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재회
38화. 재회
[피아종 성당]
“여왕님. 성당을 샅샅이 뒤졌지만 놈의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빌어먹을 도시를 전부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야 한다!”
붉은 가면을 쓴 세르히오 남작에게 여왕이라 불리는 두툼한 블랙벨벳 망토와 얼굴의 반을 가리는 검은 가면을 쓴 상급 뱀파이어에 불과한 에밀리는 오랜 시간을 지난 천마대전 이후 흩어진 종족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했지만, 종족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뱀파이어 퀸으로 거듭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또 다시 오랜 연구 끝에 자신이 뱀파이어 퀸이 되기 위해서는 피아종 성당에 비밀리에 보관 중인 진혈의 혈청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밀리는 진혈의 혈청을 빼내기 위해 수 없이 피아종 성당을 찾았지만, 마르쿠탄이 펼쳐 놓은 결계를 파훼 할 수 없어 진혈의 혈청을 손에 넣지 못하고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2백년전 트라이앵글이라는 암살단을 만들어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마르쿠탄의 결계를 파훼할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하던 에밀리는 얼마전 해적왕 루카스가 어느 상단에게서 노획한 트리엘의 마기가 일부 흘러들어 간 유물을 이용하면 마르쿠탄의 결계를 파훼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권속을 동원해 도시 경비대의 눈을 속이고 드디어 오늘이야 말로 뱀파이어 퀸으로 거듭날 수 있는 역사적인 날에 어떤 미친놈이 나타나 진혈의 혈청을 눈앞에서 도둑맞아 버리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여왕님. 수색 범위를 도시 전체로 확대하게 되면 마력 관제실로 보냈던 병력을 빼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저희가 노출이 되게 됩니다.”
- 쾅!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에밀리가 내리친 주먹에 피아종 성당 한쪽 벽면이 무너져 내렸다.
“지하도시의 바르쿠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오늘 밤 안에 놈을 찾아내거라!”
“하오나, 바르쿠스가 무엇을 요구할지 여왕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하도시의 반군 대장 바르쿠스는 오래전부터 에밀리에게 끈쩍한 시선을 보내며 자신의 배 아래에 눕힐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에밀리가 먼저 바르쿠스에게 손을 내민 이 상황을 놈이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라 세르히오 남작은 확신했다.
“끄응. 상관없다. 진혈의 혈청만 취할 수 있다면 그깟 바르쿠스 따위는 언제든 치워버릴 수 있으니 어서 연락을 취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마력 관제실이 있는 방향에서 들려오는 굉음과 함께 치솟아 오르는 시뻘건 불길을 바라보는 에밀리의 머리는 연신 울려대는 도시의 비상 경보음 때문에 더욱 복잡해졌고, 어쩌면 일이 틀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면 아래 드러난 아랫입술을 씹으며 초조함을 드러냈다.
* * *
“크하하하. 나 또한 네놈을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이리와서 앉아.”
예상치 못한 만남에 서로가 놀라워했고, 민머리 사내와 투스칸은 친분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시진은 그것이 악연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민머리 사내를 묘한 눈길로 바라보며 시진은 조심스레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응? 왜 네놈이 거기 앉는 것이냐?”
이 미친새끼는 뭐야. 지가 앉으라 해놓고... 혹시 치매라도 걸린 건가.
“자리에 앉으라고 해서 앉았는데요. 무슨 문제라도?”
“하... 이 맹랑한 놈 보소. 난 투스칸에게 자리를 권했지 네놈더러 앉으라 하지 않았다.”
그럴거였으면 대상을 지칭해서 말을 하던가. 성격 좋고 잘 생긴 내가 참아야지. 에효.
민머리의 사내를 흘겨보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던 시진은 오두막에 들어오면서부터 입안을 맴돌며 목을 간질거리며 생각이 날듯 말듯하며 떠오르지 않던 것을 마침내 생각해냈고, 일련의 필터처리 없이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어버렸다.
“그래! 머머리 마르쿠탄! 맞네.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머리숱 때문에 알아보지 못한 거였네. 머리는 언제부터 빠진 거? 아니지 처음부터 없었나? 조각상은 머리가 풍성했는데...음...뽀샵인가? 아니지...뽀샵이 있을리 없으니 조작인가? 하하하하.”
- 쾅!
“뭐...뭐...감히... 네놈이!”
필터링 되지 않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시진의 말에 뒷통수까지 붉게 달아오른 마르쿠탄이 큼지막한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나무 밑동을 베어내어 만든 테이블은 마르쿠탄의 일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그대로 터져버렸고, 비산하는 조각들을 피해 시진은 다급히 나무바닥을 굴렀지만, 잘게 쪼개져 비산하는 수많은 파편들은 시진을 고슴도치로 만들기 충분했다.
“으아아악!”
“하찮은 인간 따위가 본좌를 우롱하다니 각오는 되어있겠지?”
- 마르! 진정해. 오늘 같이 좋은 날 피 봐서 좋을 것 없잖아. 날 봐서라도 그만 진정하게.
시진을 일격에 때려 죽일 것 처럼 매서운 살기를 피우며 다가오는 마르쿠탄의 귓가에 실로 오랜만에 들려오는 옛 친구 투스칸의 음성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시진을 찢어 죽일 듯 한참을 노려본 후 자리로 돌아갔다.
“네놈은 투스칸 덕에 목숨 부지하는 줄 알아. 또 한 번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면 그땐 투스칸이고 뭐고 가만두지 않을테다.”
- 그만하고 앉으라니까. 대머리에게 머머리하고 하다니. 크흠. 이번에는 시진. 네가 잘못한 것이니 얼른 사과하거라.
고슴도치 신세가 되어 나무바닥에 쓰러져 있던 시진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테이블의 부서진 파편이 상처를 더욱 깊이 파고들며 온 몸을 바늘로 쑤시는 끔찍한 고통을 참아내며 마르쿠탄에게 사과했다.
- 스파아앗!
“죄...송해요. 생각이 날듯 말듯하며 생각나지 않던 것이 떠올라 그만. 저도 모르게 흥분 했어요. 죄송합니다.”
투스칸의 만류와 시진의 사과를 들으며 마르쿠탄이 허공에 팔을 휘젓자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부서진 테이블의 파편들이 하나, 둘 허공에 떠오르며 영상을 되감은 듯 제자리를 찾아갔다. 심지어 시진을 고슴도치로 만들었던 파편들도 뽑혀져 나오며 제자리를 찾아갔고, 시진의 상처도 말끔히 회복되었다.
“투스칸. 넌 왜 아직도 그 모습인거....아....그래...너 아직 봉인 중이지? 깜빡했구먼.”
- 스파아앙!
마르쿠탄의 큼지막한 손으로 다시 한 번 허공을 휘젓자 오색찬란한 광채가 투스칸에게 스며들었다. 눈부신 광채를 내뿜던 빛무리가 사그라들고 핑크빛 갑주를 걸친 날렵한 몸매의 투스칸이 오두막의 작은 창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옅은 핑크색 머리칼을 정리하며 자리에 앉았다.
- 크흠. 오랜만이로구나.
“뭐..뭣? 뭐가 잘못됐나? 내가 일부러 그런게 아니야....잠시만...”
- 스파앗!
머리색부터 시작해 온 몸에 핑크색으로 통일된 복장을 한 투스칸을 마주한 마르쿠탄은 자신이 무언가 실수했음을 자각하고 성질 급한 투스칸이 발작을 일으키키 전에 재빨리 손가락을 튕겼다.
- 따악!
다시 한 번 오색찬란한 광채가 투스칸의 전신에 스며들었고, 서서히 실루엣이 드러나며 바람에 흩날리는 투스칸의 핑크빛 머리칼... 그리고 핑크빛 갑주를 착용한 투스칸이 심드렁하게 말을 뱉었다.
- 마르. 이제 그만해. 그간 일이 좀 있어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마.
“쯧.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 명색이 어둠의 마왕이라는 작자가 핑크색으로 깔맞춤을 하고 있는 거야? 난 또 그새 남색을 즐기는 취미라도 생긴 줄 알았네.”
멋쩍은 표정으로 자신의 핑크색 머리칼을 매만지는 투스칸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핀잔을 주는 마르쿠탄에게 깊은 숨을 내쉬며 투스칸이 대답했다.
- 후..우..사고는 내가 아니라 저 놈이 쳤지.
“저놈이? 그런 능력은 없어 보이는데?”
투스칸이 핑크색으로 깔맞춤한 이유가 살인유발 주둥이를 보유한 시진이라 불리는 한 인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마르쿠탄의 매서운 눈빛과 마주친 시진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고, 시진은 다급히 품에서 붉은 구체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저기..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한데 여기에 있는 봉인을 어떻게 하면 풀 수 있을까요? 혹시 마르쿠탄님이...”
“그거 못 풀어. 아니 지금은 안돼!”
시진이 마르쿠탄의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재빨리 투스칸의 봉인된 조각이 들어있는 붉은 구체를 꺼내자마자 마르쿠탄으로부터 봉인을 풀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 무슨 말을 그리 요상하게 하는 거야?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말 그대로 그거 풀 수는 있는데 지금은 안돼.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네놈이 하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니 저 놈이랑 연이 깊은 모양인데 지금 풀면 저 놈은 죽어.”
“네? 제가 왜 죽어요?”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시진이 중간에 끼어들며 자신의 말이 끊어지자 마르쿠탄은 투스칸의 얼굴을 봐서 잠시 한 켠에 미뤄두었던 짜증이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쓰읍! 넌 그 주둥이 닫고 얌전히 있거라. 네놈이 죽는 건 상관없는데 네놈이 없으면 투스칸의 나머지 봉인도 영영 풀 수 없게 되니까. 지금은 안 된다는 거야.”
- 설마... 시진이 아스라엘의 영혼을 흡수한 것과 연관이 있는 거야?
그랬다.
애초에 투스칸의 봉인은 주신 크로노스가 와도 온전히 봉인을 풀 수 낼 수 없도록 봉인진을 만든 본인만 풀 수 있게 아스라엘이 심혈을 기울여 설계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아스라엘은 시진과 투스칸에 의해 소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그나마 아스라엘의 영혼을 흡수한 시진만이 투스칸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는 것을 마르쿠탄을 통해 알게 된 투스칸과 시진이었다.
- 마르. 시진이 있으면 봉인을 풀 수 있는 것은 알겠는데 저놈이 왜 죽는다는 거지? 병든 고블린 먹이 먹듯 찔끔찔끔 뱉지 말고 속 시원히 말을 하란 말이야!
“거참. 말을 하고 있는데 중간에 끊은 것이 누군데 왜 화를 내는 거야! 투스칸 너도 눈이 있으면 알 것 아냐! 저 비리비리한 몸으로 이 진혈의 혈청이 가진 힘을 저놈이 버터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마르쿠탄의 말을 다 들은 투스칸은 테이블에 올려진 진혈의 혈청이라는 붉은 구체와 시진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상념에 빠진 투스칸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시진과 마르쿠탄은 숨소리마저 죽이며 침묵했고 오두막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투스칸의 두어 걸음 뒤에 있는 시진이 침 삼키는 소리가 오두막에 메아리처럼 들릴 정도였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두 눈을 감고 깊은 상념에 빠졌던 투스칸이 번쩍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 ...씨부럴. 시진! 오늘부터 특훈이다!
* *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