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보는 남자(24)

부산 경마공원에는 그렇게 난생처음 가게 됐다.
그런데 공원 내를 둘러본 민은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벚꽃별로 없구먼.”
“사실은 벚꽃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돈 따러 왔어.”
“그 말은 경마하자는 말이야?”
“응, 단 2경기만. 그런 다음 오늘은 창원에 가서 쉬고, 내일 섬진강으로 가자.”
“경마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야.”
“알아. 그러나 단 2경기만 할 거야. 그리고 나 도박은 안 하잖아. 그러니 안심하고 내가 가르쳐주는 경기에 은정이도 돈 걸어.”
그래도 미적거리는 민은정을 설득해서 경마장 안으로 들어가서 일단 남들이 다 사는 경마예상지를 한 권 샀다. 경마해본 적이 없었기에 우선 어떻게 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경마예상지를 펼쳐보면서 만만해 보이는 30대 초반의 여자에게 접근했다.
그러고는 환한 웃음을 흘리면서 이것저것 물으니 정말 상세하게 경마에 관해서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뇌리에 아직도 박힌 제1경주 복승식 9번과 2번 말에 돈 거는 법과 4경주 쌍승식 2번과 1번 말에 돈 거는 법도 배우고, 마권을 어디서 사야 하는지. 돈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등등도 배웠다.
“저 여자 아무것도 모르고, 그사이에 오빠에게 반한 것 같은데, 가서 조금만 더 꼬여봐. 그러면 오늘 밤 팬티 벗고 덤빌지도 몰라.”
“이것은 설마 질투?”
“질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럼 이런 반응은 뭔데?”
“하여튼 그놈의 웃음에 안 넘어가는 여자가 없어. 하긴 나도 그놈의 웃음에 홀라당 넘어가서 3번째 만난 날 당했으니. 휴!”
“당했다는 소리도 이제 그만. 다른 여자 질투도 이제 그만. 나에게 여자라고는 오직 민은정뿐이니까. 그리고 이렇게 마권 사자.”
30대 초반 여자에게 경마와 마권 사는 법 등등을 묻는 것을 보고, 완벽하게 그 여자를 질투하는 민은정을 달래서 기어이 1경주에 각자 10만 원씩을 걸어 마권을 샀다.
물론 민은정이 1만 원만 산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그 고집은 내 고집을 꺾지 못했기에 각자 10만 원씩 베팅한 마권을 들고, 서서히 경주로에 들어서는 말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경마장 가득 이런 중계방송이 흘러나왔다.
“부산 경남 경마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맑고 건조한 가운데, 오늘의 제1경주 외산 4등급 3세 마, 경주거리 1,000m 경주를 중계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막 경주에 참가하는 13마리 말들이 출발대에 들어서서 정렬을 끝냈습니다. 이때 출발 소리와 함께 13마리 말 힘차게 출발했습니다. 초반 선두 안쪽의 1번 바다 소년과 3번 천하 강자, 9번 해운 대장이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6번 아침 바람과 7번 자이언트 킹이 따릅니다. 1번· 3번· 9번 말이 선두를 유지한 가운데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집니다. 1번· 3번· 9번 순위 변동 없는 가운데, 바깥쪽에서 4번 말 블랙 타이거가 치고 나오면서 다시 각축전이 벌어집니다. 1번 말 바다 소년이 4코너 선회하고 직선 주로를 선두로 진입합니다. 그 뒤에는 2번 말 태풍과 9번 말 해운 대장이 따릅니다. 결승선 앞선 직선 주로로 들어서면서 9번 말 해운 대장이 1번 말 바다 소년과 2번 말 태풍을 따돌리고 선두로 치고 나옵니다. 9번· 1번· 2번 말이 혼전을 펼칩니다. 결승점 50m 앞두고 바깥쪽에서 2번 말 태풍이 1번 바다 소년을 따돌리고 2위로 올라서는 가운데 9번 해운 대장이 반 마신(馬身) 정도 앞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2번 말 태풍, 1번 말 바다 소년이 따르면서 세 마리 그대로 결승선 통과했습니다.”
경주가 이렇게 끝나자 나도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경마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은정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도 잘 모르면서 뭐라고 가르쳐주려는데, 전광판에 경기 결과가 선명하게 찍히는 것이었다.
“은정아, 우리가 돈 건 말이 들어온 것 같지?”
“저기 1등으로 기록된 9번 말과 2등으로 기록된 2번 말이 우리가 건 말이잖아.”
“그래, 그러니 우리가 건 말이 1등과 2등이야.”
“그럼 우리 돈 번 거야?”
“그런 것 같아. 저기 배당 봐. 복승식이 자그마치 984배야.”
“984배면 돈이 얼마야?”
얼마겠는가.
9,840만 원이지.
로또나 주식으로 번 돈에 비하면 턱도 없는 금액이었지만, 이번 여행 경비는 물론 당분간 생활비는 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로또나 주식과 비교하면 돈이 적은 대신 긴장감은 훨씬 있었다.
어떻든 그렇게 우리가 건 말이 들어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배당금도 확인한 다음 차에 가서 민은정이 들고 있는 샤넬 백보다 훨씬 큰 버버리 백과 종이 가방을 가지고 와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4경주를 기다렸다.
“그런데 오빠 어떻게 알았기에 맞췄어?”
“우리 마누라 잘 먹여 살리라고 꿈에 할아버지가 나와서 가르쳐 준거야.”
“거짓말 좀 잘해라. 그런데 돈은 왜 안 찾아?”
“우리 둘이 찾으면 1억 9,000만 원이 넘어. 그러면 100만 원 뭉치 190개야. 그리고 우리에게는 또 한 경기가 남았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똑똑한 마누라님!”
“돈을 한 번에 찾아서 이 백과 종이 가방에 나누어 담고, 바람처럼 여기를 빠져나가서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게 꽁지 빠지게 창원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서방님!”
“그것보다는 4경주가 끝나고 돈을 찾아도 3시가 안 될 것 같으니까 근처에 대한 은행 지점이나 농협 지점으로 가서 통장에 입금해 버리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아.”
“우리 서방님은 역시 잔머리만 비상해. 그래서 이 백과 가방도 차에서 가져오자고 했겠지.”
하늘같은 서방님에게 잔머리만 비상하다니.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건 그렇고 그렇게 차를 마시고, 경마장을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주차장 옆에 농협 출장소가 보였다.
“서방님, 잔머리 굴린 것처럼 저기 있네요. 농협 출장소!”
“어허! 잔머리라니.”
농협 출장소를 확인하고 들어와서 맞이한 4경기는 복승식이 아니라 쌍승식으로 2번과 1번 말에 각 10만 원씩을 베팅했다.
그러고 제법 초조하고, 긴장감이 있는 경주를 지켜보고 있으니 이번에도 당연하다는 듯 우리가 베팅한 말 2번과 1번이 1등과 2등으로 차례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오빠, 이번에도 들어왔지?”
“응, 그러니 기념으로 뽀뽀나 한번 해줘.”
“여기서?”
“뭐 어때.”
“차에 가서 해줄게. 그러니 빨리 돈 찾아서 농협으로 가자.”
민은정은 다 좋은데, 이런 면은 좀 그랬다.
비디오방에서도 해도 되는데, 배포가 없어서 못 하고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뽀뽀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도 못 했다.
기회를 봐서 차에서라도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돈을 찾으니 4경주 577배까지 합쳐서 우리 각자가 1억 5,600만 원이 조금 넘었고, 둘을 합치면 3억 1,200만 원이 조금 넘었다.
그래서 민은정의 백과 종이 가방에 돈을 나누어 담아도 다 안 들어가서 주머니에도 넣고, 검은 비닐봉지를 구해서도 담은 다음 최소한의 동선으로 농협 출장소로 가서 내 계좌에 입금하려고 하니 직원들이 모두 놀라서 쳐다봤다.
거기다가 민은정은 이러는 것이었다.
“다 입금하지 말고, 500만 원만 줘봐.”
“500만 원은 뭐하게?”
“나는 아직도 내가 200억 대 부자라는 것이 실감이 잘 안 나. 그래서 500만 원이라도 침대에 뿌려놓고 오늘 밤 자 보려고. 그럼 부자라는 것이 제대로 실감이 나겠지.”
“오호! 좋은 생각인데, 그 돈 위에서 우리 둘이 사랑을 나누면 더 실감이 나고 말이야.”
“하여튼 매일 그 생각이지. 그런데 나도 좋아! 호호호!”
직원들이 듣지 않도록 이렇게 말한 다음 500만 원은 민은정에게 주고, 나머지 3억700만 원을 모두 내 통장에 입금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아직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직원들에게 경마로 딴 돈이라고 솔직하게 말해줬다. 그러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직원이 보였다.
어떻든 그런 다음 재빨리 차로 가서 민은정과 진한 키스를 한 다음 경마장을 빠져나가 창원으로 차를 몰았다.
“은정이 몫은 제주에 가서 찾아줄게.”
“그럴 필요 없으니까 그 돈은 오빠가 다 가져. 대신에 그 돈으로 우리 시계나 하나씩 사자. 우리 결혼 시계는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었잖아. 그리고 나 그 시계 오빠랑 별거하는 날 한강에 던져버렸어. 그러니 새로 하나씩 사서 오늘을 기념하고, 새로운 결혼 시계로 삼자. 어때?”
“진짜 내가 사준 시계를 한강에 던졌어?”
“응, 그러니 새로 사자. 알았지?”
“몰랐다. 그러나 그 일부터 정중하게 사과하면 생각은 해볼게.”
“하늘같은 서방님, 서방님이 빚을 내서 사준 결혼 시계를 한강에 던져서 정말 죄송해요. 다시는 그런 짓 안 할 테니까 시계 하나만 더 사 주세요. 알았죠. 서방님. 그리고 이 불미한 아내가 무지무지하게 서방님 사랑하는 것 알죵! 그러니 사 주세용용용용!”
이건 애교일까.
아닐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민은정이 내 말에 토도 달지 않고, 순순히 이렇게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그것이었다.
이 바람에 시계를 안 사준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래도 약간 기분은 나빴다.
나는 아직도 그때 빚을 내서 산 100만 원대 시계를 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알았어. 그러나 다시는 안 버린다고 확실하게 약속해.”
“응, 약속. 그러니 사 줘. 그리고 오늘 밤 오빠는 그냥 침대에 누워만 있어. 그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됐지?”
“뭐 그건 됐어. 그리고 시계는 은정이가 다시는 못 버리게 한 1억짜리로 사 준다.”
“호호호! 역시 우리 서방님은 배포가 커.”
“그걸 이제야 알았어. 그리고 섬진강에 갔다가 장인과 장모님이 일본가는 날짜에 맞춰서 서울로 올라가자. 그래서 시계도 사고, 혼자 남을 처남도 돌봐주고.”
“군대까지 갔다 온 24살이 애야. 우리가 돌봐 주게.”
“그래도 동생이잖아.”
그날 창원의 호텔 방 침대에는 정말 현금 500만 원이 골고루 뿌려져 있었고, 민은정과 나는 돈방석에 앉은 것이 아니라 돈 침대에 누워서 잠시 그 기분을 만끽했다. 그런 다음에는 민은정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해주는 모든 서비스를 정말 가만히 누워서만 받았다.
그러니 내가 사준 결혼 시계를 한강에 던져버린 일은 까마득하게 잊히고 말았다.
“오빠, 좋았어?”
“응, 최고였어. 그러니 잠시 쉬었다가 한 번만 더 해줘. 특히 저놈을 더. 알았지?”
그 밤 이것저것 요구까지 하면서 3번이나 민은정의 서비스를 받은 것도 모자라서 다음 날 아침 또 2번이나 더 서비스를 받고, 하동으로 가서 진짜 질리도록 벚굴과 재첩 회무침을 먹었다.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