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17층(6) - 마지막 비기
비련. 비련에는 슬프게 끝나는 사랑이란 뜻도 있지만 애절한 그리움이라는 뜻도 있다.
지금 용사도 그런 그리움을 맛보고 있었다. 아니, 연인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사랑이니 슬프게 끝나는 사랑이란 뜻도 맞는 것인가??
비록 그가 승리하든 지든, 용사는 비련을 맛볼 것이다. 거의 20년 만에 만난 자식의 헤어져야 하는 비련.
자신이 이겨도 아들은 납득하지 않으며 어쩔 수 없이 물러날 것이며, 자신이 지면 아들은 자신을 밟고 넘어가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난 단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갈 뿐······.’
용사는 각오를 굳게 다졌다. 그러나 이런 반항적인 아들의 모습을 보자, 자신 역시 과거가 생각났다. 마찬가지로 반항적이었던 자신의 과거.
콰당!!
용사는 쓰러졌었다. 그의 아버지에 의해. 쓰러졌다고 해도 무슨 생사를 건 싸움에서 진 것이 아니다. 늘상 있는 대련. 용사의 일족에게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마을에서 나가기 전 성인이 되기 전까지 그들은 그렇게 부모나 선배와 함께 겨루며 무를 수련한다.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
그렇게 대련을 했는데 당연히 항상 질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더 어린 애들이면 모를까 아버지나 형들을 상대로 해서는 이길 수 없다. 결국 또 진 어느 날. 그는 눈물을 흘렸다.
“크흑!! 으아아아앙!!!”
“사내자식이 어디서 우는 거야!! 그래 가지고 악을 퇴치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식이 우는 걸 본 아버지는 윽박질렀다. 용사의 일족은 모두 언젠가 악과 싸워야 하는 운명. 그런 약함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용사가 운 이유는 달랐다.
“아파서 우는 게 아니야.”
“그럼?”
“지고 싶지 않아!! 아버지든 누구든 지고 싶지 않아!! 난 강해질 거야!!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더 강해질 거야!!”
“······.”
그 말을 들은 용사의 아버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용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젠간 너도 이기게 될 거다.”
“진짜??”
용사는 눈물을 흘리다 말했다.
“언젠가 너는 이기겠지······. 이 아버지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꺾고서. 그것이 태양의 일족의 숙명이다. 너무나 강해, 이기고 싶지 않아도 모두 이겨버린다. 나중에 너는 다른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어떤??”
“올바르게 이기는 법에 대해서 말이지······.”
“올바르게 이기는 법??”
“힘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다. 이겼다고 해서 무조건 이긴 것이 아니다. 막대한 힘을 가지고 약자를 핍박하는 자들······. 그런 자들이 많다. 용사의 일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지. 우리 일족 중에도 사명을 저버리고 그런 힘에 도취해 세상 밖으로 나가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타락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제2의 악이 되어버리지. 자신이 퇴치한 악보다 더한 거악들······. 우리 용사의 일족의 의무에는 그런 사명을 저버린 동포들을 제거하는 것도 들어간다. 너는 언젠가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네 아비, 혹은 네 형. 어쩌면 네 자식과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모두가 착한 사람들인걸!! 아버지도, 형들도!! 그리고 내 자식도 그럴 거야!!”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좋으련만······.”
용사의 아버지, 그러니까 루드의 할아버지는 쓰게 웃었다. 거기에는 묘한 미소가 담겨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도 경험해보았다. 형제, 일족, 심지어 부모와의 대결도.
타락은 그의 부모조차 벗어날 수 없어서, 용사의 아버지는 자기 스스로의 손으로 또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던 것이다. 즉 루드의 증조할아버지를.
그런 과거가 있었는데 다행히 용사가 그의 아버지를 죽이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서로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다른 문제로 루드와 이 용사는 서로 맞붙었다.
‘이렇게 싸우게 될 줄은······. 힘이란 투쟁을 부르는 것인가??’
만약 그, 혹은 그의 아들인 루드중 한쪽이라도 힘이 없었다면 이 대결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그렇다. 투쟁이란 양쪽 모두가 힘이 어느 정도 있을 때 일어난다.
오히려 있지 않을 때는 일어나지 않는데. 만약 어느 한쪽이라도 힘이 없으면 그건 일방적인 폭행으로 끝나겠지······.
그러나 때로는 그런 폭행보다 오히려 어설프게 대들고 투쟁해서 더 피해가 커지기도 한다.
지금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양보할 수 없다!! 양보할 수 없다!! 이건 신념과 자존심의 문제이므로!!
“잠시 옛날 생각이 났지만 그렇다고 용서해 줄 생각은 없다. 생각해보니 나도 슬슬 짜증이 나는군. 옛날 나의 아버지도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물론 그건 대련이라지만 계속해서 덤벼드는 아들······. 나도 지금 그와 비슷한 기분이다. 넌 예의가 없어. 아무리 낳아놓고 근 20년 동안 보지 못했다지만 너무하는군. 내가 널 교육시켜주겠다. 아니, 훈육시켜주지.”
“하, 버려놓고 이제와서 훈육 운운하는 건가??”
“아니, 그건 애초에 사명 때문에!!”
“핑계 없는 범죄자는 없다.”
“!!”
“그들 모두 사정이 있고 가정이 불행해서 그랬다 말한다. 어찌됐든 너흰 날 버린 거야. 사명이라는 대의명분 때문에.”
“······솔직히 말하지. 만약 그 시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하더라도 난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비록 내 아들이라도 세계와 자식 하나. 당연히 널 선택할 순 없다. 난 세계를 지키겠다.”
“그래, 그게 용사겠지. 결국 당신의 주장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납득할 수는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동의한다.”
“그럼 싸워보자고!! 부모니 자식이니!! 대의니 명분이니!! 그런 건 모두 제치고 싸우는 거다!!”
“좋지!!!”
콰아앙!!!
다시 한 번 두 사람은 서로 싸웠다. 그곳에 이제 이해와 논리는 없었다.
그저 힘으로 굴복시켜, 납득시킬 뿐이다. 무자비. 무관용. 부모와 자식 간을 뛰어넘어 두 사람은 싸웠다. 검과 검이 난무한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튄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충돌로 인한 불꽃이 아니라 태양의 검에 의한 것.
비록 인간의 수준에 맞게 상당히 위력이 줄었다지만, 태양 그 자체를 형상화한 기운에 싸우고 있는 자들이 아닌 다른 자들은 모두 뒤로 물러났다.
단순히 보고 있는 자들이 이럴 정도니 진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피로는 엄청날 것이다.
그 결과 검이 스치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검이 만드는 열기와, 타인의 검이 만드는 열기의 힘으로.
그 결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사물이 왜곡된다. 일순 시야가 흐릿해지고 용사의 모습이 희뿌옇게 보인다고 생각될 때, 정말로 용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당황하는 루드의 곁에 소리만 남은 용사.
“잠시 착각인가 했지??”
“······!!”
“싸움의 와중에 피곤해져서 그런 것인가, 그래서 내가 시야를 놓친 것인가. 너는 잘못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 처음 솔라 소드를 배운 것에 비하면 아주 잘 싸웠지. 실제로 내가 처음 검을 배웠을 때에 비해 아주 나을 것이다. 과연 그 잠재력은 칭찬하지. 하지만 너는 아직 그 검의 깊이를 몰라. 단순한 검법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오의가 있는데, 이 최강의 검법에 그런 무수한 오의가 없을까보냐?? 오의, 비기. 너는 아직 한참 모자라다. 내가 그것을 깨닫게 해주겠다. 봐라! 이 단순한 진리를!!”
푸슉!!
용사의 검이 루드의 어깨를 갈랐다.
‘빌어먹을!!’
어깨를 감싸며 물러나는 루드. 용사는 지금 가시광선의 난반사를 행한 것이었다.
아지랑이로 인해 일순 시야가 흐트러진 순간, 용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술을 가했다.
가시광선. 빛. 말 그대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반사, 굴절되어 대상에게 닿지 않는다면?? 그 대상을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야말로 투명인간의 원리.
단순한 기술이지만 아주 잘 먹혔다. 사람은 시각에 대부분의 감각을 의존하는 생물.
아니,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이 그렇다. 귀나 코, 입을 잃은 생물도 살아갈 수는 있지만, 시각을 잃으면 그 어떤 생물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주변의 도움 없이는.
“아까 나의 플래시(섬광)에 한번 당했지??”
“······.”
“섬광이 너의 눈 그 자체의 시력을 순간적으로 뺏는 것이라면, 이 기술은 보여도 보이지 않게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시각이 멀쩡하든 멀쩡하지 않든 태양의 검에 상대방을 농락하는 기술은 많다. 너는 그 일각을 본 것이다.”
“하, 그래봤자 잔재주······.”
“?!”
“너는 그런 기술을 쓰고도 나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이건 빙산의 일각이라 말했을 텐데?? 널 죽일 기술은 무궁무진하게 많다.”
“그럼 죽여라!! 내 삶은 내가 결정한다!! 단순히 너희가 싸질러놓고 이제 와서 또 너희 맘대로 막고 있는데 나는 그렇게 놀아나지 않겠다!! 죽여라!! 나는 내 삶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
“미친······.”
용사 역시 혀를 내둘렀다. 그도 한 성질 했기에 한창 때 부모 말을 오지게 듣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부모보고 죽이라니. 물론 이는 루드가 용사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한 말이었다.
“세계를 구하든 뭘 하든!! 아이에게는 부모가 세계인거야!! 너희의 선택은 존중한다!! 너희는 용사로서!! 아니 사람으로서 아주 큰일을 해냈다. 세계를 구하고 또 구하고. 아마 몇 번을 구했겠지!! 하지만 너희는 단순히 낳아준 부모!! 너희가 나에게 해준 건 아무것도 없다!!”
“네가 쓰고 있는 힘, 그 신체!! 누가 줬다고 생각하는 거냐?!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해?! 우리가 널 낳지 않았다면 그 무엇도 가질 수 없었다!!”
“누가 낳아달라고 해?!”
“!!”
“나는 너희에게 출산을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건 단순한 우연이야!! 단순히 너희가 좋아서 떡치고 날 싸지른 것이지!! 날 구속하려 하지마라!! 난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누구보다도 자유롭다!! 날 가로막지마!!”
콰앙!!
루드는 온 몸에서 불꽃을 휘날리며 날아왔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날아온 것이었다. 그걸 보고 씁쓸한 얼굴로 혀를 차는 용사.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본능적으로 부스터를 쓰다니······. 과연 용사의 일족인가. 너는 내 자식이 맞다.”
태양의 기운을 뿜어내며 돌진하는 기술. 그것이 부스터이다. 이것은 달의 검, 루나 소드에는 없는 것이었다. 달이란 태양의 빛을 반사하여 빛날 뿐이고, 자력으론 빛나지 못한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태양의 검과 달리, 달의 검은 상대방의 검에 반응하여 상대방이 세면 셀수록 그 위력도 더욱 커졌다.
그것이 지금까지 루드가 강적들을 꺾은 비결이다. 그 결과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용사는 이런 루드의 잠재력에 크게 감탄했지만 비통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원래 자식에게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봉인할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이 정도로는 너를 쓰러트리지 못하겠지. 그리고 나에게 쓰러질 정도면 너는 다음 층으로 가지 못할 것이다. 코로나!!!”
콰아앙!!!
새빨간 불꽃이 분출된다. 이것이 솔라 소드 마지막 비기. 그렇게 분출되는 열기는 루드를 태워버리려 혀를 날름거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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