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44화-고갈(2)
소현자. 페펜도시에서 머문지 보름을 넘기고 있을때 레니아가 얻은 별칭이었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그녀의 행동은 현자에 걸맞지 않았지만 어느새 부터인가 페펜의 학자들은 그녀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일주일 여를 고문서의 번역을 해낸것은 그들이 몇년은 걸려야 할 정도로 굉장한 양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외모까지 출중해 그들이 레니아를 좋게 보는건 정해진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페펜도시는 브렌모스중에서도 학자가 많았다. 그렇기에 레니아는 자신있게 벤하르트에게 승부를 신청한 것이었고 보기좋게 이겨낸 것이다. 거기에 다른 학자들로 부터 추앙까지 받으니 마치 다시 신이 된것 같은 기분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소현자."
외관상으로 보면 레니아보다 곱절은 많은 나이를 가진것처럼 보이는 학자 하나가 공손하게 말했다. 그에 그녀는 다시 고문서를 해석하기 시작했고 다른 학자들은 그것을 받아 적었다.
인간이 인간다운 문자를 얻기도 전 레니아가 존재하지도 않는 태초의 시대에 신들이나 사용했다고 하는 고어(古語). 레니아도 수월하게 번역하고 해석하는것 같아 보여도 실상은 그녀의 기본적인 머리를 생각해봤을때 터무니 없을 정도로 적은 양이었다. 학자들의 입장으로도 만족할만한 양은 아님에 틀림 없었지만 그들이 레니아에게 매달리는것은 그 몇년동안 그들이 해야 할 양. 그 양을 토대로 레니아가 떠났을때 그들 스스로가 해석할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양을 해석해두어야 한 것이다.
돈을 들고 레니아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방 안에는 홀쭉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탈진해 있는 벤하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내기를 하고 난 후 레니아에게 지기 싫은 까닭에 다시 청부업을 몇가지씩이나 챙겨 몸이 두 세개라도 모자를 정도로 일을 했지만 소현자라고 까지 칭송받으면서 돈을 받는 레니아에게는 미치지 못할 뿐더러 최근에는 지친 까닭에 몇푼 건지지도 못하게 되어 버린것이다. 그런 벤하르트를 살짝 만지려 하다가 문득 한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이런 몰골이 될 정도로 나에게 지기 싫었던 거야?'
자신은 본래 신이었던 몸. 본래대로라면 벤하르트가 그녀에게 지는건 당연한일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에도 몸이 망가질 정도로까지 일을 했다는게 도리어 괘씸한 생각이 들어 그녀는 벤하르트를 발로 걷어 찼다.
"어 어어? 무슨 짓이야 레니아."
"나 왔어."
싸늘하게 레니아가 대답했다. 왠지 퇴색되어 버린 자신의 자존심을 용납할수가 없어 괜시리 화가 뻗힌 것이다.
"아니 왜 걷어 찼느냐.."
살짝 독기 서린 레니아의 눈을 보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어떤 말을 더한다 해도 최근의 벤하르트의 벌이가 시원치 않은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었다. 레니아에게 빌붙어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닌것이다.
'또 뭐에 화가 난거야.'
레니아 덕분에 여행을 할수 있을정도의 충분한 자금도 모여서 언제든지 그들은 페펜도시를 떠날수 있었다.
"13마크닐이라.."
레니아가 대단하다고 느낀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몇달을 쓰지 않고 모아야 모을수 있을정도로 거금을 고작해야 일주일 남짓한 시간에 벌어낸 것이다. 최근들어 벤하르트는 슬슬 여행을 재개 하자는 눈치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었지만 레니아는 눈도 깜짝 하지 않고 시치미를 떼었다.
'시치미를 떼고 있군.'
이제는 레니아도 세상에 대한 적응을 거진 다 끝마친 터라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을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일부러 티를 내는것이라는 것을 눈치챌수 있었다.
"레니아 책은 재밌어?"
벤하르트가 넌지시 물었다.
"재밌지."
간결하게 답하고 그녀의 눈은 재빠르게 책을 흝어 넘어갔다. 그런 레니아의 모습을 보고 벤하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레니아의 모습만을 보면 페펜도시는 굉장히 이상적이라 할수 있었다. 학자들이 많은 도시 답게 책도 구비되어 있었고 사람들에게서 추앙까지 받으면서 명성을 누릴수도 있고 돈을 버는것에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곳이니 이상적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할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이야기는 안해주는 거야?"
항상 하루의 끝은 레니아의 고어해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끝을 내었다. 그 일과에 대한 물음에 레니아는 잠시 벤하르트를 노려보듯이 쳐다보다가 책을 덮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번에 만났던 고야마 있지?"
"고야마는 왜? 그런게 그 고서에도 나와 있었던 거야?"
"아니 저 책은 장난이 아니니까, 고야마가 존재하기도 전에 있었던 책이야. 오늘 이야기 하는건 용들의 굴레 같은 거랄까,"
"굴레?"
"규칙같은 내용이지. 각각의 용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생물보다 강하고 위협적이며 지적인 존재이지만 그중에서도 '왕'이란 위치가 있대."
지금은 요마인 고야마도 옛날에는 월용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베라스키에게서 들은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대에 하나. 그 자질을 가진 용은 태어날때부터 표식이 있다고 하나봐. 어떠한 일이있어서 왕이 사라지면 다음대 왕이 나타난다고 한대."
그뒤로도 몇분동안 레니아는 자신이 알았던 내용과 몰랐던 내용도 포함해 해석한 이야기를 벤하르트에게 들려 주었다. 그녀에게나 벤하르트에게나 그 시간은 왠지 즐거웠던 것이다. 방금까지 화나 있었던 마음을 누그러 드릴 정도로..
"여기까지야."
"으음."
벤하르트는 노시엘트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레니아의 이야기에 동조하다가 끝이라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듣긴 들은거야?"
"물론이지. 문제를 내어 봐도 좋아."
"정말?"
왠지 레니아의 문제는 굉장히 어려울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조금 자신이 없네."
"초대 고룡의 이름은?"
"자신 없다니까,"
하지만 자신은 있었는지 대답하려 하는데 첫글자만이 머리를 휘저어 지나다니면서 흐릿하게 바뀌어 갔다.
"브 브.."
"브리우케인."
별로 어려운 말이나 외우기 힘들정도도 아닌데도 듣기 직전까지 그는 마치 기억에 존재하지 않았던것 처럼 기억을 하지 못했다.
"그랬지."
"잘좀 들으라고,"
"그것도 그런데 말야. 레니아 도대체 오늘은 뭐에 화가 난거야."
"하아. 말로 하지 않아도 벤이라면 충분히 알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과대평가한건가."
화가나 폭발할것 처럼 타올랐던 가슴은 모두 연소되기라도 했는지 찬물을 끼얹기라도 했는지 차갑게 식어 있어서 다시 화낼 기운도 들지 않았다.
"나는 신이 아니야. 독심술이나 네 생각을 읽을수는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신도 독심술은 못하는걸. 이리 생각해보면 꽤나 신이라는 것들도 허술하다고 생각되지?"
"어쨋든."
레니아가 말을 돌리려는 것 같은 기미를 보이자 그는 독촉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벤 네가 너무 지지 않으려고 해서."
"응?"
"노시엘트를 나오고 나서 최근에 이르러서는 나는 너에게 도움만 받고 살아왔어. 그래도 나는 명색이 신이란 말야. 그것도 아주 속이 좁지."
'그렇지.'
굳이 입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벤하르트의 표정을 보고 레니아는 바늘로 찌를듯이 노려 봤다.
"왜?"
"....."
심증뿐이었기에 그녀는 잠시 참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요즘 벤이 하는 행동을 보면 내가 이겼다는 사실이 납득하기 어려운것 처럼 보이잖아. 그런 생각을 하니까 화가 치밀어서 그렇게 된거지 뭐."
'분명 이런 부분에서는 속이 좁은게 맞는데,'
하지만 그녀의 진실된 부분은 분명 한없을 정도로 넓은 아량이 있을 것임에 틀림 없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해온 행동들을 보면 잘 알수 있는 것이다.
'전직 신이니까.'
"그렇게 느꼈다니 나도 비슷한 의미에서 노력하려고 했던 거야."
"비슷한 의미라니?"
"그래도 나는 남자잖아. 남자가 여자한테 얻어 먹기만 하는건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인 거니까,"
"여자보다 신으로 취급하라고!"
그렇게 쏘아붙히고 그녀는 홱 돌아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책을 읽었다. 갈등. 벤하르트가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것도 여자로 여기는 것도 어느쪽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나약함. 그리고 그것에도 그다지 혐오감이 느껴지지 않는 감정에 그녀는 약간의 혼란함을 느꼈다.
"레니아?"
"아아 됐어. 이야기는 이걸로 끝. 나는 책을 읽을거니까 집중에 방해되지 않게 절대 말걸지마."
손을 바둥거리듯 휘저으면서 그녀는 벤하르트의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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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흑 추노.. 너무 한거 아냐.. 주연급 배우들을 몰살시키네.. 그런데 그런것도 왠지 피가 역류할것 같은 기분을 불러 일으키니.. 제 소설에도 넣어보면 어떨까 하고 살짝 생각이 드네요. ㅇ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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