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
‘둘이... 어디를 가는 것이지?’
무도회장을 빠져 나가는 로인과 실비아를 바라본 젤루스는 생각했다. 그는 잠시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남의 뒤를 밟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그도 잘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을 따라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젤루스는 몸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로인과 실비아를 찾았다. 로인과 실비아는 춤을 추고 있었다.
‘저런! 감히 준남작이!’
젤루스는 실비아의 허리에 손을 올리는 로인의 모습에 인상을 구겼다. 실비아의 허리에 손을 올리다니, 황자들도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실비아는 누군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누구든지, 손을 쳐내었던 것이다. 그것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베르시아 백작과 백작 부인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루푸스 준남작이라는 애송이가 감히 허리에 손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쳐내지 않은 것이다.
‘하는 짓 마다 마음에 드는게 없군.’
젤루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던 젤루스는 이를 악 물었다. 허리에 손을 올려놓은 것만으로도 황당할 정도인데, 실비아를 가까이 끌어당긴 것이다.
‘저것이 죽으려고!’
젤루스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지고 갔다. 하지만 이내 검을 소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주먹을 쥐었다. 루푸스 준남작이라는 자에게 안긴 실비아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젤루스는 그것을 보고 뒤를 돌아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무도회장의 입구로 온 젤루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젤루스는 몸을 돌려 다시 실비아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시 그곳에 돌아왔을 때에는, 실비아와 루푸스 준남작은 서로 떨어져 무도회장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몸을 숨겨 그들을 먼저 보낸 젤루스는 그들이 충분히 멀어지자 다시 무도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루푸스 준남작... 한번 개인적으로 만나보아야 할 것 같군.’
젤루스는 속으로 생각하며 테이나 후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로인에게로 몸을 움직였다.
“달을 즐기다 오셨나보군요.”
젤루스는 입을 열어 실비아에게 말했다.
“네, 달이 참 밝더군요.”
“밤 산책을 즐기기 좋은 날이죠?”
“네.”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젤루스는 고개를 돌려 로인을 바라보았다. 로인은 고개를 숙였다.
“로인 루푸스, 준남작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루푸스 경.”
“저도, 만나서 영광입니다.”
로인은 미소를 띈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젤루스의 웃고 있는 얼굴이 무언가 어색했다.
“실비아님과 아는 사이인가 봅니다?”
“아, 실비아하고는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친구... 좋군요.”
“...”
로인은 젤루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친구사이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무리 친구사이라고 해도, 백작의 영애에게 실비아라니. 친구끼리라도 지켜야할 예의는 있을 것 같군요.”
젤루스는 로인의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로인은 젤루스의 말에 잠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통 친구 사이가 아니라서 말이죠...”
“보통 친구 사이가 아니라도 그렇게...!”
젤루스는 조금 흥분을 하여 말을 하려고 했지만, 멈추었다. 잠시 숨을 내쉰 젤루스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이름을 막 불러도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허리에 손을 올리고, 끌어당기는 짓을 하냐고 하려던 젤루스는, 진정하고 말했다.
“저희는 원래 이름을 불렀습니다만...”
“예의에 어긋나는 거라고 생각되는데...”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은 사교의 한 방법입니다.”
로인은 딱 잘라 말하는 젤루스의 말에, 황당해 하며 말을 이었다. 속으로는 왠 참견이냐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려 공작의 아들이다. 게다가 자신이 존경하는 라이칸 공작의 아들.
“사교의 한 방법이라... 사교계에 오늘 처음 발을 들였으면서. 사교계에 대해서 무엇을 알지?”
젤루스의 말투가 변했다. 동시에 그의 표정도 변했다. 그의 얼굴에 더 이상 미소는 없었다.
“사교계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허.”
“호칭은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라면 아버지, 아들.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왕과 신하의 관계라면 폐하, 경. 이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친구의 사이에는 여러 가지 호칭이 있죠. 저희는 그중 이름을 불러가며 호칭을 대신 합니다.”
로인은 젤루스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친구 사이에 이름을 불러 호칭을 대신 한다는 것은 이해하지. 하지만 이곳은 제국의 황궁이고 사교계이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그렇게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
“예의는. 사람을 가려가며 따지는 겁니다. 저와 실비아는 예의를 따지지 않을 정도로 친한 친구 사이이고, 그것은 이곳이 황궁이라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남작이 백작의 영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 이것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보는가?”
“자꾸 예의, 예의 하시는데... 저도 한번 예의 따져 볼까요? 정말로 예의가 없는 것은. 지금 젤루스 공자님이 저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로인은 욱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로인도 사람인데, 자꾸 자신을 무시하는 젤루스의 행동과 말에 화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예의 없이 행동하면서, 예의를 따지니, 황당한 마음에 자신도 예의를 포기하고 말을 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지금 뭐라고...?”
“정말로 예의가 없는 것은, 실비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생각하여 저보고 예의를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를 화나게 해서 좋을 게 없을걸 세.”
“지금 젤루스 공자님은 라이칸 공작님의 아드님이라는 신분으로 이곳에 와있습니다. 저는 분명한 귀족의 신분. 준남작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이곳에 와있는 것입니다.”
“내가 작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공자라는 신분이 겨우 준남작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아버지를 잘 만나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과. 스스로의 힘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온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알지. 아버지 잘 만나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은. 잘난 아버지가 있다는 거. 그리고 그렇지 않은 놈은 잘난 아버지가 없지. 그럼 잘난 아버지가 있다면 좋은 점이 무엇인줄 아나?”
“떵떵거릴 수 있다. 그것뿐이죠. 노력하지도 않고, 자격을 얻으려하는 사람들이 할 줄 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로인은 무표정으로 말했다. 젤루스의 표정은 굳을 대로 굳어 펴지지 않았다.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힘과 능력을 가지고 큰소리치는 놈을 혼내줄 수 있다는 거지.”
젤루스는 굳은 얼굴로 로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다. 고작 준남작인 녀석과 이렇고 있다니, 나도 참 한심하군.’
젤루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그만 하시는 게 모두에게 좋을 것 같군요.”
실비아가 껴들어서 말했다. 젤루스의 말에 반박을 하려던 로인은 실비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 로인의 모습을 보고 젤루스가 비웃음을 날렸다.
“하. 정말 친구가 맞기는 한 건지... 아니면 그냥 친구인 척하는 시종인건지...”
젤루스의 말에, 로인은 뭐 저런 병신이 다 있어. 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제게...”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젤루스의 말에, 지금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거냐고 말을 하려던 로인은 실비아의 말에 말을 멈추었다. 실비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지금 젤루스 공자님은 제 친구를 모욕하셨습니다.”
“그건 실비아님의 친구와 사소한 마찰 때문에... 실비아님이 신경쓰실만한 일은 아닙니다.”
“아니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군요.”
실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젤루스 공자님은 제 친구를 모욕함과 동시에 제 자신을 모욕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실비아님을 모욕하다니요.”
“방금 젤루스 공자님께서는 저를 모욕하셨습니다.”
“실비아야. 그만 하거라. 젤루스가 말을 잘못 내뱉은 것은 사실이다 만. 이곳에서 그렇게 따질 일은 아니다.”
테이나 후작은 실비아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는 어린 귀족들 사이에서 이렇게 자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실비아나 젤루스가 다툼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이번이 처음 인 것이다. 절로 한숨이 내쉬어졌다.
“...”
실비아는 테이나 후작의 말에,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실비아는 잠시 젤루스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틀 뒤, 수도에 있는 저택으로 찾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뵙죠.”
실비아는 살짝 굳은 얼굴로 말하고,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며 로인의 손을 잡은 실비아는,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야!”
실비아는 정원으로 빠져나오자마자 로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너는 너보고 나쁜 말을 했는데 왜 가만히 있냐. 남자가 돼서 자존심도 없냐.”
“헐... 야. 내가 나서려고했는데 네가 먼저 나선거야.”
“내가 나서기 전에 먼저 나섰어야지. 나까지 나서게 만들면 어떻게 하냐.”
“...미안하다. 그리고 나서주어서 고맙고.”
로인은 말했다.
“너 때문에 나선 게 아니고 나 때문에 나선 거다. 내가 친구를 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한다는 듯한 말투였잖아.”
“그...랬나. 나는 그냥 내 욕한 것 같은데.”
로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어.”
실비아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야, 인상 펴라.”
“남이사.”
“너... 인상 쓰면 귀엽다는 거, 아냐?”
“...아, 됐어. 피곤하다. 가서 자야겠다.”
실비아는 로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로인은 그런 실비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가서 자자.”
로인은 실비아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나 죽는다.”
로인은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무도회는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계속 서있어야 했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얼굴 표정도 신경 써야 했다.
‘귀족들도 참 피곤하겠다.’
로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맨날 이런 생활을 하는 귀족들로서는 상당히 피곤할 것 이었다. 귀족들은 무도회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가식을 떨어야 하니 말이다.
“무도회는... 어떠셨나요?”
나인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말했다.
“어... 뭐... 조금 피곤하기는 한데, 재미있었어. 누구 때문에 즐거운 기분을 다 망쳤기는 하지만.”
로인은 젤루스를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 작가의말
이얍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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