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17층(2) - 세상을 멸할 힘
콰앙!!
두 사람의 검이 서로 격돌했다. 사실 저번 층에서도 이런 종류의 갈등은 있었다.
부모와 자식의 갈등. 그러나 이 갈등은 그 갈등과는 다른 것이다.
저번의 그 갈등은 이크와 플로드의 부모인 실반이 두 사람을 강제로 데려가기 위한 것이었다.
실반은 두 사람을 거의 버리듯 방치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아들들이 서로 경쟁하다 무너지자 버린 두 딸을 찾았다. 하지만 데리고 가는 덴 실패.
심지어 일행은 한번 실반을 쓰러트렸음에도 불구하고 살려주었는데, 미친 실반은 납득하지 못했다. 그런 생명을 구원받은 은혜도 알지 못하고, 그저 귀족가의 후손을 잇기 위해 집착했다.
그는 괴물이었다. 귀족이란 어떤 틀에 집착한 괴물. 그저 그가 부모에게 강요당하고 세뇌당한 대로, 오직 가문을 잇기 위해서만 행동한다.
가문의 명성을 드높이고, 유지하기 위해 행동하는 괴물. 사실 많은 귀족들이 그랬다.
그들은 그런 귀족이란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남을 해하고, 모략하며 서로 싸운다. 사실 귀족이란 허울이 작은 건 아니다.
권력은 부를 부르고, 명예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높여줬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정체성은 없고 그저 귀족가를 잇기 위해 괴물이 된 그들······.
그러니 그런 괴물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오로지 죽음을 안겨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처리했는데 이번의 이들은 그 실반과 달랐다.
똑같이 버렸지만, 그들에겐 대의가 있었다. 세계를 구해야한다는 대의. 그렇게 20년 간 세계를 구하며 마왕을 쓰러트리고 악의 잔당을 청소하며 세월을 보냈는데 그의 아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의 유일한 실수. 허점. 그러나 루드 자체가 그 옥의 티라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렇게 낳아놓고도 악의 씨앗을 없애느라 돌보지 못한 아들.
그렇게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해 아들을 어느 마을에 두고 가고 이후로도 악의 잔당과 싸우느라 찾아갈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만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들이 찾아왔으니.
그래서 남자도 말했다.
“우리에겐 사명이 있었다! 대의가 있었다!! 그래서 널 찾아갈 수 없었다!!”
“시끄러워!! 그 말은 듣고 싶지 않아!! 그저 우린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너희들은 이제 와서도 나를 막는 거냐!! 나는 아무도 구속할 수 없어!! 구속되지 않아!!!!”
촤촤촤촹!!!
루드는 미친 듯이 검을 뿌리며 공격했다. 그의 분노는 극한에 달했다. 폭발 직전. 아니, 폭발했다. 살면서 이렇게 분노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을 버린 부모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열 받는데, 그들이 이 앞은 위험하다며, 가지 말라고 한다. 루드는 이 점이 어이가 없었다.
“여태까지 어디서 뭘 해놓고!! 나의 의지는 나의 것이다!! 아무도 날 방해할 수 없어!!”
“이 앞은 지옥이란 말이다!!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어!! 거기 있는 건 ‘신’ 그 자체다!!”
“신??”
“그래. 그는 신이라 불린다. 전지전능. 그렇게 모든 것을 알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자를 우린 신이라 부르지. 경고하는데 나아가지마라!! 그럼 순식간에 찢어발겨 한 줌 재가 될 뿐이다!!”
“그 자는 신이 확실한가??”
“그렇다.”
“너는, 악마와 신을 구별할 수 있나??”
“?! 악마란 기운부터 다르지. 우린 평생을 그런 악을 배제하며 살았다. 악마를 모를 수는 없어!!”
“악마란 참으로 교묘하지······. 악마의 꼬임을 알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갔을 리가 없다. 너흰 정말로 그 앞에 있는 게 신이라 단언하나? 악마가 아니고??”
“······. 비록 악마라 하더라도 너흰 그를 못 이긴다.”
“흥, 결국 당신들도 그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선 의심해본 모양이로군.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어.”
“중요한 건 악마냐, 신이냐가 아니라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우린 오랜 세월동안 온갖 악마를 다 겪어보았지만 그런 자는 처음 보았어!!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우린 그에게 널 보내줄 수 없다!! 그래서 이 수문장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야!! 그를 귀찮게 만드는 자들을 배제하려!! 알고 있나?! 이 17층은 그래서 차원이 고정된 곳이다!!”
“흐음······.”
루드 뿐만 아니라 일행도 생각에 잠겼다. 차원이 고정된 곳이라는 것은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안전지대라는 말도 되지만, 반대로 말하면 출구와 입구가 반드시 이곳으로 통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층에서 2층으로 가면, 혹은 1층도 지상에서 들어오면 매번 차원이 바뀐다.
매번 나타나는 몬스터가 달라지고, 어떨 때는 코볼트? 어떨 때는 노움? 고블린? 오크? 드워프? 엘프? 심지어 트롤? 이렇게 각 층은 대부분 고정된 차원이 아닌 유동하고 변화되는 차원이었다.
그렇게 온갖 차원에 걸쳐 갖가지 몬스터들을 불러오는데 그와 반대되는 고정된 차원이 있었다. 지하 도박장이 있던 9층과 이 17층. 이 두 곳만이 아직까지 발견된 유이한 안정된 차원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런 안정된 층만은 몬스터의 공격이 없고 모험자들이 쉼터로 쓸 수 있었는데 이런 층에서 용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루드의 부모라고 주장하는 그들.
실제로 부모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느릅나무 문양 얘기가 사실일 경우 아마 맞을 것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루드의 온 몸을 가르는 분노.
지금껏 자신을 방치해뒀던 부모가 이제 와서 나타나 자신을 지킨다는 뻔뻔함에, 루드의 분노는 커져버렸다. 극도에 달한 분노.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기술을 이끌었다.
“누구도 날 방해할 수 없어!! 누구도 날 구속할 수 없다!! 으아아!!!”
콰앙!!!
루드의 몸에서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뭐, 뭐야?!”
일행은 모두 당황했는데, 그들은 루드를 돕지 못하게 하기 위해 루드의 어머니라는 여자 용사 혼자가 상대하는 중이었다.
물론 일행도 루드의 어머니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해하기도 그렇고, 지난 층의 실반과는 달리 자식을 강제로 끌고 가려는 것이 아닌 보호하려는 의도였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렇게 가볍게 공방만을 주고받으며 서로 견제하고 있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혼자서 다섯 명을 상대하고 있는 여자는 참 대단한 것이었다. 과연 용사. 용사의 이름은 허명이 아니다.
그런 여자가 입을 열었다.
“각성했군요.”
“뭐?!”
김창남이 입을 열었는데 여자는 그런 몽마인 김창남을 마치 구멍을 낼 듯이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아이는 용사의 일족. 용사란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로 되는 경우도 있지만 분명 타고난 피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나와 남편은 모두 각기 다른 용사의 일족의 일원이에요. 그 일족이 서로 만나서 태어난 게 저 아이. 그리고 용사의 일족은 그 수도 적고 교류가 적지만 만약 다른 일족이 서로 만나서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는 엄청나게 뛰어난 자질을 보이죠. 그러니 저 아이의 잠재력은 보통이 아닐 겁니다.”
“그랬나······. 루드의 실력은 우연이 아니었나······.”
그제야 일행은 납득했다. 이상한 게 있었다. 아무리 감시자의 고기를 먹고 바이올렛의 세례에 의해 마나를 각성했다고 해도, 그는 터무니없이 빠른 시일 내에 강해졌다.
그 성장 속도는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일행도 모두 지상에서부터 한가락 하는 인물들이었지만, 저런 타입은 본 적이 없다. 괴물, 거의 괴물이었다.
“괴물······.”
“그래요, 어떻게 보면 괴물이죠. 용사의 일족은 터무니없는 속도로 전투경험을 흡수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같이 싸운 당신들은 이미 어느 정도 눈치채지 않았나요??”
“확실히······.”
모두가 납득했다.
가령 예를 들어 안내양은 그런 루드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편에 속했는데, 처음에 밀리던 루드는 어느새 자신의 기술을 모두 흡수하여 도리어 더 강한 공격을 보여주었다.
힘, 기술, 속도, 모든 면에 있어서 급속도로 성장했는데 마치 싸우면 싸울수록 더 강해졌던 것이다.
“마치 사이X인 같군.”
“예??”
“아, 아무것도 아냐, 헤헤.”
자신의 의문에 김창남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넘어가버렸는데,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이크는 루드를 바라봤다.
“루드······.”
처음 만났을 때 루드는 단순히 해골 병사들과의 싸움에서도 기진맥진할 정도였다.
그런 기억이 아직 선한데 루드는 어느새 무척 강해졌던 것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일행 중에 루드를 제일 처음 만난 건 이크였다. 그래서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이크 역시 루드에게 정이 많았다. 미운 정, 고운 정.
그렇게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성추행할 때는 심지어 죽이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다. 어쩌면 그 역시 하나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부모가 없이 무시당하며 좀도둑질로 삶을 연명했던 아이······.
그는 자신과 똑같았다. 마찬가지로 귀족의 사생아로 수녀원에 들어가 평생을 살았던 자신.
그러다 암살 위협을 받고 수녀원을 나와 이렇게 던전에서 우연히 그들은 만났는데 이것이 인연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크는 외쳤다.
“루드, 지지 말아요!! 당신의 미래는 자기 스스로 개척해요!! 남들에게 지지 말고!!”
“오냐, 내 삶은 내가 개척한다!! 그 누구도 날 방해할 수 없어!!”
루드의 온 몸에서 솟아오른 불길이, 꺼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꺼진 게 아니다.
온 몸에서 솟아오른 불길이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멀스멀 옮겨가더니, 불꽃은 한 점에 모였다. 불꽃이 멈춘 것은 바로 검.
그렇게 온 전신의 불길을 모아, 검은 탐욕스럽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불꽃을 품은 마검의 날.
새로 태어난 루드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화르륵!!
“큭!!”
남자 용사는 당황했다. 솟아오른 불길이 미처 닿지도 않았는데 타격을 입힌다.
열기는 피부를 태우고, 코와 눈의 점막을 메마르게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숨을 쉬기가 어렵고, 눈을 뜨기 힘들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는데 플로드가 물었던 것이다.
“저건 뭐죠?? 불꽃의 검인가요??”
그에 여자 용사가 답했다.
“아뇨, 저건 태양의 검입니다.”
“태양의 검??”
“용사의 일족은 여러 무리로 갈리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쓰는 힘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여러분들은 그전에 저런 힘을 본 적이 없습니까??”
“네, 저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우리가 알기로 루드의 검은 무슨 달의 힘을 형상화했다고 들었는데. 그렇죠, 언니??”
“응.”
플로드의 말에 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도 서로 언니, 동생하기는 했는데, 이번에 자신들의 부모라 주장하는 실반을 만나고 그 호칭은 굳어졌다.
정말로 자신들이 그의 자식인지는 몰라도, 그게 아니면 이름을 알리도 없고 전혀 상관없는 두 사람을 쫓아서 이 던전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후계자가 없다고 해도.
아무튼 그랬는데 자신과 같은 불의 힘을 쓰는 걸 보고 플로드는 관심이 생긴 상태였다.
그런데 불의 힘이 아니라 태양의 힘이라는 것이다.
“불과 태양이 다르나요??”
“다르죠. 태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불의 집합. 심지어 이 행성 내부를 흐르는 불 조차 그런 태양에게는 상대가 안 됩니다. 그것처럼 태양은 강대한 힘이에요.”
“쳇!!”
자신이 쓰는 불의 힘이 과소평가 당하는 것 같자 플로드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를 대충 알아챘지만 내색하지 않는 여자. 그러나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안 좋군요.”
“예??”
“이전까지 태양의 힘을 쓴 적이 없다는 건 오직 달의 힘만 썼다는 것.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달의 일족입니다.”
“과연······.”
일행이 모두 납득하는데 여자는 자신의 검에서 달의 힘을 형상화해보였다.
촤랑!!
그러자 확실히 믿게 된 일행.
“분명해!! 저건 루드가 평소에 쓰던 루나 소드다!!”
“이런, 이름마저 그렇게 지었던가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혈통이란 참 어쩔 수 없군요. 이 점이 말하는 건 딱 한가지입니다. 저 아이, 루드라고 이름 지어졌었죠??”
“네.”
“그럼 이제 확실하네요. 저 아이는 세상을 멸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양의 힘과 달의 힘. 그 두 힘을 합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죠. 혼돈의 힘이 되어.”
그러자 일행은 모두 오싹해졌다. 세상을 멸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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