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336화: 아들들의 전쟁 (67)

“다들 일단 좀 진정해라.

지금 이리로 오고 있는 연락관은 비록 신임 남부 총독 크로프트가 파견한 사람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섭정 왕비 전하의 뜻을 받들어 파견된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가 그 연락관을 무시하고 쫓아버린다면, 그건 섭정 왕비 전하, 더 나아가, 그 분에게 국정을 맡기신 국왕 폐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일이 된다.

내가 부왕께 떳떳한 아들이 되고자 그 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다들 잘 알지 않느냐?”

페레이즈 태자가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자의 입에서 그의 아버지인 국왕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한껏 흥분해 있던 파드무스와 프레데일도 일순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레이즈가 계속 말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비록 왕위 계승권을 지니고 있어서 태자라고 불리긴 해도, 군의 명령 체계 내에서는 제 15군단의 군단장으로서 어디까지나 직속 상관인 남부 총독의 명령에 충실하게 복종해야만 한다.

실제로 나는 지금까지 모든 일을 카드펠드 총독 각하와 상의해서 그 분의 허락을 받아 추진해 왔어.

나도 물론 개인적으로는 신임 총독인 크로프트라는 작자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함부로 직속 상관의 명령을 무시한다면 그건 나중에 어마어마한 논란거리가 될 것이며, 지금 보다 몇 배는 더 골치가 아픈 일이 벌어지지 않겠느냐?

무엇보다 나 자신이 더 이상 어디 가서 떳떳하게 살아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게 될 거야.”

페레이즈 태자의 침착한 말에 다소 흥분을 가라앉힌 파드무스가 살짝 푸념조로 말했다.

“저희가 그런 당연한 이치를 몰라서 이렇게 답답해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번 사건에 대해 책임질 일이 있어서 카드펠드 각하가 불가피하게 사임해야만 한다면, 공적으로 보나 서열로 보나, 마땅히 태자 전하께서 남부 총독 자리에 올라서 남쪽 국경과 야만족의 반란을 수습하는 책임을 맡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섭정 왕비 전하의 총애만 믿고 설치는 크로프트 같은 무능한 자가 남부 총독이 되고, 그런 자가 내린 터무니없는 명령에 따라 우리가 그 동안 고생한 일들이 전부 물거품이 되게 생겼으니 너무 억울해서 이러는 겁니다.”

프레데일도 파드무스의 말을 받아서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맞습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합니다.

태자 전하께서 국왕 폐하의 뜻을 함부로 거스르는 것 같아 도저히 연락관을 그냥 쫓아버리고 싶지 않으시다면, 저와 카시우트만 연락관을 따라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크로프트의 명령을 최소한 존중하는 흉내라도 낸 것이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아군 주력 병력과 함께 여기 남아서 어떻게든 카르스덴을 제압하고 야만족의 항복을 받아내도록 하십시오.

나중에 섭정 왕비 전하나 크로프트가 왜 철군 명령을 따르지 않았느냐고 트집을 잡는다면, 야만족을 항복시킨 공적을 내세워 당당하게 반박하시면 됩니다.

아무도 감히 거기에 토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다소 흥분을 가라앉히긴 했어도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발언들은 여전히 페레이즈 태자를 무척 곤란하게 만들었다.

페레이즈도 당연히 심정적으로는 그들의 말에 완전히 공감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그들에게 동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까지 페레이즈 태자는 계모인 섭정 왕비가 직간접적으로 다양한 정치적 압박을 가해오는 와중에서, 최대한 꾹 참고 견디면서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왔다.

왕비가 어린 아들의 계승권을 노리고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라는 너그러운 이해심.

왕비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결국 부왕을 거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불편한 마음.

왕비가 무슨 짓을 해도 수많은 전공을 바탕으로 확립된 자신의 왕위 계승권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자신감.

이런 생각들을 바탕으로 페레이즈 태자는 최선을 다해 왕비의 정치적 공격에 인내심을 가지고 오로지 수비적으로 대응해온 터였다.

그렇게 꾹 참고 견디다 보면 결국 왕비도 공격하다 지쳐서 포기하거나 타협적인 자세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태자는 나중에 자신이 국왕이 되더라도 섭정 왕비의 어린 아들을 해치거나 핍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한참 어린 그 이복 동생을 잘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능력에 합당한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결혼해서 믿을 만한 후계자를 얻기 전에 갑자기 전사할 때를 대비하여, 이복 동생을 잠정적인 후계자로 밀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페레이즈 태자는 언젠가 섭정 왕비가 이와 같은 자신의 우호적인 태도를 알아주고, 그 동안 미안했으며 어린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해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 날을 기다리면서 페레이즈는 묵묵히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일을 열심히 해왔으며, 섭정 왕비와 직속 상관인 남부 총독의 뜻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는 나중에 떳떳하게 부왕의 뒤를 잇고 싶었으며, 가능하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레이즈 태자 또한 사람인지라 당연히 종종 답답하고 서글퍼질 때가 있었다.

특히나 이제 직속 상관이 왕비의 총애를 받는 아첨꾼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가 왕비의 뜻을 받들어 다짜고짜 철군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인내심의 한계가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페레이즈 태자는 여전히 부왕의 충실한 아들로서 올바르게 처신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섭정 왕비와 그 주변 사람들의 압박이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와 본격적으로 숨통을 조르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페레이즈는 제발 섭정 왕비가 자신을 그런 최악의 궁지로 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거 참, 내가 왕국 남부 지방으로 온 이후, 그동안 카드펠드 각하의 배려로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을 멋대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는지가 새삼 실감나는구나.”

페레이즈 태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문득 막사 구석에 있는 카시우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카드펠드의 아들이자 체포령이 내려진 당사자로서 분명히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입을 꾹 다문 채 아까부터 깊은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카시우트,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 너는 이번 일의 중요한 당사자가 아니냐? 마음이 많이 괴롭긴 하겠지만, 그래도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말해봐라.”

페레이즈가 똑바로 바라보면서 재촉하자, 카시우트가 마침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큰 사단이 난 건 전부 제가 무능해서 실수를 저지른 탓입니다. 감히 무슨 면목으로 먼저 나서서 의견을 말씀 드리겠습니까?

그래도 굳이 의견을 내라고 하신다면, 저도 기본적으로는 두 분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이대로 철수하기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고생하고 노력한 것이 너무나 아까우니까요.

특히나 최근에 카르스덴과 정면 대결하여 거둔 승리가 물거품이 된다면, 그건 저로서도 두고두고 많이 후회스러울 겁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파드무스와 프레데일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시우트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태자 전하의 입장에서 보면 무턱대고 연락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만약 여기서 아무런 명분도 없이 섭정 왕비 전하와 직속 상관인 신임 남부 총독의 명령을 함부로 거역한다면, 전하께서 지금까지 온갖 부당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꾹 참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고자 노력해온 나날이 전부 허사로 돌아갈 테니까요.

그 또한 야만족 영토 깊숙한 곳에서 거둔 승리가 무의미한 것으로 돌아가는 것 못지 않게 아까운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연락관이 여기 도착하면 그 자가 공식적으로 전달하는 크로프트의 명령을 최대한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긴 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은 파드무스는 이 말을 듣고 짜증스럽게 카시우트를 나무랐다.

“카시우트,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니, 그게 무슨 하나마나 한 소리냐? 네가 정확히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똑바로 말해 봐라.”

카시우트는 파드무스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고정하십시오. 이제부터 말하려던 참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과연 그 연락관이 무사히 여기까지 올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자 페레이즈 태자 역시 퍼뜩 짚이는 게 있어서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아뿔싸! 그래, 맞아. 내가 편지의 내용만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런 중요한 문제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신임 남부 총독이 보낸 연락관은 겨우 100명의 기병만 거느리고 야만족의 땅을 가로질러서 이리 오고 있다.

그런데 카르스덴은 지금 우리에게 당한 패배 때문에 어떻게든 전공을 세워야 한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혀 있으니, 그런 좋은 사냥감을 그냥 내버려둘 턱이 없지.

틀림없이 그 100명의 기병을 공격할 것이다.”

프레데일 또한 깨달은 바가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건 그렇습니다. 저도 야만족 기병대의 추격을 받고 그 놈들을 따돌리면서 태자 전하와 합류하느라 고생깨나 했지요.

만약 낯선 야만족의 땅에서 길 안내를 해줄 패잔병들까지 없었다면 자칫 위험할 뻔했습니다.

이번에 오는 연락관이 충분한 능력과 경험을 갖추지 못한 자라면, 야만족의 손쉬운 사냥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파드무스가 의문을 제기했다.

“100명의 기병대가 최대한 야만족과의 접촉이나 교전을 피하고 샛길로 신속하게 이동한다면, 제아무리 카르스덴이 전공에 굶주렸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포착해서 공격할 수 있을까요?”

카시우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면서 대꾸했다.

“그건 이 일대의 지리에 밝아서 현지 주민조차 평상시에는 잘 이용하지 않는 샛길을 많이 알아야지 가능한 일입니다.

이곳 야만족 북쪽 영토는 카르스덴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며, 본거지 중의 본거지가 아닙니까?

비록 카르스덴에게 직접 병력을 지원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아군의 움직임을 감시해서 그 자에게 전해줄 부족들은 사방에 아주 많이 있습니다.

수많은 눈과 귀가 기병대의 움직임을 추적하여 일일이 파로크 성채에 알려준다면, 지리에 밝지 못한 연락관의 기병대는 지극히 뻔한 경로로 이동하면서 그야말로 카르스덴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신세가 될 겁니다.

이 말을 듣고 페레이즈도 동의했다.

“그 말이 옳다. 거기다 그 연락관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카르스덴도 당장 확실하게 알게 될 거다.

100명의 아군 기병대가 갑자기 야만족의 영토로 진입하여 부지런히 남쪽으로 이동한다? 그건 나한테 오는 게 너무나도 뻔하지 않겠느냐?

중간 경로도, 목적지도 명확하게 안다면, 카르스덴이 그 기병대를 요격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다.”

파드무스는 여기까지 듣고 나직하게 끙 하고 신음 소리를 내더니, 조심스럽게 페레이즈 태자에게 말했다.

“태자 전하,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정말 조심스럽습니다만······”

그때 카시우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파드무스의 말을 중간에서 끊고 나섰다.

“잠깐, 파드무스 경,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파드무스가 황당한 듯 카시우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뭐가 절대로 안 된다는 거냐?”

카시우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파드무스 경은, 차라리 그 연락관이 중간에서 카르스덴의 기습을 받아서 죽게 내버려두면 어떠냐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연락관이 도중에 야만족의 손에 죽게 되면,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철군 명령을 못 받은 게 되니까요.”

파드무스는 카시우트가 자기 속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말하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비록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은 아니라고 해도, 섭정 왕비 전하와 크로프트가 먼저 철군 명령으로 태자 전하를 치사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 마당에 우리만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려다가 저들이 파놓은 함정 속으로 알아서 걸어 들어가는 건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라고 본다.

우리가 직접 연락관을 죽이는 건 당연히 안 될 말이지만, 그 자가 카르스덴에게 당하건 말건 그냥 내버려둘 수는 있잖아?

그 연락관이 무조건 카르스덴에게 죽는다고 확정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카시우트는 한층 더 단호한 말투와 표정으로 적극 반대했다.

“맙소사! 카르스덴 쪽에 전부 바보들만 있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 저 놈들이 태자 전하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연락관의 기병대를 기습해서 100명의 부하들은 다 죽인 다음, 정작 연락관만 일부러 놓아줘서 이리로 오게 만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공식적으로 철군 명령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살릴 수도 있었던 죄 없는 기병 100명을 방치해서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아니,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만으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지요.

섭정 왕비 전하와 크로프트라면 나중에 그 일을 교묘하게 부풀려서 태자 전하를 더 궁지에 몰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냥 방관하면 절대로 안 되고, 그들을 돕기 위해 반드시 뭐라도 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