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트라이앵글(3)
36화. 트라이앵글(3)
주황색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내부는 시진이 알던 성당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하얀 대리석 바닥과 스테인글라스, 그리고 낮고 기다란 교회 좌석. 교회 좌석 너머에는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 대신 운명의 신 마르쿠탄의 조각상이 있었다.
지구의 성당과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점도 분명이 있었다. 일단 스테인글라스의 인물들이 시진이 알고 있던 모습들과는 달랐다. 하느님대신 운명의 신 마르쿠탄과 환상의 신 카이넬을 비롯해 시진이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물 외부에는 다양한 동상들이 있었는데 마침 미사 시간이었는지 몇몇 사람들이 성당 주변을 돌며 기도문을 읽고 있었다. 약 50명 정도의 인원으로 많지는 않았지만 기도를 하는 사람들 표정 하나하나가 진지하고 경건했다.
시진은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리서 구경하다 다시 내부로 들어왔다. 내리쬐는 햇빛이 이 성당의 스테인글라스와 만나 잘게 부서지며 별다른 조명 없이도 성당 내부를 환히 밝혔다.
- 위이이잉!
낮고 기다란 교회 좌석 너머에는 있는 운명의 신 마르쿠탄의 조각상에게 다가간 시진이 조각상에 손을 올리는 순간. 마치 마르쿠탄의 조각상과 공명하듯 허리에 찬 투스칸이 잘게 떨렸다.
- 시진. 여기다. 여기 어딘가에 나의 봉인 조각이 존재하는 것이 느껴지는구나.
“뭐라고? 운명의 신 마르쿠탄을 모시는 성당에 투스칸의 봉인 조각이 있다고?”
- 이 조각상 어딘가에 봉인된 조각과 연결된 끈이 있을 것이야. 잘 살펴 보거라.
특이점을 찾아내기 위해 시진이 마르쿠탄 조각상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성당 외부를 돌며 기도를 하던 사람들이 성당 안으로 들어와 미사를 이어가려는 듯 50 여명의 사람들이 들어와 시진이 있는 마르쿠탄 조각상과 가까운 좌석에 앉기 시작했다.
“투스칸.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다음에 다시 와야겠어.”
- 크흠. 하필 미사 시간과 겹치다니 빌어먹을...
* * *
시진이 피아종 성당을 방문한지 3일이 지났지만, 첫 방문이후 매일 같이 성당을 방문해 미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들어올 때까지 성전 곳곳을 돌아다니며 투스칸의 봉인된 조각의 흔적을 살폈지만, 딱히 의심 갈 만한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투스칸. 마르쿠탄 조각상 근처에서 봉인의 흔적을 느낀 건 확실한 거지?”
-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네놈도 이 검이 진동하는 것을 봤지 않느냐.
그랬다. 시진이 성전 안에 세워져 있는 마르쿠탄 조각상에서 멀어지면 검의 떨림이 잦아들고, 조각상에 가까워지면 다시 진동을 했다.
“투스칸. 별다른 마력의 흐름 같은 건 없었어?”
- 크흠. 이건 필시 빌어먹을 마르쿠탄 놈이 요상한 결계를 펼쳐 놓은 탓이니라. 그렇지 않고서야 며칠째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구나.
“흐음...아직 확인해보지 못한 곳이 한군데 있긴한데....”
“그게 어디냐? 뭐라도 찾아낸 것이냐?”
봉인의 흔적을 발견할 때만해도 당장 봉인의 조각을 흡수할 수 있을 줄 알았던 투스칸은 며칠째 헛탕만 치게 되자 조급함이 들어 시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다급히 되물었다.
“아직까지는 단순한 추측일 뿐이야. 이따 밤에 한 번 더 확인해 볼 테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
오늘도 헛탕을 치고 돌아온 투스칸은 숙소의 낡은 책상에 앉아 피에르의 연구실에서 가져온 마법 서적을 시진과 함께 읽으며 날이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렸다.
딱히 시진이 투스칸과 함께 마법 서적을 공부할 이유는 없었지만, 검에 봉인된 투스칸 스스로 마법 서적을 넘기거나 읽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시진도 성당에 다녀 온 나머지 시간을 투스칸과 함께 마법 서적을 읽으며 보내게 되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지루하고 더디게 흐르는 긴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도시 전역에 어스름이 내려 앉으며 마석등이 켜졌다.
- 시진. 빨리 출발하지 않고 뭘 그리 주섬주섬 챙기는 것이냐?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보채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봐.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봉인이 그냥 풀어질 일은 없을테고 뭔가 엄청난 것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단단히 준비하고 가야지.”
시진은 투스칸과 처음 만났던 던전을 지키고 있던 골렘과 각종 함정의 흔적을 떠올리며 무구점에서 새로이 구입한 장비를 착용했다. 새롭게 구매한 장비는 시진의 상체에 딱 맞게 만들어진 가죽과 사슬이 복합적으로 이어진 갑옷이었다.
흉부와 등, 어께에는 철판을 추가로 덧대고, 허리 아래는 사슬로 된 짧은 치마가 하반신을 보호해주었다. 아직 꺼내지 못한 상자에는 손등과 손목 부위를 철판으로 마감한 가죽 완갑과 튼튼해보이는 각반, 그리고 부츠까지 세트로 된 것이 들어있었다.
“은신!”
갑옷 허리부분과 이어진 사슬치마를 돌돌 말아 찰랑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허리띠에 단단히 고정시킨 시진은 숙소의 창문을 나서기 전부터 은신을 사용해 아무도 모르게 토트넘의 밤거리를 지나 성당에 들어섰다.
성당 내부는 조명이 모두 꺼져있어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마르쿠탄 조각상의 머리 위로 나있는 스테인글라스를 통과한 빛무리가 잘게 부서지며 어둠속에서 유일하게 오색빛깔로 빛나는 마르쿠탄 조각상은 오묘함을 자아냈다.
“이야~ 밤에 보니 이것 나름대로 장관인데.”
- 크흠. 별 해괴한 짓거리를 다 해놓았구나. 나도 마계로 돌아가면 저것보단 백배 아니 천만배는 더 멋들어진 조각상이 있느니라.
“진짜? 그럼 봉인 다 풀고 마계로 돌아가게 되면 나도 보여주는 거다.”
-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확인해볼 것이 있다 하지 않았느냐. 어서 그것부터 확인해 보거라.
허세 가득한 투스칸과 농담을 주고 받으며 긴장을 덜어낸 시진은 한쪽의 저울에만 올려져 있는 피처럼 붉은 구체쪽으로 기울어진 천칭을 들고 있는 마르쿠탄 조각상 앞으로 걸어갔다.
“투스칸. 준비 됐지?”
- 나는 아까부터 준비하고 있으니 어서 시작 하거라.
“후...우...트랜스포메이션 숏소드!”
- 뭐... 뭣? 하라는 확인은 하지 않고 왜 해괴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 어서 서두르거라!
매번 마검 투스칸을 다른 형태로 변경할 때마다 특별한 명령어 없이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힘겨웠던 시진은 투스칸에게 마법을 익히며 배운 시동어를 외치듯 무기의 형태를 변형할 때도 명령어를 붙임으로써 변형된 이미지 그리는 것에 한결 편안함을 느꼈고, 이에 호응하듯 시스템에도 스킬로 등록 되었다.
[띠링!]
[스킬 각성: 트랜스포메이션(B)]
“하하하핫! 좋았어! 역시 할렐루야! 아스라엘!”
- 아직도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 어서 확인하지 않고 뭐하고 있는 것이냐!
“눼.눼. 이제 진짜 갑니다. 가요!”
- 탁. 탁 탁.
- 착!
시진은 떠올린 이미지대로 손에 착 감기는 단검의 모습으로 변한 투스칸을 한 손에 들고 마르쿠탄의 조각상을 밟으며 어깨 위로 올라갔다. 조각상의 어깨에 걸터앉은 시진은 천칭의 비어있는 저울 위에 투스칸을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 ...고작 이것을 확인한다고 했던 것이더냐!
“어...음... 투스칸...? 마력을 천칭에 흘려봐. 이왕이면 반대편 저울에 있는 붉은 구체도 함께 감싸면서...”
- 끼...리...릭.
시진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성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안절부절 못하며 조바심을 낸 투스칸이 재빠르게 흘려 넣은 마력을 흡수한 천칭의 저울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서서히 수평을 찾기 시작했다.
- ...
“...”
기울어진 붉은 구체의 저울이 서서히 올라오며 붉은 구체와 투스칸이 올려진 저울이 드디어 완벽한 수평을 유지했다.
“이런 씹...이게 끝이야?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천칭의 촛대를 두드려 보기도 하고, 투스칸을 저울에서 내렸다 다시 올려도 봤지만 마르쿠탄의 천칭은 더 이상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시진. 혹시 아스라엘의 마력을 움직일 수 있겠느냐?
“갑자기 아스라엘이 왜 나와? 아스라엘의 마력이라면 이미 이것저것 섞여버려서 따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투스칸이 더 잘 알고 있잖아?”
- 크흠... 빌어먹을! 아스라엘의 마력이 봉인을 푸는 마지막 열쇠인 것 같은데... 다 틀린 것같구나.
“아... 어쩌면 잠시만.”
붉게 빛나는 구체와 옅은 핑크색을 내뿜는 저울에 올려진 투스칸을 바라보며 고민을 이어가던 시진은 자신의 마력을 천칭의 가운데에 솟아있는 촛대에 흘려보냈다.
- 끼리리릭.
- 스팟!!
시진의 마력을 받아들인 천칭의 촛대가 갈라지며 뿜어져 나온 눈부신 오색빛깔의 광채가 성당 내부를 대낮처럼 환히 밝혔다.
시진의 눈앞에서 뿜어진 오색빛깔의 광채에 눈뽕을 맞은 것처럼 시각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시진의 귓가에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고, 시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한 손에는 투스칸을 다른 한 손에는 붉은 구체를 집어 들며 몸을 날렸다.
- 콰쾅!
- 안돼! 멈춰라!
시진이 천칭 위에 올려진 붉은 구체와 투스칸을 집어 들며 몸을 날리는 순간. 천칭의 촛대에서 밝게 빛나던 오색빛깔 광채가 더욱 존재감을 내뿜으며 시진을 집어 삼켰다.
- 콰콰콰쾅!
성당의 한쪽 벽면을 부수며 난입한 검은 가면의 여인은 마르쿠탄 조각상이 들고 있는 천칭에서 발산되는 오색빛깔의 광채를 마주한 순간 사고가 정지되며 성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췄다.
몇 초간의 정적에서 깨어난 검은 가면의 여인은 눈부신 오색빛깔의 광채를 뿜어내는 천칭을 향해 몸을 날리는 시진을 본 순간 다급히 시진을 향해 자신의 머리통만한 파이어볼을 날려보냈다.
검은 가면을 쓴 여인의 머리통만한 파이어볼에 직격당한 마르쿠탄 조각상은 굉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났고, 성당내부를 먼지와 파편으로 가득 채웠다.
“빌어먹을!! 찾아라!! 놈이 어디에 숨어 있든 반드시 찾아야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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