻입니다.”
클라티나는 극도로 분노해서 치를 떠는 카르스덴에게 겁 없이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말을 계속했다.
“카르스덴 왕자님, 한번 말해보세요. 정녕 개인적인 원한과 울분에 못 이겨 정략 결혼을 무조건 거절해 버릴 작정입니까?
오늘밤에 저 멀리서 바람에 실려오는 당신 누나의 살과 뼈가 타는 냄새를 맡아보고 싶어서 그래요?
원한다면 어디 한번 절 실컷 두들겨 패서 쫓아내 보시지요.
제가 피를 흘리고 멍이 든 채서 파로크 성채로 돌아간 다음, 태자 전하께 기왕이면 당신네가 잘 볼 수 있도록 동쪽 성벽 위에 기둥을 세우고 장작을 쌓아서 카란드라님을 화형 시키자고 건의할 테니까요.
사람 몸에 불이 붙으면 뼈와 살만으로 그 불길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 한번 느긋하게 구경해 보세요. 그게 당신을 어렸을 때부터 키워준 소중한 누님의 마지막 모습이 될 겁니다.”
“닥쳐라, 이 미친 여자야!”
카르스덴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이성을 잃었다. 그는 다짜고짜 주먹을 불끈 쥐고 상대방의 머리통을 후려갈기려 했다.
그 주먹은 마치 거대한 망치처럼 크고 단단했다.
만약 제대로 얻어 맞았다간 싸움이라곤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 클라티나의 얼굴 따위는 그대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서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님, 안 됩니다. 고정하십시오. 누님께서 인질로 잡혀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카르스덴의 주먹이 얼굴을 실제로 가격하기 직전, 카를로만이 기겁을 해서 필사적으로 자기 형을 붙잡고 말렸다.
하마터면 얼굴이 완전히 뭉개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클라티나는 깔깔 웃을 뿐 전혀 겁먹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젊은 여자의 그런 놀라운 배짱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역시 소문처럼 동생분이 조금 더 사리분별을 잘 하는군요. 카르스덴 왕자님, 방금 당신은 하마터면 소중한 누님을 정말로 죽일 뻔한 겁니다.
나중에 동생한테 말려줘서 고맙다고 절을 하세요.”
그 빈정거리는 소리를 듣고, 간신히 형을 말리고 있던 카를로만이 버럭 화를 냈다.
“닥치시오. 계속 그런 헛소리를 하면 형님이 아니라 내가 용서하지 않겠소.”
물론 그래 봤자 돌아오는 건 클라티나의 비웃음 섞인 말뿐이었다.
“용서하지 않으면 뭘 어쩌려고요? 저 언덕 아래에 우글거리는 노인과 어린애들을 데리고 파로크 성채를 공격해서 카란드라님을 구해낼 자신이라도 있습니까?
그럴 자신이 없다면 누님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번 정략 결혼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 누님도 살고 당신네 형제 또한 태자 전하의 비호를 받아 목숨을 건지게 될 겁니다.
이 정도로 많은 이득이 있다면, 아무리 사적인 원한이 깊더라도 대국을 생각해서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볼만한 사안이 아닐까요?”
카를로만은 당장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저 무작정 자기 형을 붙잡고 말릴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클라티나는 다시 카로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카로이님, 행여나 이번 정략 결혼이 저들 형제한테만 이득이 되는 일이라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이건 케르비오 전체에 이익이 되는 일이니까요.
카란드라님과 카시우트 경이 실제로 결혼을 하게 된다면, 당장 눈앞의 전쟁이 끝나게 될 뿐만 아니라, 양국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더 이상 없을 겁니다.
그 대신 두 나라는 힘을 합쳐 숙적인 네필린 공화국을 공격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카로이님과 서부 초원지대 사람들의 오랜 숙원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요?
이렇듯 이번 정략 결혼이 가져올 이익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발 부탁 드리거니와 감정적으로 단숨에 거절하지 말고 단 며칠만이라도 신중하게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기 계신 분들께서 판단을 내리실 때까지 열흘이든 한 달이든 여기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클라티나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카로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주군, 우리는 이미 저 여자의 말솜씨에 완전히 말려들었습니다.
다들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한 상태이니, 지금 이 자리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최소한 하루 이상 신중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사촌 동생인 파네스가 다가와서 나직하게 속삭이자 카로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클라티나, 네 말에 전혀 일리가 없지 않으니, 우리가 하룻동안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내일 답을 들려주겠다.
그때까지 너는 인질로서 아군 진영에 억류되어 있게 될 것이다.
만에 하나 페레이즈가 카란드라님을 해쳤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면, 너도 결코 살아남지 못할 테니 각오해라.”
“그야 당연하지요. 전 죽을 각오를 한 채 몇 날 며칠이라도 기다릴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서두르지 마시고 신중하게 생각하셔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클라티나가 얄미울 정도로 예의 바르게 머리를 숙이고 다리를 굽혀서 인사를 했다. 귀족 가문 출신 아가씨답게 예의범절에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아마 이 대륙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요조숙녀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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