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15층(3) - 수 싸움
“이봐, 너. 내 부하가 되지 않겠나?”
“뭐??”
뜬금없는 엠폴리오의 말에 루드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부하가 되라니. 루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머리가 좋은 것 같았는데 이해를 못하는군. 말 그대로다. 내 부하가 되라고. 저기 저 바이올렛과 같은 직위를 주겠다. 부단장. 바이올렛, 너는 용도폐기다. 만약 돌아온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지만 돌아오지 않는다면 처참히 죽여 버리겠다. 강간하고, 손톱 발톱과 척추의 추간판을 다 뽑은 후 팔다리와 혀를 다 자르고 널 내 인형으로 삼겠다. 그래도 구멍은 있으니 쓸 만하겠지, 낄낄.”
“미, 미친놈······.”
일행이 죄다 경악했다. 이들은 모두 최소 한번쯤 사람을 죽여 보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의 차원에서 행한 일이었다. 죄 없는 자들은 죽이지 않았고, 만약 죽여야 해도 최대한 망설였다.
그렇게 지금까지 행했는데 그런 망언이라니. 저건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히려 바이올렛은 덤덤했다. 저게 엠폴리오라는 인간이었다. 원래 그런 인간.
공포와 억압으로 이교도는 물론 같은 교인들도 억누르는데, 그에게 당한 같은 교인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성적으로든 폭력적으로든, 다만 다행인 것은 이 엠폴리오가 게이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바이올렛을 비롯한 여성을 건드린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게이라고 해서 여성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좋아하지 않을 뿐. 그에게 있어 여성과 하는 것은 단순히 싫어하는 음식을 먹는 것과 똑같은 행위였다.
단지 그것뿐인 행위. 그 사실을 아는 바이올렛은 이를 뿌득 갈았다.
“안 가. 당신에겐 다시 안 가. 나는 이 시간부로 세르마 교단의 이단 심문관을 그만두겠다. 그동안 내가 어리석었다. 너 같은 종자들과 함께 죄 없는 인간들을 탄압하고 있었다니.”
바이올렛은 이 던전에 들어온 후로 왠지 정신이 맑아졌는데, 그건 사실 교단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뇌에 간섭하던 주문의 영향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세르마 교단의 세뇌는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이 있었는데, 직접적인 것이 주문이라면 간접적인 것은 노래나 기타 시작적인 효과로 감각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르마 교단 특유의 행사나 예배 등을 보면 점점 멀쩡한 사람도 세뇌가 돼갔는데, 만약 세뇌가 된 사람이라면 그 세뇌가 더 공고해지는 식이다.
그렇게 세뇌가 되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이교도라는 이름의 죄 없는 자들을 때려죽였는데, 이 던전으로 들어와 교단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바이올렛은 점점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처음 루드와 이크를 만났을 때는 상당히 거칠었는데, 나중엔 비교적 온화해진 것이다. 일행도 그 이유는 몰랐지만 바이올렛이 전보다 부드러워진 건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일행의 말을 듣자 한숨을 내쉬는 엠폴리오.
“후우, 할 수 없군. 너희들은 모조리 세뇌해서 교단의 중요한 인재로 써주마. 보아하니 다들 상당한 실력을 가진 모양인데, 이런 인재들을 놓칠 순 없지.”
“우리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텐데??”
루드가 말했으나 엠폴리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지금까지 그런 말을 한 놈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교단의 개가 되어 예전 자신의 부모와 가족, 친구, 자식, 동포를 죽이는데 앞장서고 있다. 너희들도 그렇게 될 거다.”
“미친 자식······.”
이크가 혐오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했는데, 루드가 태연히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 난 고아거든.”
“?!”
“?!?”
엠폴리오를 비롯해 일행들도 루드가 무슨 말을 하나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는데, 루드는 태연히 말했다.
“어차피 난 고아라 아는 사람을 죽일 일은 없어. 그러니 세뇌를 하려면 마음껏 해봐라. 어차피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니.”
“상관이 없다고? 그래도 같은 나라나 도시의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는데?”
“알게 뭐야? 그 놈들은 내가 부모가 없다고 날 개새끼 취급했다고. 내가 뭐 처음부터 막 살았는 줄 알아? 나도 처음엔 그러지 않았어!! 그런데 그 놈들이 날 악마로 만든거야!! 켈켈켈, 오히려 좋은 기회군!! 차라리 세뇌되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 놈들을 죽일 수 있겠군!! 이봐, 날 세뇌해봐!! 세뇌해보라고!!”
“미친놈······.”
이제는 엠폴리오도 루드가 미친놈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건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미친놈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진짜 상미친놈이었군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일행들. 그러나 루드는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본심은 달랐다.
‘이봐, 내가 진짜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거 다 도발이잖아, 도발!! 싸움의 기본은 기선제압 몰라?!’
루드의 생각대로, 싸움의 기본은 기선제압이었다. 기선을 제압하면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상대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싸움이었다.
그러나 보통 실력이 우위에 있다는 것은 그런 분위기를 가져오는 능력도 우위에 있다는 것이므로 그런 어설픈 도발에 잘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싸움엔 100%가 없는 것. 솔직히 지금 일행도 전 세계를 통틀어서 내노라 할 강자들이었지만 자다가 칼 맞으면 죽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보통 그전에 알아채든가, 아니면 다른 무슨 비장의 방법이 있다. 그래서 강자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고 일단 루드는 특유의 트래시 토크로 기선을 제압해보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오히려 같은 일행에게도 오해를 사서 지금 쓰레기 보는 듯한 눈으로 보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쓰레기.”
“윽!”
“사기꾼!”
“잠깐, 사기도 안쳤는데 왜 사기꾼이야?!”
“강간범.”
“그러니까 내가 언제 강간을 했냐고!!”
아무튼 일행은 온갖 나쁜 호칭은 다 갖다 붙였는데, 그동안 루드가 보여준 언행들을 생각하면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근데 문제는 루드의 도발이 적은 속이지 못하고 오히려 아군을 속였던 것이다.
“제, 제길, 아니야!! 나는 그렇게까지 쓰레기 같은 놈은 아니라고!! 믿어줘!!”
지긋-
그러나 일행은 지긋이 루드는 쳐다보고 있었다. 원래 범죄자가 아니라고 하면 더 믿음이 가지 않는 법. 그러자 루드는 다시 작전을 바꿨다.
“크큭, 그래 사실 나는 아까 말했던 대로 모든 인간들을 죽일 생각이다. 세뇌가 된 상태로 아무 죄책감이나 지금의 기억 없이 마음껏 죄 없는 인간들을 학살해주지!!”
“아, 역시 미친놈이다!!”
“본심이 나왔다!!”
일행이 그런 소리를 하자 루드는 부글부글 했는데,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야!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쓰레기 짓을 한다고 해도 쓰레기 취급, 안 한다고 해도 쓰레기 취급!! 날보고 어쩌라고!!”
“뭐 알아서 하세요.”
“······.”
“당신이 뭐 쓰레기인 건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만······.”
이크의 말에 루드는 뭔가 찜찜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건 어차피 해명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자신은 이미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휴······. 할 수 없군.”
“이봐, 그런 취급을 받느니 진짜로 세뇌당하고 새 삶을 사는 게 낫지 않겠어?? 차라리 과거를 세탁하고 학살자로서의 새 삶을 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게다가 반겨주는 이 없는 여기와는 달리, 우리 교단에서 열심히 일하면 그런 학살자의 너라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아니, 오히려 학살자라 더 좋아한다고 해야 되나??”
“······그만둘게.”
루드는 지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그러다 갑자기 돌진!!
쾅!!
“하하, 역시 넌 재밌어. 꼭 내 것으로 하고 싶군.”
“내 것이라니. 소름끼치잖아. 마치 날 니 성적노예로 하고 싶다는 말로까지 들리는데.”
“이제야 알아챘어? 그건 사실이야.”
그러자 루드는 진짜로 소름이 끼쳤다. 팔에 닭살이 돋은 것. 그리고 바이올렛을 쳐다봤는데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저 자는 진성 게이다. 여자는 건드리지 않고 남자만 건드린다.”
후덜덜. 그렇게 루드가 떨고 있는데 그러자 이크가 약간 밝은 표정이 되었다.
“다행이다. 그럼 져도 최소한 육노예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군요.”
“아니, 게이라고 해서 여자와 못하는 건 아냐. 저자의 특기는 기만과 억압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상대를 굴복시키며 희열을 얻는 것이 저자의 특성이야. 아마 세뇌하는 과정에서 잘 안되거나 너희의 정신을 무너트릴 수 있다면 자기 취향이 아니라도 마음껏 손댈 걸? 그러니 그런 섣부른 환상은 가지지마.”
덜덜덜. 이젠 이크나 플로드도 떨기 시작했는데 비치는 왠지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물어보는 바이올렛.
“넌 무섭지 않냐?”
“네. 전 누구든 제 안을 채워줄 육봉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너도 참 정상이 아니구나.”
절레절레. 바이올렛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이게 몽마의 본질이었다. 비치는 서큐버스.
지금 비치가 루드 옆에 붙어있는 것도 그녀를 충분히 만족시켜주기 때문이지, 만약 더 이상 그러지 못하거나 루드가 죽거나 불구가 되면 그녀는 떠날 것이었다.
몽마는 성적 만족을 먹고 사는 존재. 단순히 정액에서 나오는 에너지만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여자도 가능하면 좀 더 섹스를 잘하는 상대를 원하는데, 그런 성의 화신인 서큐버스가 어지간한 상대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지금 루드는 신체능력이나 마나가 뛰어나서 그 적임자지만, 솔직히 엠폴리오가 그 상대라고 해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보면 루드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여자란 참 무섭네요.”
“네가 할 소리냐.”
마찬가지로 한기를 느끼는 안내양을 보고 바이올렛이 핀잔을 줬는데, 그렇게 농담을 하면서도 일행은 천천히 진형을 이동하는 중이었다.
엠폴리오를 둘러싸고 철저하게 포위망을 형성하는데, 이들도 이젠 하루 이틀 싸운 게 아니라 싸움의 베테랑이 다 되어서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냥 프로였다. 프로 그 이상.
어떤 무인의 숙련도는 실전을 경험한 만큼 달라진다. 훈련도 중요했지만 아무리 훈련을 해도 극복할 수 없는 실전의 벽이 있었다. 실제로 실전은 훈련의 몇 배에 달하는 효과를 가진다고 한다.
그렇게 일행은 농담을 하는 척 하면서 빙글빙글 돌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진형을 잡고 있었는데, 엠폴리오도 가만히 듣고 있는 것 같았지만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강한 그라지만 루드 일행은 워낙 수적으로 압도하는데다 그 실력 하나하나도 장난이 아닌 인물들. 방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엠폴리오는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를 느꼈다.
“농담하는 거 들어주면서 자리 잡는 거 기다렸는데 준비는 다됐나?”
“······얼마든지.”
‘역시 다 눈치 채고 있었나.’하고 루드는 생각했는데,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세계 최악의 집단 중 하나인 이단 심문단,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단장이 그리 만만할 리가 없었다.
그는 일행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천천히 움직여 사로(死路)를 피했고, 반대로 자신이 그 진을 깨치고 나갈 수 있는 활로(活路)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움직임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일행과 그와의 치열한 수 싸움이었다.
이들은 마치 바둑을 두듯 본격적인 전투 전부터 수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간다?”
“얼마든지.”
이젠 루드의 질문에 엠폴리오가 똑같이 답했다. 두 사람의 검이 격돌했다. 지금까지의 몸 풀기와는 다른, 진정한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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