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20층 - 진실
다음 층에 들어간 일행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경험으로 인해 소름이 끼쳤다.
“뭐, 뭐야 이건?!”
“우리가 허공에 떠있어!!”
그 말 대로였다. 일행은 모두 허공에 떠있었는데, 사실 그것도 허공이 아니라 우주. 그래, 우주였다.
“저, 저건 별??”
“행성과 행성이 떠다닌다!!”
말 그대로 그곳은 우주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공기가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걸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발밑으로 행성이 떠다닌다. 별과 별이 빛나고 은하계가 찬란히 빛나는 우주.
일행은 전대미문의 경험으로 인해 모두 당황했다.
“촌장님, 이런 층도 있어요?!”
“나도 처음이다!! 조심해라!! 이 층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뭔가가 느껴진다!!”
“과연 던전 최고의 용사답군. 물론 당신만한 용사는 몇 명 더 있지만 말야. 저 루드의 부모인 태양과 달의 용사를 비롯해서 말이지. 낄낄낄!!”
“누구냐!!”
갑작스레 들려온 음성에 경악하며 외치는 일행. 그러나 그 자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쉬이잉!!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듯 그자는 서 있었다. 만약 주의 깊게 기울여보지 않았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자는 워낙 자연스럽게 나타났으므로. 그자는 나타난 이후 자기소개부터 했다.
“누구냐고?? 난 허똑똑 박사다.”
“허똑똑? 박사?”
“사람들은 날 닥터 허라고 부르지······. 뭐 아무튼 그건 그렇고, 잘 왔네. 자네들이 온 걸 환영하네.”
“이 공간은 어떻게 된 거지??”
“음,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이곳은 하나의 실험장이라고 할 수 있겠군.”
“실험장??”
“자네들, 게임 좋아하나, 게임??”
“물론 좋아하지. 하지만 그게 어쨌다고??”
루드의 말에 허 박사는 싱긋 웃더니 답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게임이네.”
“게임이라고??”
“그럼 우리가 게임 속의 존재란 거냐??”
“아니, 그건 아니고······.”
루드와 더불어 김창남도 따지자 곤란해 하는 허 박사. 그는 그렇게 잠시 말을 고르다 이윽고 적절한 설명을 떠올렸는지 손뼉을 탁! 치고 말을 이었다.
“자네들 VR게임 아나??”
“그래, 요즘 한창 떠오르고 있지. 그게 어쨌다고??”
“자네들의 차원과 다른 어떤 차원에서, 그런 VR게임이 급격히 발달했다네. 사람들은 가상현실과 게임을 접목한 VR게임에 열광했으며, 그 리얼리티는 곧 현실과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었지. 즉 가상은, 또 하나의 현실이 되었다네. 그런 최초의 완전가상현실을 이룬 게임이 바로 프론티어. 그것은 그야말로 기존의 게임이나 프로그램의 한계를 뛰어넘은 신천지였다······. 나 역시 그 게임의 개발자 중 한 사람이었지.”
“개발자라고??”
“그렇다면 역시 이 세계는 게임인 게!!”
“아, 흥분하지 마. 아무튼 그렇게 게임이 출시되고 전 세계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는데, 그걸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게 누구지??”
“김재인. 바로 게임 프론티어의 수석 개발자. 그와 동시에 제작사 파이오니어의 대표. 젊은 나이에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한 곳을 졸업하고 그 자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웃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존의 구태의연한 게임계를 박살내버렸지······. 반복되는 노가다와 그저 그런 스토리, 강화와 현질 등 게임의 재미에 방해가 되지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를 그는 모두 없애버렸다. 그게 가능한 건 밸리 때문이었지.”
“밸리??”
“그가 만든 인공지능 컴퓨터다. 자기스스로 학습하며 진화하게 돼있었다. 처음에 우린 그 무서움을 몰랐지. 그저 알파고 정도인 줄만 알았다. 말하자면 밸리는 게임 개발용 알파고, 즉 컴퓨터 엔진이었다. 밸리는 차츰 인공지능을 발전시켜 나가며 지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나중엔 자기가 알아서 게임을 만들게 되었지. 너희, 게임 개발자에게 가장 힘든 게 뭔지 아는가??”
“······개발이겠지.”
“그래, 개발. 제대로 된 컨텐츠를 개발하기도 힘들지만 아무리 엉망인 컨텐츠라도 개발하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몬스터, 맵, 스토리. 그리고 퀘스트. 유저가 질리지 않으면서 양질의 컨텐츠를 즐기게 할 수 있으려면 막대한 노력이 필요하지. 그런데 또 문제가 뭔지 아나?? 사람들은 금방 질려버린다······. 정확히 말하면, 금방 깨버린다. 아무리 컨텐츠 진행속도가 늦도록 어렵게 만들어도, 사람들은 금방 깨버린다. 그렇다고 아예 깰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면 그 순간 게이머들은 재미를 잃지. 아주 어려운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알겠나??”
“물론······.”
수도원에 있었던 이크나 마법학교에 있었던 플로드, 기타 도박장에서 살았던 안내양이나 이단 심문관으로서 전 세계를 떠돌았던 바이올렛과는 달리, 루드의 김창남은 나름 게임을 많이 해보았다.
아무래도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이 게임을 많이 한다. 그러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정보.
여자들은 그만큼 게임을 많이 해보지는 않았지만, 어떤 게임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개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 모두 알아들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 김창남.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지??”
“재촉하지 마라. 곧 결과를 알려주지. 아무튼 그런 점이 게임 개발자의 가장 어려운 점인데, 밸리는 엄청난 제작으로 우리 개발자들을 개발 지옥에서 해방시켜주었다. 밸리는 무수한 맵, 몬스터, 퀘스트, 아이템, 스토리들을 만들어냈으며 게임 프론티어의 세계는 유저가 접속하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갔다. NPC들은 자기들끼리 대화하고 생업을 지속했으며, 즉 그것은 하나의 세계와 똑같았다. 프론티어는 하나의 세계.”
“잠깐, 나도 게임을 많이 해보았는데 그런 게 가능한가?? 그토록 수준이 높은 인공지능과 그런 인공지능이 게임을 개발하는 현실이라니.”
“역시 루드. 일행의 우두머리급답게 날카롭군.”
“······.”
꿈틀. 루드는 대체 어찌 저 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저 자는 아마도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의 이름이나 능력을 모두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밸리는 처음부터 어떤 사람의 인격을 본 따 만들어진 것이었다.”
“?!”
“수석 개발자 김재인은 자신의 인격을 본 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먼저 자신의 뇌 구조를 스캔하고, 그 인격을 그대로 본 딴 엔진을 만들었지. 그게 바로 ‘밸리’다. 즉 밸리는 또 하나의 김재인. 그렇게 또 하나의 자신과 함께 김재인은 미친듯한 속도로 게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게 가능했던 이유 하나 더. 바로 브레인 스캐닝.”
“브레인, 뭐??”
“브레인 스캐닝. VR게임, 아니 그걸 넘어서 가상현실에 그대로 다이브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최초의 게임, VD게임인 프론티어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다이버라는 장치가 필요했다. 그건 선글라스 같이 생긴 장치인데 얼굴에 쓰면 센서가 관자놀이를 통해 뇌파를 인식하고 게이머를 가상현실의 세계로 이끌었지. 그렇게 프론티어와 게이머는 서로 피드백을 하고.”
“관자놀이를 통해 뇌파를 측정한다고??”
“두통이 생기면 보통 관자놀이도 지끈거리지 않나? 관자놀이, 무협에서 말하는 태양혈은 그런 신경의 집합체이다. 관자놀이와 뇌파는 전혀 무관하지 않고 뇌파에서 나타난 현상이 관자놀이를 통해 다시 한 번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우린 그런 관자놀이의 반응을 역산하여 뇌를 자극하지 않고도 뇌파를 포착하는데 성공했다.”
“흐음, 그래서??”
“그 결과가 뭔지 아나?? 우리는 사람을 조종하게 되었다.”
“뭐??”
“상식적으로 사람을 단순히 안경 하나 씌운 것만으로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는데, 반대로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그게 바로 ‘피드백’이다. 관자놀이를 통해 게이머의 뇌파를 포착해 그를 가상현실의 세계로 인도하듯이, 반대로 그를 통해 한 사람의 개인에 대해서 침투한다. 그리고 우리 서버는 ‘뇌’로 이루어져 있었다.”
“뭐라고?? 뇌??”
“그렇게 무섭게 보지마라. 그렇다고 해서 무슨 산사람의 뇌를 잡아 꺼내 사용한 것이 아니다. 사용한 것은 게임에 접속한 게이머들의 뇌, 그리고 한번이라도 접속한 적이 있는 게이머들이었지. 그때 우리는 어떤 코드를 그 게이머들의 뇌에 심었다. 말하자면 그들 입장에서는 악성 코드라 해도 되겠지. 그 코드는 그리드 컴퓨팅 시스템을 통해 게이머들의 뇌를 이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너희들 컴퓨터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CPU, GPU, 램 등의 다양한 부품이 필요한 건 알고 있지??”
“물론이다.”
“그와 마찬가지다. 게임, 프론티어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서버가 필요했는데, 단순히 현실적인 서버 장치로는 그런 현실과 완전히 같은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만약 그랬다면 프론티어는 단순한 VR게임이 되었겠지. 프론티어가 VR게임을 넘어 VD게임이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게이머들의 뇌를 서버로 사용하고, 게이머들이 늘면 늘수록 서버 안정도는 커져갔다. 나중엔 잉여 자원으로 뭔가 다른 걸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
“다른 것이라니??”
“너희들, 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아나?? 신이란 존재에 대해서는??”
“······모른다.”
“우리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먼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
“신은 단순한 개념. 태초에 두려워할 것이 많았던 원시 인류는 수많은 것들을 신으로 섬기며 두려움을 없앴다. 벼락이 치는 이유는 신이 노해서다. 폭풍이 부는 것도, 홍수가 오는 것도. 그 외 다양한 재난과 재앙. 그런 당시에는 과학적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신의 탓으로 돌리자 매우 편안해졌다. 이 세계는 모두 신에 의해 돌아가고 문제가 생겨도 신이나 그런 신을 노하게 한 인간의 탓으로 돌릴 수 있었지. 그래서 제물을 바치는 등 희생양 문화가 생겨났다. scapegoat. 그런데 과학이 발전하면서 점점 신은 자리를 잃어갔다. 우리는 전부터 그 점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프론티어를 통해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알아냈지. 신은 단순한 개념이라는 걸. 그리고 그런 개념을 유지시켜주는 원인은 바로 사람들의 무의식. 집단 무의식이다.”
“뭐라고!! 말도 안 돼!!”
바이올렛이 강하게 부정했다. 비록 그녀가 믿던 세르마가 악신이라고는 하나, 그녀는 세르마의 존재에 대해서만큼은 부정하지 못했다. 아니,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명백하게 체감할 수 있는 힘을.
“바이올렛인가?? 세뇌당한 가련한 양이로군. 네 말도 틀리진 않다. 어떤 실존하는 힘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분명 세르마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건 어떤 인격신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이 대량으로 믿기 때문에 그런 신앙심이 만든 허구의 존재이다. 즉, 세르마가 있기에 세르마 교단이 생긴 것이 아니라 세르마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세르마가 역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참 희한하지 않나?? 그렇다고 해도 세르마 그 자체는 어떠한 이유로든 존재하기에, 사람들의 무의식에 힘입어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힘을 더 늘리려고 한다. 즉, 영향력이지. 그렇기에 어떤 교단과 그 교단의 신을 믿는 자들이 증가하면 그 신의 힘도 증가하고, 반대로 모든 신자들이 다 떠나 잊혀 진다면 그 신 역시 소멸하게 된다. 그 개념을 알겠나??”
“말도 안 돼······.”
털썩 주저앉는 바이올렛. 비록 세뇌당해 세르마의 교단에 이용당했다고 해도 그녀가 느낀 힘은 분명 진짜였다. 그래서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바이올렛.
“바이올렛, 네가 느낀 힘은 네 자신의 것이다. 바바리안으로서의 너 자신의 힘. 아, 그리고 너희 바바리안들 역시 무슨 조상이나 자연을 신성시하고 거기에서 힘을 얻는 것 같던데,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는 실존하지 않는 힘이다. 단지 너희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했기에 의미가 생긴 것이지. 김춘수의 꽃이란 시를 아나? 아, 이건 너희 세계의 시가 아니라서 모르겠군. 그냥 플라시보 효과 정도라고 해두지. 너희가 믿는 신앙은 겨우 그 정도의 가치가 있으니까.”
“······.”
허 박사가 말하는 것은 이러했다. 플라시보 효과는 실제로 어떤 병에 효과가 없는 비타민 등을 약으로 처방했는데, 그것이 효과를 일으키는 경우다.
물론 비타민은 회복에 필수적인 존재이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병을 다 나을 순 없다.
그런데 만약 회복했다면 그것은 실제 약을 투여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약이라 생각한 환자의 믿음, 즉 정신 상태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것. 그것은 신앙과 비슷했다.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벌어지니. 그러나 신앙이란 겨우 그 정도의 물건이었단 말인가?? 신을 믿지 않는 루드도 그런 말을 듣자 매우 씁쓸해졌다.
“너의 모든 말을 믿을 수는 없지. 하지만 일리는 있군. 그래서, 그렇게 잘난 너는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
“훗훗, 보여주마. 내 실험의 결과를! 브레인 스캐닝을 통한 뇌 자원의 서버화와, 프론티어라는 사상 최고의 게임이 낳은 결과를!! 그것은 이미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새로운 세계의 도래다!! 진화다!!”
촤르륵!!
마치 커튼을 펼치듯 허똑똑 박사는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물건들이었다. 그곳엔 온갖 몬스터들의 합성체가 다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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