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15층(10) - 응징
멍--
바이올렛은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아니, 응시하는지 어쩌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응시한다는 건 사실 의지를 가지고 한 곳을 똑바로 바라본다는 거니깐.
그러나 지금 바이올렛의 내면에서는 엄청난 치열한 내적 갈등이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동안 바이올렛이 죽인 사람들, 고문한 사람들,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 사람들이 다시 튀어나와 바이올렛을 괴롭혔다. 그리고 바이올렛은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지마! 오지마!!!”
그렇게 바이올렛은 강대한 몸을 가지고서도 망령들에게 뒤쫓겨 도망갔다. 내면세계에서 바이올렛은 철저한 약자나 다름없었다.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런 간섭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능한 것은 쫓아오는 자들에게서 도망가는 것 뿐. 그렇다고 멈춰있으면 그들이 공격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세계는 단죄의 세계.
이단 심문관으로서 이교도를 벌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괴롭힌 바이올렛을 벌하기 위한 세계다.
비록 세뇌되어 바바리안으로서의 자신을 잊고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지만, 어찌됐든 바이올렛의 죄는 죄였다. 그럼 벌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쫓기며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의외로 외부에서 보이는 바이올렛의 신체 자체는 평온했다. 그래서 그 점을 지적하는 루드.
“근데 의외로 조용하네요?? 그런 무시무시한 저주라면 격통을 견디다 못해 신체가 발작이라도 일으킬 줄 알았는데.”
“태풍의 눈인 걸세.”
“예??”
“태풍의 중심인 눈은 오히려 그 외부와는 달리 매우 고요하지. 마찬가지로 지금 이 처자의 몸은 그런 태풍의 눈이나 다름없네. 하지만 그 내면은 태풍 그 자체. 즉 태풍이 반대로 된 것이라 보면 되네. 이 행성 역시 어느 한 곳에선 극심한 지진이나 쓰나미가 일어나도 다른 지구 반대편은 고요할 수 있네. 더 이상 어떻게 고요할까 싶을 정도로 조용할 수가 있지. 그와 마찬가지일세. 반대로 이 처자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만큼, 그 내면은 더욱 격렬할 걸세. 어쩌면 죗값을 다 치르지 못하고 그 전에 죽을 수도 있어.”
“그런······.”
바바리안들의 말에 루드는 물론 다른 일행도 모두 경악했다. 그리고 부연 설명을 해주는 바바리안들.
“이건 우리 선조에게서 들은 이야기네.”
“살아온 선조가 있나요?”
“물론. 저주를 건 세르마 교인들이야 누가 나쁜지 모르고 마구잡이로 저주를 걸었지만, 저주에 당한 선조들 중에서는 분명히 비교적 그 죄가 가벼운 사람이 존재했네. 바바리안들이라고 해서 모두 미친 존재는 아니었어. 개중에는 집단의 광기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지.”
“흠······.”
납득이 가는 얘기였다. 사실 상식적으로 바바리안 자체가 무슨 저주받은 종족도 아닌데 그렇게 모두가 미쳤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실제로 지금 이 비치와 김창남이라는 두 몽마도 겉보기에는 인간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는데, 그들도 잔혹해지려면 얼마든지 마계의 생물인 만큼 잔혹해질 수 있었지만 같은 마물이나 몽마라도 그 개체에 따라 특성이 모두 차이가 났다.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자매, 심지어 쌍둥이마저도 성격이 정반대인 경우가 존재한다.
반대로 같은 경우도 있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난다. 그게 바로 개체였다.
특성이자 특징이었고. 그러니 모든 바바리안들이 미친 것이 아니라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오히려 모두 미쳤다는 것이 의심스럽다. 그런 저주받은 종족이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어느 집단이나 조직이든 소수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네. 영향력이 없지. 발언권이 없고. 그렇게 그들은 동료 미친 바바리안들에 의해 전쟁에 끌려 나갔는데, 같은 바바리안이라도 다른 바바리안들과 달리 식인 등을 하지 않고 살상을 최대한 자제하고 적을 제압하는데 중점을 둔 바바리안들은 저주에 걸리고도 곧바로 풀려났네. 그리고 이 저주에는 또 다른 비밀이 있네.”
“뭐죠?”
“모든 저주는 어느 정도 시전자에게로 돌아오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건 절대적인 조건이지. 그게 마법과 저주의 다른 점일세. 마법은 준비된 시약, 도구, 마나 등을 매개로 현실의 마나구조를 비틀어 안정된 체계를 파괴하고 그 과정에서 원래는 얻을 수 없는 힘을 얻는 것일세.”
그 말에 루드는 마법사인 플로드를 힐끗 봤다. 그러자 그 시선을 눈치 채고 고개를 끄덕이는 플로드. 이 바바리안들의 말이 맞다는 뜻이다.
“반면 저주는 그런 도구나 힘, 매개 없이도 상대적으로 가볍게 발현할 수 있는 것이네. 물론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지.”
“뭐죠?”
루드의 물음에 바바리안은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상대방을 말 그대로 저주하는 것.”
“아!!”
“저주하고, 저주하고, 또 저주하고. 상대방의 죽음을, 혹은 질병을, 혹은 불행을. 온갖 일어나서는 안 될 불행하고 불운한 일들을 기원하는 것이 바로 저주라네. 그리고 온갖 준비를 갖춰야 하는 마법이나 주술에 비해, 저주는 상대적으로 아주 간단하네. 저주하기만 하면 되네. 다만 온 힘을 담아서. 그렇게 극도로 간절한 마음으로 저주하면, 누군가 들어주네.”
“그 누군가는 누구죠?”
“악신.”
“!!”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하는 바바리안들을 보고 일행은 경악했다.
“상식적으로 올바른 신이 그런 저주를 내려주겠는가?? 원칙적으로 정상적인 신은 저주를 들어주지 않네. 오히려 경우에 따라 그 정도가 지나치면 저주를 바란 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경우도 있지.”
“그게 정상적인 신이군요.”
“그렇네. 원래 신은 딱히 인간을 위하는 존재가 아닐세.”
“뭐라구요??”
“사실 생각해 보게. 신은 왜 인간을 위하는가?”
“음······. 신이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사제인 이크가 대답했다. 그녀는 수도원 생활을 했고 이런데 관심이 많아서 평소부터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런 주제가 나오자 바로 대답한 것이다.
“그런 이론도 있긴 하네. 하지만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건 여러 가지 설들의 하나. 태초부터 인간은 존재했고, 원숭이에서 진화했든 뭐에서 진화했든, 혹은 홀로 고고히 처음부터 인간으로 있었든, 신은 인간의 탄생에 관여하지 않았고 단순히 신은 그런 인간들보다 상위의 존재. 인간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생사를 관여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말도 있네.”
“그럼 그런 신들에겐 원칙적으로 인간을 위할 이유가 없다 이겁니까??”
“그렇네. 만약 만든 자라면 책임이 있어야겠지. 마치 자식을 낳은 부모처럼. 그런데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라면? 그들 역시 어딘가 머나먼 곳에서 온 그저 상위의 존재일 뿐이고, 그들에게 인간은 단순한 유희이자 관찰의 대상이라면? 그런 신이 변덕으로 인간의 부탁을 들어주고 지켜보는 경우는 있어도 책임지고 모든 것을 위해주는 그런 경우는 없을 걸세. 그런 필요도 없지. 말 그대로 신은 책임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행 중 어느 정도 신의 존재를 믿는 자들은 불신의 말을 내뱉었다. 그건 몽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말 그대로 악마. 그리고 악마들에게도 신이 없는 것이 아니다. 바로 마신.
그들의 존재가 악마들을 지탱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 신은 뭐죠? 우리의 마신은 뭔가요?”
“그건 나도 잘 모르네. 애초에 나는 그런 전공도 아니고 그저 지금까지는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이네. 다만 그런 의견도 있다 이거지. 그리고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마신이든 악신이든 인간의 신과 마물들의 신은 별 차이가 없네. 어차피 악한 신이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자네들은 몽마처럼 보이는데 난 딱히 악마들에 대한 선입견이 없네.”
“선입견이 없다구요??”
뜻밖의 말에 플로드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마법사. 말 그대로 마(魔)의 힘을 이용하지만 그녀 역시 악마들을 그리 믿지 많은 않았다.
그녀도 가끔 실험이나 계약 등의 이유로 인해 악마에게 뭔가를 물어보거나 계약하는 경우가 있는데 악마들은 참 믿기 힘든 존재였던 것이다.
‘잠깐, 이건 이렇게 되는 거였어?! 왜 말을 안 해줬어?!’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보통 악마들은 그런 말만을 남기고 킬킬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비싼 시약이나 금화 등의 재물, 그리고 막대한 마나를 먹어치우고도 그들은 물어보지 않았다고 해서 중요한 사안을 말해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놓고 나중에 따지면 ‘아, 그건 니가 안 물어본 거 아님? 물어봤으면 대답해줬을 텐데 안 물어본 니가 잘못한거임.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니가 나쁜 거야, 낄낄낄낄낄낄!!’ 이런 식으로 대답하며 사라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악마들의 특징이었다. 어느 일개 악마 하나 뿐만의 문제가 아니라.
악마들은 정신생명체이기 때문에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자신이 아예 모르는 사안이면 몰라도, 알고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답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존재의 성립에 위협을 받아 그들은 소멸할 수도 있었다.
최소한 막대한 타격을 입는 걸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악마가 인간과 달리 어찌 보면 ‘순수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는데, 순수선인 천사들과 반대로 악마들은 순수악이었다.
물론 지금 일행과 함께하고 있는 몽마들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그건 몽마들의 특성상 항상 인간들에게 기생해야 하므로 어느 정도 인간화가 됐기 때문.
어떻게 보면 그런 순수악을 ‘타락’시킨 인간이 대단한 것이었다. 악마들의 입장에서는 인간에게 물든 것이 타락이니. 아무튼 루드가 입을 열었다.
“그럼 바이올렛은 이제 어떡하죠?? 이대로 깨어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나요??”
바바리안들이 대답했다.
“앞서 말했듯이 그러하네. 이것만큼은 아무런 방법이 없어. 이 저주는 이단 심문단의 단장인 엠폴리오가 사력을 다해 건 것이네. 저주는 그 시전자의 강함이나 원념에 비례하여 강해지지. 그런 시전자가 건 저주라면 같은 영원한 저주라도 그 안에서는 아주 특급일 걸세.”
“특급이라니······.”
루드는 바이올렛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싸울 땐 악귀 같았던 이 여자도, 이젠 한낱 힘없는 식물인간이 돼있었다. 의식불명. 혼수상태.
그런 바이올렛을 보며 루드는 깨우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바이올렛, 일어나 봐요. 당신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잖아요.”
“루드······.”
그런 루드를 보며 이크는 눈시울을 붉혔는데, 매사에 진지하지 않고 변태인 루드도 이런 모습을 보이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 기대는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뒤집혔다.
갑자기 바이올렛의 뺨을 치는 루드.
“바이올렛, 일어나 봐요······.”
철썩철썩.
“저, 저기······.”
“그런 행동은 좀······.”
바이올렛과 만난 지 얼마 안 된 바바리안들마저도 그런 행동을 만류했는데, 루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이제는 가슴을 만지는 루드.
“바이올렛, 자꾸 정신 안 차리면 가슴 만질 거예요?(물럭) 계속해서 만질 겁니다?(주물럭)”
“이 변태 새끼야!!!”
결국 참다못한 이크가 정의의 응징을 날렸다. 이크는 미친 듯이 뛰어 이단옆차기를 날렸던 것이다.
퍽!!!
“으아아아악!!!”
“오, 멋진 헥토파스칼 킥!!”
보고 있던 안내양이 박수를 쳤다. 마치 폭풍과도 같은 모습으로 헥토파스칼 킥을 날린 이크.
그녀가 사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기술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크는 원래 상당히 운동신경이 둔했지만 분노로 이런 기술을 작렬시켜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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