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190화-수마행(數魔行)의 탑(7)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에 작은 한가닥의 빛의 줄기가 들어 온다. 그곳에는 새 가면을 착용한채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채 앉아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잘 오셧소. 이곳 수마행의 탑에.."
그의 말을 분명히 듣고 인지하면서도 벤하르트는 그곳에 자신이 서 있다는 실감을 하지 못했다. 팔을 휘젓기도 하고 발을 움직여도 보았지만 움직일때의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새 가면의 사내를 제외하고 그의 눈에 보이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몸이 존재하고 있는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지 조차도, 팔을 들어 눈을 가렸지만 움직이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가리는 그림자도 없었다. 그저 새의 가면을 쓰고 있는 인영만이 그곳에 서 있을 뿐이었다.
'뭐지 이건..'
놀람보다도 두려움이 일었다. 몸이 없는데 정신만 있었다. 하는 어디선가 장난 삼아 들어 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것 같았지만 당연히 즐거운 기분은 아니다. 돌아갈수 없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짙게 그의 존재 하지 않는 몸을 위축 시키고 있었다. 상상만으로 그런 감각은 느껴진다는게 더 불안함을 가속화 시켰다.
"놀랄것 없소. 몸이 사라진것도 아니고 당신이 이상해진것도 아니니,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나 어떤 방법으로도 깨닫지 못할 뿐. 그대의 몸은 그곳에 분명히 존재한다오. 반갑소이다. 나는 수마행의 탑의 관조자인 아조랑이라 하오, 보잘것 없는 구경꾼이니 마음 쓸것 없소이다. 덧붙혀서 당신과 같은 처음 오는 사람에게 몇가지 규칙을 알려주는 일을 맡고 있다오."
"아.. 네."
새의 가면은 이전에 마조를 만났을때 착용했던 새의 모자를 떠올리게 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얼굴을 가린채 사람을 대한다는것은 뭔가 자신을 전부 내보이면서 상대방에 대해서는 모르는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 약간의 경각심을 가지게 했다. 새의 가면의 뒤 새하얀 머리칼과 가늘고 흰 그의 손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궁금증 마저 일게 되 있었다.
평상시였다면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르나. 이곳의 공간은 너무도 아조랑을 부각시키고 있었기에 절로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뭐 그럼 숙지해야 할것은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소. 이곳은 수련의 장으로 누구나 들어올수 있고 누구나 이용할수 있다오. 개중에는 이곳에 걸려 있는 상품을 노리러 오는 자들도 있지만, 그런것들은 솔직히 상관하지 않고 있소. 그들은 그들을 위해 이곳에 있는 자들은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니 '설사' 무언가를 노리고 왔다 하더라도 괘념치 않으셔도 되오."
"음.."
그의 말은 약간 찜찜하던 벤하르트의 속을 후련하게 뚫어주었다.
"본래가 수련의 장으로 만들어 진 것이니 언제든 쉬는것을 요청할수 있다오. 휴식의 시간은 한 방에 6시간. 그 이상은 사용할수 없소. 하지만 이곳에서도 밤과 낮의 개념은 존재 하고 있기에 숙면의 시간은 존재한다오. 그것을 제외하고 6시간을 받을수 있다는것을 명심하시오."
"만약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후후. 한번 경험해 보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환영이오. 알고 싶다면 과감하게 시도해보는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오. 그것으로 인해 갈수밖에 없는 곳도 있으니.."
그런 말을 듣고도 실험해 볼만큼 벤하르트는 담력이 크지 못했기에 규칙을 준수하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이곳의 시간은 본래 지나가는 시간의 6배로 지나가게 되어 있다오."
"6배? 그렇게 지나간다구요? 어째섭니까?"
아조랑은 그의 질문에 살짝 멈칫 하더니 우스운듯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받은건 꽤나 오랜만이구려. 역시나 인간. 흥미롭소이다. 이곳은 다른 여섯 세상을 동시에 잇고 있는 통로라오. 실시간적으로 어느 시공에도 간섭할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여섯개의 시간을 동시에 공유 한다오. 이곳의 1시간은 다른곳에서 서로 한시간씩 늘여 놓은것을 압축 시켜 놓은것이나 다름 없다는 이야기로 이곳을 이루고 있는 기적의 법 로쿠라스트와 함께 뒤섞여 만들어진 괴 현상중 하나라오. 어쨋든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이곳에 정해져 있는 법이 그러니 어쩔수 있겠소? 숙지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라오."
"로쿠라스트라."
가렌더 부크에서 레니아가 해준 말을 떠올리며 벤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상을 일으키는 기적의 마법일진대 시간이 6배로 흐르던 100배로 흐르던 이상할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수련의 장이기 때문에 서로의 목숨을 노리면 안된다오. 만약 상대방을 죽인다면 그에 합당한 일이 준비되어 있으니 역시 확인해 보고 싶다면 시도해보셔도 좋을 것이외다."
"후우."
아조랑의 그 말에는 나름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웠다. 그것이야 말로 그가 가장 바라마지 않는것이 아니었던가. 죽이거나 죽이지 않고 서로가 승리하는 그런 이야기는 벤하르트가 좋아하는 상황중에 하나였다.
아조랑은 한바퀴 빙글 돌고는 벤하르트에게 손가락질 하며 말했다.
"주위해야 할것은 그정도. 본디 이곳은 수련의 장이니 규칙이니 뭐니 하는것 없이 소신껏 자신의 몸으로 부딪히면서 경험하면 그뿐인 이야기라오. 자신을 믿고 오르도록 하시오 무운을 빌겠소이다."
"어 자 잠깐."
딱히 물어볼 말 같은게 있어서 붙잡은것은 아니었다. 뭔가의 아쉬움이 느껴진 까닭에 말을 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점차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곧 세계는 백색으로 물들었다.
"어.."
딱딱하고 차가운 기운에 눈을 떠보니 이미 탑의 안이었다.
"꿈은.. 당연히 아닐테고,"
그는 손가락을 들며 자신이 지켜야 할 규칙을 되뇌었다.
"좋아."
"하 웃기는 녀석이로군. 벌써 이곳에서 잠을 잔 시간만 5시간이 넘었거늘. 솔직히 말해서 놀랐다. 수마행의 탑에 와서 그렇게 정신없이 자는 녀석은 지금껏 본적이 없거든. 칭찬해주지."
판치스 정도의 겉나이로 보일정도의 소년이 벤하르트에게 말했다.
"그런 칭찬은 필요 없거든."
겉 모습과 달리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것은 분위기만으로도 뼈저리게 알수 있었지만 의외로 이런 면에서 말을 높히지 못하는게 벤하르트라는 인간이었다. 짙은 청록색의 눈은 뱀처럼 날카롭고 서늘하게 벤하르트를 흩어 보았다.
"우선 1층에서 주는 선물을 알려 주지. 나를 이기게 되면 자신의 실력을 조금 성장시킬수 있는 비약을 주게 된다. 물론 만능의 약은 아니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한도 수량을 넘어 가면 그저 그런 맹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좋아. 그럼 시작해볼까?"
방심했다. 라는 변명이 통하는것은 아직 어리광을 부릴수 있을정도로 약할때나 쓸수 있는 말이었다. 그때는 어떤 행동을 해도 용서 받을수 있었다. 어린아이가 만드는것을 실패해도 공부에서 안좋은 점수를 받아와도 놀다가 다쳐 울어도 어릴때는 용서 받을수 있고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피가 솟구쳤다. 가슴을 찢기며 울컥울컥 쏟아지는 피를 단련된 눈이 느리게 벤하르트의 뇌로 전달해 주고 있었다. 방심 했다. 라는것은 한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실이었지만 이렇게 된 와중에야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하아 하아."
다행히 찰과상에 지나지 않았다. 라는 이야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위험을 감지하고 피하는 능력에 굉장히 특화 되어 있는 벤하르트 였지만 방금의 일격은 분명 치명상에 이를 정도의 공격이었다. 그가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주의력이 뛰어나다지만, 본래부터 암습을 수련하며 단련해온 자보다 못하다는것은 정해져 있었다.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그 일격만을 갈고 닦은 남자는 확실히 방심하고 있던 남자의 순발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하지만 그것으로 승부는 났다.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오도록 해라."
"아직이다. 아직 나지 않았어."
백광의 빛을 둘러 서서히 상처를 치유해 나갔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옳다구나 하고 줄 상대가 아니었다. 기존의 능력으로도 그 본인 만큼 강한 그 속공에 벤하르트는 속수무책으로 당해 갔다. 인에게 배웠던 기술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승부는 났을것이었다. 확실히 상대는 벤하르트 보다 한수 아래 였다. 죽지는 않는다. 수련의 장이다. 하는 말치장따위는 다 진실을 가리기 위한 말.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상대가 반죽음이던 식물인간이던간에 죽이지만 않으면 허용 가능 한 진검승부. 이제서야 그는 요셉의 웃음이 무엇을 뜻했는지 느꼈다.
"포기 해라. 목숨을 탐하고 싶은 역겨운 마음은 없으니."
그가 들고 있는 단도를 쳐내고 벤하르트는 거리를 벌렸다.
"위선적인 말이로군. 그렇게 짙은 살기를 내보이면서,"
왜 처음부터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감이 밀려 들었다.
'강해졌다는것은 착각일 뿐이었지. 아주 조금 나아진것 뿐이구나. 나는.'
굳이 요셉이 벤하르트의 안심에 충고를 하지 않은것은 몰라서라던가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내버려 둔 것이다. 그 일이 죽음에 근접할 정도로 위험하다 해도 그는 그런 쪽으로는 가차 없었다. 그런 점을 벤하르트도 알고 있기에 불평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한 여유도 없었지만,
그의 검이 서서히 움직였다. 실로 오랜만에 취해보는 일섬의 자세.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묘리가 왠지 눈에 보이는듯 했다. 적이 움직인다. 몸이 사라지고 그는 어느새 벤하르트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처음 벤하르트를 습격했던 그 기술. 일격필살의 기술은 일격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실전이었다면 벤하르트의 배가 갈리고 끝났을 터였지만 이곳은 수마행의 탑. 상대도 벤하르트의 목숨까지 앗을수는 없었던 것이다.
두번째의 공격에 벤하르트의 검이 흔들렸다.
그는 어깨의 상처에 손을 가져 갔다. 검을 휘두르는데 지장을 줄정도의 상처가 나면 이미 승부는 물건너 간것이다.
"대단하군. 첫번째 공격을 성공하고도 지게 될줄은 생각도 못했다. 자 여기 비약이 있다. 선택하시지. 비약을 얻을건지 다음층으로 넘어갈 건지."
"다음층으로."
"좋아. 그럼 이동시켜주지. 나같은 녀석이 1층인 이유는 2층에 더한 재미를 낳아 주기 위해서다. 2층에 가서도 그런 어리숙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줘라."
"이름을 알려주지 않겠어?"
"희한한 녀석이군. 어차피 지나가며 만난 녀석의 이름을 묻다니. 내 이름은 메르체유다."
"나는 벤하르트. 벤하르트 하르크다."
"잘 가라. 벤하르트."
메르체유의 말이 끝나자 이제는 친숙해진 울렁이는 느낌과 함께 그는 다음층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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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여러가지 집어 넣으려고 했지만, 어차피 엔쿠라스에서는 몇번 나오지 않을 수마행의 탑에 여러가지 집어 넣어 봐야.. 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많이 뺐습니다.
라이트 한 전개를 만들고 싶고 여기서 써두고 싶은 그런 욕구가 조금 전투를 했습니다. 쉽사리 결판나 버렸지만,
연참대전도 앞으로 3편이면 끝나서 아쉽습니다.(몸은 편해지지만,) 끝나도 열심히 쓸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ㅇ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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