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릭스(3)
“그래서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나라고 알 턱이 있나?”
“저쪽에 문이 있는데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 앞으로 어째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유림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사방이 확 트여 낭떠러지처럼 되어 있는 차에, 유일하게 어딘가로 통할 법한 문이 눈에 띄었다.
“들어가 봐야 하나?”
“아무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대안이 없어. 맘에 안 든다고 끝 모르는 우주 공간으로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음···.”
잠시 시간을 지체했지만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 한번 가 보자. 나중에 차라리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걸 그랬다고 딴소리하지는 말라고.”
“설마 큐브 얘기인가요?”
“자식이 재수 없는 소리는 왜 하고 그래?”
살짝 불길한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운서뿐만 아니라 모두 같은 마음이었기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안쪽으로 이동했다.
조심스레 문손잡이를 당기고 안쪽을 살피니 평범해 보이는 건물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물론 현대적인 느낌은 아니었고 과거에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은 중세풍의 구조였다.
홀에 탁자가 잔뜩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식당이나 주점 같은 건물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경첩이 녹이 슬었는지 끼익 소리를 내는 바람에 안쪽의 주의를 끌었는데, 그로 인해 카운터에 무료하게 앉아 있던 사내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이마의 잔주름과 희끗한 머리카락이 세월의 흐름을 드러내는, 다부진 체격의 중년인이었다.
“···간만에 보는 이방인이로군.”
중년인은 굵은 저음의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서양인처럼 생겼음에도 말을 알아듣는데 지장이 없었다.
딱히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뭐야, 한국말을 하네?”
“한국말? 이건 공용어야.”
강우가 저도 모르게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자 중년인이 바로 대꾸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세히 보니 입술과 발음이 따로 노는 것이었다.
“이방인들은 자동적으로 공용어를 습득하고 사용하니까 위화감을 느끼는 게 늦더군.”
“이방인이라···.”
운서가 중년인이 언급한 키워드를 곱씹으며 무언가 유추해 볼 때, 강우가 앞으로 나서며 질문을 던졌다.
“뭘 좀 아시는 것 같은데, 도대체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설명 좀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모르는 걸 설명하는 재주는 없네. 당신들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소울킵에 왔는지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저 이방인들이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가벼운 도움을 주고 있을 뿐이야. 임시로.”
“음···.”
안타깝게도 원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원래 사람들은 많은 것에 무지한 채로 현실을 살아가게 마련이었다.
굳이 이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당장 고집을 부릴 필요는 없다고 할까?
“어디 보자.”
중년인은 고민하는 강우의 모습을 힐끔 바라보고는 카운터 옆 책장에서 커다란 장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장부 표지에는 지렁이처럼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방인 명부’라 적혀 있었는데, 아마도 이게 공용 문자인 듯했다.
생소한 모양임에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에서 묘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들 이름이··· 신운서, 하강우, 차유림이로군.”
“어?”
“어머?”
중년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이런 정보는 또 어떻게 알아내서 기록했다는 말인가?
“너무 놀랄 것 없어. 위대한 현자가 만든 장부이니 남들이 모르는 정보가 좀 섞여 있다고 해서 무에 그리 대수겠는가?”
중년인은 그런 세 사람의 의문을 일축하고 아래쪽 서랍에서 녹색 수첩을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뭔가요?”
“이방인 수첩이야. 길드원임을 증명하는 문서이지. 스스로가 지닌 가능성을 제대로 꽃피울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서 보여준다고 해. 자기가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는 건 어떤 의미로는 굉장한 일이라서 우리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음···.”
세 사람은 앞에 놓인 수첩을 집어 들고 빠르게 넘겼다.
수첩에는 개인의 증명사진을 포함해서 각종 개인 정보가 빼곡하게 담겨 있었는데, 주민등록번호나 계좌 번호같이 현대적 정보가 아니라 스탯이니 스킬이니 하는 등의 게임용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이거 캐릭터 시트네요.”
“어처구니가 없네.”
“아무래도 우리더러 헬릭스를 실제로 플레이 하게 할 생각인 모양이야.”
“역시 그런 거겠죠?”
운서는 유림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룰북에 이방인이라고 해서 다른 대륙에서 건너온 모험가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 정도 스케일일 줄은 몰랐어. 차원이 불안정하다는 설정이 단순한 게임 속 기믹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설마 이게 현실 RPG를 암시하는 것일 줄이야.”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
유림의 우려에 운서의 안색도 덩달아 흐려졌다.
아무래도 TRPG라는 게 모험과 전투로 점철된 세계를 배경으로 하다 보니, 책상 위나 컴퓨터 앞에서라면 모를까 직접 몸으로 그와 같은 활동을 하라면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보통 현대인의 마음이었다.
“야, 근데 이거 스탯이 좀 멋대로 편성된 것 같다? 난 이거보다 더 좋아야 될 것 같은데···.”
그렇지만 강우는 조금 달랐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느닷없는 현실을 더 고민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를 읽으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우린 게임 속의 영웅들이 아니야. 어디까지나 일반인이라는 사실을 감안하고 스탯을 평가해야 한다고.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중간 이상을 받는 게 고작일걸?”
“아니, 그동안 흘린 피와 땀은 뭔데?”
운서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강우는 큰 소리로 한탄했다.
그렇게 열심히 헬스클럽을 다니며 운동했는데 생각보다 높지 않은 수치가 나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피는 무슨··· 내 거 보고나 말해, 인마.’
물론 방구석에 처박혀 세월아 네월아 한 운서의 경우는 더 처참한 상황이었다.
도적 직업임에도 낮은 민첩으로 인해 스킬 사용에 페널티를 받아 실패가 다발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로 형편없는 스탯이 기록되어 있었다.
한층 더 질이 좋지 않은 것은, 일단 로드가 끝난 항목은 아무리 현실에서 노력한다 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으로 캐릭터 시트를 만들 때를 제외하면 모든 변화는 헬릭스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트레이닝을 해서 신체 능력을 끌어올린 후에 캐릭터 시트를 작성해야 한다는 말이로군. 이번 시트로 적당히 익숙해지면 새 시트를 사용해서 캐릭터를 다시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인 방법일 수 있겠어.’
운서는 좌절하지 않고 차근차근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 나갔다.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점주이다 보니 캐릭터 시트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프랜차이즈 1호점이라고 덤으로 보내 준 은장과 금장까지 있었기에, 정보만 충족된다면 남과 다른 시작점에 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플레이어] 신운서
[종족] 인간 [나이] 31 [성별] 남
[레벨] 1 [직업] 도적
[국적] 대한민국 [거주지] 서울 [활동지] 알파 렐름
[성향] 은둔자
[특징] 이방인 길드 대표(1호점 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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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16 [MP] 5
[근력] 7 [민첩] 7 [건강] 6
[지력] 17 [의지] 8 [정신]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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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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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스킬] 은신(E)
[직업 스킬] 함정 탐지(E)
[보조 스킬] 없음
[히든 특성] 황금 주사위(S)
‘황금 주사위는 또 뭐야?’
수첩을 확인하며 내용을 살피던 운서는 마지막에 뜬 히든 특성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헬릭스의 규칙에 대해 온전히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특성이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본사에서 보내온 특전 기념품이 이것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강우가 헛기침을 하며 옆으로 다가왔다.
“흠, 운서 너 스탯 좀 보자. 파티 구성원의 능력은 서로 공유해야지.”
“뭐, 그래라.”
남 보이기 부끄러운 스탯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수첩의 두 번째 장을 펼쳐 보였다.
역시나 강우에게서 썩 좋은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다.
“에계, 이게 뭐냐? 그러게 내가 같이 운동하자고 했잖아.”
“······.”
“지력은 또 왜 이렇게 높아? 소싯적에 공부 좀 했다 이거냐? 이 정도면 차라리 마법사를 하지 그랬어?”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저도, 저도 보여 주세요!”
두 사람이 서로의 능력을 확인하며 이야기를 나눌 때 소외되어 있던 유림이 가운데로 끼어들었다.
당연히 그녀와도 정보 교류를 해야 했기에 세 사람은 이내 이마를 맞대고 속으로 상대의 품평을 했다.
[플레이어] 하강우
[종족] 인간 [나이] 31 [성별] 남
[레벨] 1 [직업] 전사
[HP] 22 [MP] 6
[근력] 14 [민첩] 11 [건강] 12
[지력] 12 [의지] 14 [정신] 12
[직업 스킬] 강타(E)
[직업 스킬] 철벽(E)
[플레이어] 차유림
[종족] 인간 [나이] 25 [성별] 여
[레벨] 1 [직업] 성직자
[HP] 16 [MP] 11
[근력] 4 [민첩] 5 [건강] 6
[지력] 15 [의지] 12 [정신] 6
[직업 스킬] 치유(E)
[직업 스킬] 해독(E)
수첩이 타인에게 보여주는 정보는 제한적이어서, 비밀스러운 부분까지 모두 공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파티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정도는 대부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림 씨는 정신이 조금 낮네.”
“사실 제가 멘탈이 별로 안 좋아요. 조금 안 좋은 댓글만 봐도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제대로 쓰는 거 맞나 의심암귀에 사로잡혀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거든요. 아마 그래서 그런가 봐요.”
처음 캐릭터 시트를 짜기 전 직업을 논의할 때는 균형 잡힌 좋은 파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헬릭스 세계에 들어와 보니 영 딴판이었다.
엉망도 이렇게 엉망이 아닐 수가 없었다.
“민첩 낮은 도적이 남 말하고 앉았네. 너나 잘하세요.”
“···미안하다.”
강우의 일침처럼, 민첩이 낮은 도적은 그 효용이 급감했다.
은신은 아마도 실패할 것이고 함정 탐지는 제대로 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정신이 중요한 성직자 역할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으니, 전체적으로 망한 조합이라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유일하게 사람다운 강우가 전위에서 탄탄하게 버텨주기를 바라야 하는 기형적인 파티가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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