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16층(2) - 사위와 장인
“저희를 아세요??”
이크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을 아는 사람이 이 던전에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은 수녀원의 몇몇 자매와 수녀, 그리고 수녀원장 정도?
그런 수녀원에서도 귀족의 사생아인 자신을 노리는 자객들로 인해 자신은 쫓겨나듯 도망쳐 나왔다.
죽어도 최소한 혼자 죽기 위해서였는데 그런 자신을 아무도 지켜주지 않고, 보호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은 혼자였다. 외톨이.
사실상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여기서 아는 척하는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누구지???’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보았으나 짐작 가는 사람은 없었다. 이건 플로드도 마찬가지.
“누구세요??”
가늘게 긴장하며 그런 물음을 날렸는데, 이 중년의 남자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아무래도 상황파악이 느리구나, 내 딸들아. 그래가지고 귀족위는 이을 수 있겠니??”
“귀족위?”
“내 딸??”
정작 두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일행들이 움찔했다. 이크와 플로드의 아버지가 나타나다니.
그런데 한 명의 아버지도 아니고, 두 명 모두의 아버지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 어떻게 제 아버지라는 거죠??”
당황하며 그렇게 물어보는 이크. 그러자 이 아버지라는 자는 한숨을 쉬었다.
“실망이구나. 그래도 부모자식간인데 못 알아보다니. 이 아버지는 참 슬퍼.”
크흑, 하고 짐짓 우는 시늉을 해 보이는 남자였는데, 일행의 시선은 더욱 싸늘해졌다.
그때 루드가 나섰다.
“당신, 이 녀석들의 아버지가 맞습니까??”
“그래, 자넨 누군가?”
“전 이 애들과 결혼할 사이입니다.”
“난 자네 같은 사위둔 적 없네만······.”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서로 팽팽히 맞서는 기운.
“저도 당신을 장인어른으로 둘 생각은 없습니다.”
“허허, 이런 싸가지 없는······.”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죠.”
“뭐? 그쪽?”
“그럼 이쪽입니까??”
남자는 이 루드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딸들을 데려가기 전에는 이 자부터 제압을 해야할 듯 싶었다.
“자네는 누군가?”
“먼저 밝히시죠. 당신은 누굽니까?”
“허허, 내가 먼저 묻지 않았나.”
“통성명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당신은 귀족이라면서 그것도 모릅니까??”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었다. 상대방의 이름을 알고 싶으면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혀야 한다.
그게 예의범절의 기본이었다. 이건 귀족이전에 인간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려면 알아야 할 기본이기 때문에 남자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대놓고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내심 붉어진 얼굴.
그러나 그것이 분노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꾸욱 참고 먼저 이름을 밝히는 남자.
“내 이름은 실반이다. 루움 왕국의 백작이지. 자네는 누군가?”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저는 밝힌다고 한 적이 없는데요??”
“뭐??”
“어디까지나 예의범절의 기본은 상대방의 이름을 묻기 전에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지, 그렇게 이름을 들었다고 무조건 이름을 밝혀야 합니까?? 게다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명의도용당하고 보이스피싱 날아오는 건 일도 아니라구요. 당신이 그런 조선족 보이스피싱하는 조직의 총수인지 뭔지 어떻게 압니까?”
‘이 새끼가······.’
빠직. 실반의 관자놀이가 튀어 올랐다. 무(武)를 단련할수록 튀어 오르는 관자놀이. 태양혈이라고도 한다.
그것만 봐도 이 자의 성취가 보통이 아님은 알 수 있었는데, 그런 상대를 대상으로 루드는 잘도 시비를 걸고 있었다.
‘역시 루드······.’
‘아가리 터는 것만은 그랜드 소드마스터 급이다······.’
한편 일행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검이라면 몰라도 루드에게 입으로 이길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마 학식의 대명사인 대마법사도 루드와 대화를 하다간 먼저 울화통이 터져 죽을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실반이란 자는 그동안 쌓은 수련을 바탕으로 꿋꿋이 참고 있었다.
“나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총수가 아니네. 조선족도 아니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럼 내가 그걸 어떻게 증명해줘야 하는가?”
“그건 알아서 하셔야죠.”
“먼저 의혹을 제기한 건 자네가 아닌가? 그럼 자네가 증명을 해야지.”
“하지만 아쉬운 건 당신이 아닙니까? 당신 목적인 자칭 딸이라는 이 두 소녀들을 데려가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 목적도 없이 괜히 이 지하던전 깊숙이까지 당신이 쫄랑쫄랑 따라왔을까요?? 증명은 아쉬운 사람 쪽이 해야죠. 그리고 말이 보이스피싱이니 조선족이지 그건 그냥 예를 든 것이고, 우리 쪽에서 보는 당신은 그냥 칼잽이 열댓 명 데리고 다니면서 무력시위 하는 깡패로밖에 안보여요. 그렇게 딸이 소중했으면 진작에 데리고 갔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알기로 플로드는 몰라도 이크는 수녀원에 처박아놓고 자객까지 보낸 걸로 아는데?? 그런 당신에게 아비의 자격이 있습니까??”
“큼, 그건 아내의 짓일세. 저 아이들은 본처가 아니라 첩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아내의 눈치가 보여서 집에 데리고 있을 수가 없었네. 자객을 보낸 것도 나중에 알았어. 수녀원에 보냈더라면 안전할 줄 알았던 것이다.”
“사람 쳐놓고 몰랐다고 하면 끝납니까? 그럼 경찰이 왜 있고 법이 왜 있어요?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르는 겁니다. 내가 봤을 때 당신은 아비의 자격이 없어요! 그리고 지금에서야 뭔가 아쉬워서 쫄랑쫄랑 나타난 거 아닙니까!!”
“쫄랑쫄랑······.”
실반의 관자놀이가 다시 한 번 불끈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것이 분명한 상대에게 개 부르듯 쫄랑쫄랑이라니······. 실반도 그 점을 지적했다.
“쫄랑쫄랑이라니, 자네 대체 몇 살인가?”
“꼭 꼰대들이 불리하면 나이로 따지죠. 논리가 아니라. 그렇게 나왔다는 점에서 당신은 이미 진 겁니다.”
“큭, 너희 아버지 몇 살이야? 내가 니 아버지 뻘이거나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을 걸?”
“전 고아인데요?”
“뭐??”
“우리 부모는 날 버리고 가서 얼굴도 모릅니다.”
“흥, 그러니까 그 모양이지. 예절도 모르는 놈.”
“그럼 당신도 부모가 없습니까??”
“뭐??”
“내가 봤을 땐 당신도 예의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부모가 없어서 예의가 없다면, 예의가 없는 당신도 부모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이 개자식이!! 어따대고 당신, 당신이야!!”
“그럼 병신입니까?”
“이 개새끼가!!”
차릉!!
실반은 분노해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에 따라 똑같이 검을 뽑아드는 수하들.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좌중을 감돌았다. 그런데 먼저 사과하는 루드.
“미안하다. 그래도 니가 헛먹었다고는 하나 나이를 좀 더 먹은 것 같은데 내가 너무 공손하지 못했군. 그러니 이쪽이 먼저 어른스럽게 사과하마. 그러면 되었냐?”
“이 개자식이 어디서 반말이야!!”
부들부들하는 실반에게 루드는 말했다.
“그러는 너는 왜 반말이야? 나이가 많으면 반말해도 되는 거야?? 그런 법도는 이 대륙 어디에도 없다.”
“그건 관습 같은 것이다!! 암묵적인 것이고!!”
“관습은 성문법이 아니다. 법도 일일이 지키지 않는데 관습을 따르라니? 너는 네 기준에 맞춰서 너에게 일부 사람들의 관습을 강요하는 건가? 그리고 요즘 애들은 나이 좀 많다고 대놓고 반말 찍찍하면 아주 싫어한다. 편의점에 들러도 알바한테 그렇게 반말 찍찍하면 속으론 사람대접 못 받으니 주의하도록! 그리고 반말 들으니 기분 나쁘냐? 왜 기분 나쁠 짓을 자신은 하는 거지?? 원래 자기가 들어서 기분 나쁠 말은 남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이 세상의 법도다. 사회생활의 기본이고. 당신이 한 나이가 든 사람이 하는 반말은 당연하고 관습법에 가깝다는 궤변보다 이쪽이 더 정론이다. 그렇지 않나?”
“크윽!!”
그렇게 할 말을 잇지 못하고 부들부들하던 실반은 갑자기 뭔가를 가리켰다.
“그런데 자네 이마의 그건 뭔가?”
“뭐?”
“한번 봐보지?”
“뭐라고 적혀 있는 거야?”
“······.”
이크가 거울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마에는 당당히 ‘성추행범’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이거?! 언제 적었어?!”
“아까 수갑을 채울 때······.”
안내양이 미안한 듯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장난으로 이크가 루드를 주문으로 구속하고 수갑 채울 때 그렇게 재빨리 적었는데, 루드와 비슷하게 손이 빠른 그녀가 순간적으로 손에 수갑이 채워지는 것에 정신이 팔린 루드의 이마에 그런 걸 적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필 일행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 지적당할 줄은 안내양도 몰랐던 것이다.
“미안해요······.”
“이, 이걸 그냥?!”
뜻하지 않게 망신을 당한 루드가 부들부들했는데, 실반이 어처구니없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성추행범이냐?”
“아, 아니다.”
“그럼 그 이마의 낙인은 뭐고?”
“이, 이건 장난이다!! 그래, 우리들끼리 하는 플레이!! SM플레이 같은 것이지!!”
“맞냐??”
“그건 아니고······.”
실반의 물음에 안내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급적이면 보호해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자신이 변태로 몰릴 것이 분명하므로 여자로서 수치스러워 안내양은 단호히 아니라고 밝혔던 것이다.
“아니라는데?”
“그, 그건 그녀가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이다. 그치 자기야?”
“누가 자기에욧!!”
퍽!!
안내양은 구속되어 꼼짝도 못하는 루드의 대가리를 때렸다.
“아팟!! 꼼짝도 못하는 사람을 때리다니! 이건 범죄야!!”
“꼼짝도 못하는 사람을 성추행한 건 누군가요??”
“······.”
루드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 자네가 성추행범인 건 사실인 것 같군.”
“아, 아니다!!”
“이런 성추행범과 지금까지 싸우고 있었다니······.”
“틀려, 이건 모함이다!!”
“저 자 말고 좀 더 제대로 된 자는 없나?? 나는 범죄자가 아닌 선량한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
“딸들을 방치한 너도 범죄자야!!”
쾅!!
루드는 자신의 손목을 가둔 구속구를 풀었다. 박살나 흩어지는 주문의 여파.
‘내 구속구를 풀었어?!’
흠칫. 이크는 움찔했다. 그녀는 전투능력은 낮지만 그 외에 치유나 여러 가지 잡다한 주문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처음 그녀가 이 던전에서 루드를 만났을 때 루드는 단순히 운동신경 좀 좋고 감시자의 고기를 먹었을 뿐인 천방지축 도둑이었다.
그런데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라지만 상당한 주문력이 들어간 구속구를 단순히 힘으로 풀어버리다니. 그 성장속도에 이크는 전율을 느꼈다.
‘보통 성장속도가 아냐. 이대로라면?!’
물론 일행이 강해지는 것은 좋지만 하필 그게 변태 루드라 이크는 불안해졌다. 그렇게 복잡한 심경을 갖고 있는데 루드는 어느새 마검을 꺼내들어 실반을 겨눴던 것이다.
“피차 꼬추 달고 태어난 남자로서 이렇게 입으로만 씨부리는 것도 우습긴 하지. 어때, 검으로 얘기하지 않겠나? 너도 결국엔 그럴 작정이었던 것 같은데?”
“꼬추가 뭐냐, 천박한 놈. 좀 더 다른 말로 순화해라.”
“미안하군. 피차 좇 달고 태어난 남자로서 검으로 대화하지 않겠나??”
“······.”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실반은 마찬가지로 검을 겨뒀다.
사위와 장인(?)의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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