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10층(4) - 풋내기
솔직히 말해서 포커라고 해도, 같은 나라, 같은 대륙이라도 그 룰은 다르다. 완전히 천차만별. 이 왕국에서는 백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두 번째로 높은 족보로 치지만, 사실 대부분의 왕국에서는 백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오히려 그냥 스트레이트 플러시보다 더 낫게 친다.
분명히 백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그냥 스트레이트 플러시보다 확률이 7분의 1도 되지 않는데 이상한 상황. 하지만 룰은 룰이다. 나라에 따라 다르고 도박장에 따라 또 다른 포커의 룰.
하지만 그 나라는 달라도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는 항상 최강이다. 나라에 따라 또 같은 족보라도 그 문양에 서열을 따져 스다하클(스페이드>다이아>하트>클럽)의 순으로 서열을 매기는 나라도 있지만 그냥 문양에 상관없이 족보만 같으면 비기는 곳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나라, 그 어떤 도박장이라도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는 최강. 따라서 이 남자가 쓴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 역시 도박장 6인방이 쓰는 최강 기술이다.
그 정체는 순간적으로 심, 기, 체를 일체화시켜 실체가 아닌 정신력을 검기화시키는 기술이다. 말하자면 거의 심검. 무형검이라고도 불리우는 기술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약간 다르다. 아직 그 초입의 초입의 초입에 해당하는 정도? 이런 걸 가지고 심검이라고 하면 어디 가서 욕먹는다.
진짜 심검은 처음엔 완전히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형체가 뚜렷이 드러나지만, 다시 절정에 이르면 그 형체마저도 사라진다. 그야말로 심즉살. 의지만으로 사람을 죽인다. 그 정도의 검기.
하지만 이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는 일시적으로 모든 기운을 뿜어내 검기를 날리는 기술. 100% 죽인다고 장담할 수도 없거니와 똑같은 심검이 아니면 방어할 수 없는 심검과 달리, 그 자체는 그냥 검기라 익숙하다면 막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루드가 초짜라 막지 못한 것. 강호 초출의 신출내기들이 흔히 겪는 상황이다. 충분히 그에 대응할 만한 기술은 있지만 실전에서는 당황해서 제 실력을 모두 뽐내지 못한다. 이것이 초짜와 베테랑의 차이. 괜히 무림에서 노회한 괴물들이 센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림이 없는 서방의 대륙이라도 동일.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루드는 이를 악물며 일어났다.
으득!!!
얼마나 세게 이를 악물었는지 이가 부서질 것만 같다. 프로 운동선수들이나 격투기 선수들을 살펴보면 나중에는 어금니가 다 닳아서 평평해진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는 힘을 줄 때 이를 악물어야 하기 때문. 전혀 상관없을 것 같지만 무는 힘이 강하면 다른 곳의 힘도 강하다고 한다. 아니면 무는 것이 인간에게 남겨진 최초이자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인가? 먹는 것은 곧 공격하는 것이자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튼 루드를 이를 부서질 듯 악물고 부들부들 몸을 떨며 일어났다. 마나로 칼날을 형성한 마검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상황.
평소엔 강하게 뿜어져 나왔던 마나도 그 힘을 잃고 칼날이 사라질 듯 말 듯 위태위태하다.
하지만 그 죽지 않는 눈빛. 다 죽어가는 상황인데도 그 눈빛만큼은 멀쩡하다. 루드는 씹어 먹을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안 좋군······.’
루드를 상대하던 남자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눈이 안보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잘 느껴진다. 마치 타오르는 듯한 강한 분노. 그러나 이건 어떤 증오 같은 게 아니다. 상대방을 쓰러트리기 위한 분노. 상대방에게 당한 자신에 대한 분노. 자신의 모자란 힘에 대한 분노.
루드와 이 남자는 그 전에 무슨 원한 같은 게 있었던 게 아니다. 다만 서로 그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싸울 뿐. 살다보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서로 원한이 없어도 싸워야 되는 상황. 이런 걸 보통 경쟁이라고 한다. 살다보면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일. 이런 건 원시사회 때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남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상황. 서로 다 힘을 합쳐서 다른 공동의 적, 몬스터나 퇴치하면 이 던전도 진작에 클리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인간은 그 던전에 도박장을 만들고 서로 속고 속이며 죽인다. 이것이 인간의 모순.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이 남자의 멀어버린 두 눈은 그런 인간 사회를 겪다보니 생긴 교훈. 이 남자도 처음엔 잘나가는 용사로서 교만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두 눈을 잃어버리며 얻은 교훈. 이는 자신보다 잘난 사람은 얼마든지 많고 살고 싶다면 적당히 중간만 가면서 바싹 엎드려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 강력한 검사를 거세당한 호랑이나 마찬가지로 만들었다.
씨를 잃어버린 생물은 그 활개를 피지 못하는 법. 도박장의 개로 살며 6인방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뒤나 닦아주며 구린 일 하며 살아왔던 남자이지만 지금은 당황하고 있었다.
다 죽어가는 것만 같던 루드의 몸에 생기가 돌아온다. 저 놈의 몸에 생기가 돌아온다!!!
루드는 조용히 검을 들어 허공에 큰 원을 그렸다. 이건 보름달을 형상화한 풀문 소드인가?
아니다. 비슷하긴 한데 뭔가 다르다. 계속해서 원을 그리는 루드. 그 움직임은 느리지만 빠르고, 천천히 움직이지만 거대하다. 뭔가 기묘한 느낌을 받은 남자.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다.
저 놈은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다!!! 그런데 이에 위기감을 느껴 재빠르게 달려들던 남자는 갑자기 이상한 걸 느꼈다.
마치 루드와 자신의 거리가 멀어진 것만 같다. 지척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루드가 갑자기 멀게만 느껴지는 상황. 달리면 순식간에 닿을 거리였는데 갑자기 거리가 좁혀지지가 않는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그런 남자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원을 그리던 루드가 갑자기 내뱉었다.
“루나 이클립스!!!”
콰아앙!!!
상공에서 거대한 검이 남자를 덮쳐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건 검이 아닌 검 그림자다, 루드의 검 모양을 따라 거대해진 검이 남자를 덮쳐왔다. 남자는 이를 피하려 애써본다. 하지만 아무리 피해도 그림자를 따돌릴 수는 없다. 루나 이클립스는 말 그대로 월식. 달조차 가려지는 현상이다.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가리는 현상이 월식인데, 태양과 지구, 달의 순서로 배열이 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그 정체는 단순히 달이 그림자에 가린 것. 하지만 고대인들은 이를 모르고 두려워했다. 달을 돌리기 위해 제사까지 지냈을 정도. 그 중에는 희생양을 바쳤던 곳도 있었다.
태양이 온 세상을 자애로 비추지만 동시에 사람을 말려 죽이는 경우도 있듯이, 달 역시 어두운 밤을 비추는 포근한 느낌과 함께 뭔가 음산한 기분을 주기도 한다.
달하면 생각나는 가장 유명한 늑대인간의 전설. 달의 힘이 가득 차는 보름달이 되면 미쳐 날뛰는 늑대인간이 있듯이, 달을 형상화하여 기술을 사용하는 루드 역시 달의 포근함과 동시에 무서움을 알고 있다.
어두운 밤을 비추지만 동시에 마치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달. 이건 루드가 도둑질을 하기 때문에 켕겨서 그런 것인가? 어쩌면 제 발 저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루드만이 느끼는 것이 아닌 것. 루드는 자신이 받은 그런 감정을 검기로 형상화했다.
“헉, 헉!!!”
눈이 먼 남자가 루나 이클립스를 피해 미친 듯이 도망간다. 하지만 멀어지지 않는 간격. 도리어 더 좁혀져만 간다. 햇빛이든 달빛이든 빛을 피할 수는 없는 법. 루드의 심상을 형상화한 검기는 결국 남자를 덮쳤다.
처음엔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고요한 밤처럼 다가와 사신처럼 앗아가는 목숨. 검기는 남자의 목숨을 난도질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남자. 이 심오하고 거대한 검기는 뭐란 말인가? 약관의 청년으로 보이는 자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어린 나이.
열아홉 살이면 성인이나 다름없다지만 대체 무슨 어둠이 있길래 이렇게 마음을 형상화한 검을 쓸 수가 있는거지? 단순한 좀도둑이 아니다. 남자는 루드의 배경을 몰랐지만 분명 뭔가 큰 어둠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심상의 검.
그에 비하면 아까 자신이 썼던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는 그야말로 장난에 가깝다. 심기체를 일체화하는 건 숙련된 검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반대로 그런 걸 하지 못하면 한 명의 검사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루드의 검기는 거대하고도 깊이 다가와 남자의 목숨을 삽시간에 뺏아 갔다. 처음엔 너무 고요해서 잠든 줄 알았다. 마치 자신이 잠든 것 같은 착각. 꿈을 꾸다 일어나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는데 이건 일어나 있는데 꿈을 꾸게 만든다. 밀물과 썰물이 달의 영향을 받듯이, 마치 그것처럼 고요하고 고요하게 생명이 빠져나간다. 고요하고, 고요하게.
그러다 갑자기 느껴지는 격통.
“으아아아아악!!!”
이 세상에 모든 것은 공짜가 없다. 그렇게 보이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 루드의 루나 이클립스가 그 시전에 시간이 필요했듯이, 마치 고요하게만 보였던 검기가 고통 없이 남자의 목숨을 뺏아 가기 위한 것이었듯이, 그것은 단지 그 후에 찾아올 고통의 전조에 불과했다.
본래 그 폭풍전야가 그렇듯이 오히려 큰 게 들이닥치기 전에 갈수록 더 고요해져 가는 법.
그러다 들이닥친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천재지변.
이 루나 이클립스도 똑같다. 솔직히 루드가 철저하게 계산하고 만든 기술이 아니다. 그저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라는 강력한 기술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상태에서 비몽사몽한 기분으로 만든 것.
어떤 심상 자체는 항상 루드의 마음 속에 있었지만 그것을 구현하기에는 깨달음이 부족했다. 그러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얻은 깨달음. 솔직히 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이미지 안에 있는 심상을 구현화한 것뿐이기 때문에. 하지만 루드가 두려워했던 월식은 상대방에게도 두려움을 낳았다. 눈으로 그 크기를 짐작할 수도 없는 거대한 달그림자가 검의 모양이 되어 상대방을 뒤덮는 것.
엄밀히 말하면 달그림자가 아니라 그림자에 가려진 달이다. 하지만 실제로 보기에는 그거나 그거. 검은 달이 남자를 덮쳤다. 그리고 격통에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다 숨이 끊어진 그.
털썩!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가 흐르지 않는 곳이 없다. 고요했던 그 기운과는 달리 완전히 시체를 엉망으로 만든 검기. 이것이 달의 무서움이다. 잠잠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숨겨진 진면목이 있다. 그야말로 The dark side of the moon. 모든 것에는 다 이면이 있다. 이 기술은 그러한 이면을 끌어낸 검기. 도저히 루드 따위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죽어가며 깨달은 기적. 그 정체는 루드의 마음 속 한편 어딘가에 항상 잠들어있던 달의 실체다.
루드는 적이 쓰러졌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그저 멍한 눈으로 털썩 쓰러졌다. 이대로 살아남는다면 엄청난 무기를 손에 넣는 셈이겠지. 하지만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털썩!!!
루드 역시 검을 날린 직후 쓰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그 손에 잡혀있는 검. 하지만 쓰러져도 검은 놓지 않는다. 설령 죽어도. 그런 루드의 앞에 온 몸에 피를 철철 흘리고 죽어가는 순간 멀어버린 두 눈을 뜬 장님 검사가 먼저 쓰러져 있었다. 루드가 살아남을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일단 오늘밤은 루드의 1승. 풋내기 검사가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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