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11층(8) - 문 속으로
배를 채운 일행은 그날은 이 층에서 쉬고 다음날 길을 나섰다. 이 층은 기존에 자주 봐왔던 것처럼 초원으로 돼있었는데, 앞으로의 층은 이렇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가능하면 이런 층에서 쉬어야했다.
부른 배를 두드린 채 초원에 누운 일행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던전임에도 이곳은 시공이 뒤틀린 곳이라 층 그 하나하나가 바깥과 연결이 되어있으므로 즉 하늘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달 밝은 상황. 달은 물론이고 별도 수없이 많이 보였다.
도심에서는 매연으로 인해 밤하늘이 오염되어 별이 잘 보이지 않지만, 시골로 들어가면 무수히 펼쳐진 은하수가 잘 보인다. 그것도 너무나 쉽게.
일행은 그런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행히 이곳의 하늘은 오염되지 않은 하늘인 것 같았다.
“별이 참 밝네요.”
“그러게.”
“언제까지고 이렇게 밝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영원히 그러지는 못하겠지. 이곳은 던전이니까.”
놀랍게도 이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크와 바이올렛이었다.
이크는 그렇다 치고 바이올렛이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니. 그러나 바이올렛도 나름 여자라 그런지 센치할 때는 센치해지는 것 같았다.
‘이교도 잡는 인간백정 이단 심문관도 이럴 때가 있다는 말인가??’
루드가 그 귀를 의심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대화를 계속했다.
“왜 인간은 이런 아름다운 하늘을 두고 서로 싸우는 걸까요?”
“하늘이 손에 닿지 않기 때문이다.”
“뭐라구요?”
이크의 의문에 바이올렛은 자기 나름의 주장을 펼쳤다.
“원래, 하늘. 하늘의 뜻은 그 누구나 인간들에게 널리 닿았다고 하지. 그러나 인간이 금단의 과실에 손대고 선악을 판단하게 되면서 영원할 것 같던 동산은 사라졌다. 인간은 내쫓겨서 영원히 춥고, 굶주리고, 고통 받게 되었다. 그것이 인간의 원죄.”
바이올렛의 말은 창세기의 신화다. 세르마의 신화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하늘에 도달하기로 한 인간에 분노하여, 신은 그 말조차 조각조각 나누고 다시는 인간의 뜻이 합쳐지지 않도록 저주를 내렸다. 그 이후 인간은 단 한 번도 그 뜻이 합치되지 못했다. 그것이 인간의 두 번째 저주.”
세르마의 교리에서는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를 저주로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말이 갈라진 것을 두 번째 저주로 여겼는데, 실제로 그렇게 말이 신에 의해 갈라졌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 이후 수천 년의 역사동안 수없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반복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쭈욱.
“어떻게 보면 인간이 선악과에 손댄 순간부터 이미 영원한 저주는 이어진 것이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경전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이 구원받을 일은 없다. 다만 묵시록에 의해 최후에는 구원받는 자들도 생길 수도 있다는군.”
“그럼 당신이 그 세르마의 이단 심문관으로서 하는 일의 의미는 뭔가요?”
“그걸 나도 모른다. 그저 의미 없는 쓰레기 치우기인 것뿐인지도 모르지.”
그 순간 일행은 이 바이올렛이 평소보다 훨씬 더 늙고 지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이올렛도 아직 20대인데 그런 지침은 쉽게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이올렛은 워낙 그 경험이 많아 마치 30대 이상의 나이로도 보이기도 했지만, 자세히 보면 20대의 외모였다. 다만 그런 나이보다 겉늙은 느낌이 난다는 것이지.
그런데 그런 바이올렛도 이번에 말을 들어보니 자신의 임무에 대한 어떤 회의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던전에 와서 심경이 변했나?’
아님 루드의 생각과 달리 평소부터 어쩌면 생각하고 있던 것이 던전으로 와서 표면화되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사람이 바쁘기만 하면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지만, 한숨 돌리고 망중한을 즐기다보면 도리어 어떤 문제에 대한 화두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이치.
바깥에서 이교도를 쳐 죽일 때는 몰랐는데, 이곳 던전에서 나름 동료라고 할 만한 인물들도 만나고 계속해서 몬스터에 대항해서 싸우고 때론 죽을 뻔하기도 하고 동료가 아닌 다른 도박장 6인방 같은 적도 만나면서 바이올렛은 별의 별 생각이 다 드는 상태였다.
그로인해 평소엔 하지도 않았고 애써 억눌러왔던 자신의 임무에 대한 회의가 드는 상황.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왜 그 일을 해왔던 건가?’
생각해보면 바이올렛은 철이 들 때부터 그렇게 이단 심문관 일을 해왔고 사람을 쳐 죽여 왔다. 그저 이교도라고 하면 죽이고 같은 교도라고 해도 그 목적이 다르면 죽이고 별의 별 사람들을 다 죽여왔다.
그런 바이올렛에게 살인은 숨 쉬는 것만 같았다. 오히려 죽이지 않으면 이제는 허전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그 갈증이 없어졌다. 지상에 있을 때는 죽여도 죽여도 그 피에 목말랐는데, 이제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아무것도 이상하지가 않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자신이 이상한 상황.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모르지만 나중에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면 뭔가 후회가 들 때가 있었다.
바이올렛은 아직 자신의 행동이 후회되지는 않았지만 뭔가 찝찝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우 큰 변화였다. 아예 느껴지지 않았던 지금까지와 비교하면 매우 큰 변화.
바이올렛은 자신의 변화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입을 열었다.
“루드, 넌 어떻게 생각 하냐. 내가 변한 것 같냐?”
그런데 루드는 말이 없었다.
쿠울--
“쓸모없는 놈······.”
자고 있는 루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바이올렛은 고개를 돌렸다.
‘자고 있는 것 맞나??’
이 루드라는 놈은 워낙 능구렁이 같은 놈이라 자고 있는 척하면서 안잘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깨워서 물어볼 수도 없다.
‘너 진짜로 잤어, 안 잤어하고?’
결국 바이올렛도 잠이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대화하던 이크도 바이올렛이 자기만의 생각에 빠지자 어느새 잠든 듯 싶었다. 그래, 일행은 그동안 너무 많은 시련을 겪었다.
코볼트, 고블린, 해골 병사, 놀, 오크, 유령, 서큐버스, 인큐버스, 인간 마법사, 트윈헤드 오거, 도박장의 하수인들. 지상의 어지간한 험지에서도 단시간에 이런 경험을 하기는 힘들 것이다.
과연 이곳은 던전이라 불릴 법했다. 어지간한 병사들을 이곳에 던져 놓는다면 더 단단하게 변해 정예 병사가 될 것이다. 아니면 죽든가. 그 둘 중 하나다. 중간은 없다.
‘나도 자야지, 자는 것이 이득이니까.’
잠이 보약이다. 자는 순간만큼은 도둑이든, 사제든, 이단 심문관이든, 마법사든, 인큐버스든 서큐버스든 모두 평등해진다. 그리고 편안해지고. 잠만이 안식의 시간.
낮 동안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잠이라는 과정을 통해 치유되고, 회복된다.
그래서 밤은 휴식의 시간이다. 회복의 시간이고.
일행은 나란히 초원에 누워서 잤다. 부드러운 양털 같은 어린잎이 일행을 편안히 받쳐주었고,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씨는 4월의 밤도 따스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죄다 일행은 마나도 익힌 데다 노숙 생활에 익숙해서 어지간한 추위나 더위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저 망토 하나만 있으면 그걸로 온 몸을 감싸서 잘 잔다.
일행은 그렇게 모처럼 편안한 잠에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 일행이 마주친 것은 지옥이었다.
“뭐야, 여긴. 지옥인가??”
“네, 아무래도 그래 보이네요.”
초원의 끝에서 일행이 발견한 것은 거대한 지옥문이었다. 뼈로 된 문에는 좌우로 낫을 든 해골이 달려있었고, 이 뼈도 혹시나 무슨 돌이나 조각이겠지 싶었는데 진짜 뼈였다. 진짜 뼈.
“어떤 미친놈이 이런 문을 만들어놓은 거야?”
“게다가 쓸데없이 정교하게 만들어놓았네요.”
“재능낭비라고나 해야 하나.”
일행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이 문을 바라보았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데 이렇게 시간을 끄는 이유는 말 그대로 들어가기 싫기 때문이었다. 들어가기가 싫다. 그것이 본심이다.
이 일행은 모두 나름 상당한 수련과 경험을 쌓은 백전노장의 용사들인데도 불구하고.
“진짜 들어가기 싫네요.”
“꺼림칙하다.”
플로드는 물론 바이올렛마저도 한마디 했다. 바이올렛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진짜 심각한 문제였다.
바이올렛은 워낙 사람을 많이 죽인데다 어지간한 던전과 몬스터는 다 겪어보아서 그 깡이 어마어마하게 세다. 일반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담.
그런데 그 바이올렛이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바이올렛의 본능.
보통 강한 자를 보면 단순히 그 완력이나 기술이 강한 것이 아니라 감이 매우 좋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결국은 못 버티고 죽는 곳이 있기 때문.
즉 강한 자로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감이 뛰어난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바이올렛 같은 강자가 몇 명이나 있어도 모자랄 험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예 들어가지를 않는 것이다.
사실 그런데는 보통 누군가 가라고 시키지도 않고 가도 얻을 것이 없다.
보통 잃을 것 없는 용사들이 자신들의 명예를 올리고 그에 따라 부를 얻기 위해 도전하는데, 사실 클리어한 이야기만 전해져서 그렇지 그런 던전이나 위험한 곳에 가서 죽는 자들이 훨씬 더 많다.
클리어한 이야기만 전해지는 것은 1등만 살아남는 이 세상의 이치 때문.
마찬가지로 실패자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 건 워낙 많기 때문에.
아무튼 일행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그 문을 열었다.
원래는 단순히 빛 덩어리로 되어있는 차원문이 이런 꺼림칙한 형태로 되어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뻑뻑한 문은 가까스로 열리더니 불쾌한 소리를 자아냈다.
끼이익······.
“거 더럽게 불길하네.”
“이 문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뻑뻑한 문이었는데, 이 던전의 차원은 항상 바뀌므로 정말로 이번의 이 문이 처음 나타난 특이 케이스일 수도 있다.
일행이 처음 본 것일 수도 있는 상황. 어쨌든 여기서 통과하지 않으면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으므로 일행은 내키지 않는 한발 짝을 나섰다.
어차피 일행은 지상으로 돌아가 봤자 얻을 게 없다. 모두 지상에선 소외당하거나 버려진 사람들. 어떤 의미로는 없는 존재와 같다. 한 번도 사랑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자, 가자.”
“젠장.”
루드가 앞장서고 인큐버스가 잘하지도 않는 욕지거리를 하며 뒤따라 나섰다.
이후 바이올렛, 이크, 플로드, 비치가 나서는 상황. 남자들이 먼저 나서고 가장 강한 바이올렛이 사제는 이크를 보호하며 중앙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후방에 마계생물인 서큐버스 비치. 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지금 일행이 생각하는 베스트 포지션이었는데, 마치 장기나 체스와 비슷했다.
‘그럼 우리는 졸이나 폰이란 말인가??’
게임에 대해 잘 아는 루드는 그런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졸은 물론이고 폰 역시 사실 어떻게 보면 최강의 말이다. 승급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튼 일행은 그 꺼림칙한 문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과연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