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각성(2)
18화. 각성(2)
몰살당한 1차 수색대원의 흔적을 쫓아 들어간 침엽수림의 외곽에 위치한 잿빛 고블린의 부락을 발견한 2차 수색대는 어둠이 짙게 깔린 야심한 시각에 기습을 감행했으나, 이를 알아챈 놀 무리가 역으로 수색대를 포위하고 잿빛 고블린과 협공해왔다.
서로 영역다툼이 잦아 견원지간이라 불릴 정도로 정도로 사이가 좋지 못한 고블린과 놀의 협공이라는 상상조차 못한 일이 2차 수색대에 들이닥쳤다. 놀이나 고블린쯤이야 칼튼 기사단과 부단장 아멜다에게는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지만, 잿빛 파도가 밀려오듯 포위망을 좁혀 오는 놀과 고블린의 수가 수백을 넘어 천을 바라보는 지경에 이르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제임스! 불! 불을 지르고 퇴로를 확보해!!”
바람에 찰랑이는 금빛 단발머리의 칼튼 기사단 부단장 아멜다가 내지른 일 검에 잿빛 고블린과 잿빛 놀 한 무리가 쓰러졌지만, 동료의 피를 본 놈들은 불씨를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더욱 광분한 모습으로 달려들 뿐이었다.
“부단장님! 불을 지르긴 했는데 퇴로를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크으!! 빌어먹을 놀 따위에게 당할 줄이야! 으아악!!”
평소 하찮게 생각했던 놀과 고블린 따위에게 수세에 몰린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지만, 아멜다 부단장은 분노의 검을 내지르면서도 주변을 살피며 퇴로를 찾았다. 그 순간 미약하지만 마력의 파동이 바람에 실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파동의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옮긴 아멜다는 잿빛 고블린과 잿빛 놀이 구축한 포위망의 끝자락에서 날렵한 몸짓으로 나무 위를 옮겨다니는 기르틴을 발견했다.
“제임스! 원군이 도착했다. 길은 나와 칼튼 기사단이 길을 뚫겠다. 너는 병사들을 이끌고
쐐기진형으로 포위망을 단숨에 돌파한다.”
“원군이 도착했다! 모두 대열을 갖춰라!”
“와아아!!”
놀과 고블린 무리에 의해 고립당한 2차 수색대는 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큰 함성을 지르며 아멜다 부단장을 앞세워 잿빛 파도를 뚫기 시작했다.
* * *
“잠깐! 투스칸! 금발 머리의 기사가 이쪽이로 오고 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우기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여기로 온다는 거야?”
- 크흠. 기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마력을 농도를 짙게 운용한순간을 눈치챈 것 같더구나.
“뭐? 그게 무슨...”
순간 시진의 귀에 어렴풋이 비명 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끔찍한 고통에 몸을 비트는 짐승과도 같은 비명이었다.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부락에는 여전히 뜨거운 불길과 매캐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지만, 지금 들리는 비명 소리는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심지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 크아아아왕!!
- 오르크!! 오르크!!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성이 울리자 수색대를 공격하던 놀과 고블린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한 목소리를 내며 발을 굴렸다. 마치 스파이럴 숲 전체가 떨려오는 것 같았다.
- 크아아아왕!!!
땅의 울림이 멈출 때쯤 다시 한번 괴성이 들려왔고, 수색대를 포위하던 놀 무리가 돌연 방향을 돌려 시진 일행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잿빛 해일이 밀려드는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잿빛 해일을 마주한 시진을 향해 불길하고 음산한 어둠의 기운이 엄습했다.
“으힉!!”
- 다들 도망치거라! 너희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의 괴성에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어 움직일 수 없던 잿빛 남매는 투스칸의 외침으로 겨우 경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투스칸님. 방금 것은 뭐였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 몬스터 피어에 당한 것이니라!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서 피하거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숫자에 시진 일행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숲을 가로지르며 내달렸다. 피어에 노출된 시각은 극히 짧았지만,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놀과 고블린들이 급격히 거리를 좁혀왔다.
“기르틴! 좌측으로 들어가!!”
시진은 철천지원수라도 된 것처럼 맹렬히 쫓아오는 몬스터를 따돌리기 힘들다는 판단하에 놈들을 이끌고 침엽수림 구역으로 들어갔다. 침엽수림 구역에 진입한 시진은 검을 제대로 휘두르기 힘들 정도로 빼곡히 들어 찬 침엽수를 향해 검을 힘껏 내리쳤다.
- 서걱! 쿠쿵!!
- 키크? 크케키!
짙은 어둠을 뚫고 시진 일행을 추격하던 고블린과 놀은 눈앞에서 갑자기 쓰러지는 침엽수를 미처 피해내지 못하고 침엽수와 부딪혀 바닥을 나뒹굴었다. 선두의 고블린과 놀이 침엽수와 부딪쳐 쓰러지자 그 뒤를 맹렬히 쫓아오던 다른 고블린과 놀이 다급히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서려고 했지만, 달려오던 관성을 이기지못하고 서로 뒤엉키며 침엽수림을 나뒹굴었다.
- 서걱! 쿠쿵!!
- 크케? 케키쿠!
시진에 의해 쓰러지는 침엽수에 부딪혀 바닥을 나뒹구는 고블린과 놀의 수가 늘어나자 자연스레 추격해 오는 놈들의 속도가 느려졌다. 그것을 확인한 시진은 눈앞에 보이는 침엽수를 닥치는 대로 베어내며 달렸다.
시진 일행과 이를 뒤따르는 고블린과 놀로 인해 침엽수림 전체가 몸살을 앓는 듯한 소란에 침엽수림에 머무는 잿빛 고블린들이 소란의 근원지를 찾아 밤 걸음을 나섰고, 마침내 시진 일행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오빠! 앞에도 잿빛 고블린이 나타났어요!”
“타르웬! 우회해서 야영지로 방향을 틀어!”
맞닥뜨린 잿빛 고블린과 드잡이를 벌일 시간이 없던 시진은 전방에 나타난 잿빛 고블린을 무시한 채 지난밤 야영을 했던 개울 근처의 입구가 좁은 바위틈으로 방향을 잡고 침염수림을 내달렸다.
- 케르쿠? 케쿠?
자신들을 보자마자 방향을 틀어 도망치는 시진 일행을 멍하니 바라보던 잿빛 고블린들은 뒤이어지축을 울리며 다가오는 잿빛 해일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단말마를 지르며 잿빛 해일에 휩쓸려 버렸다.
“시진이 형! 엎드려요!”
- 슈슉! 퍽!
성인 두 명이 겨우 정도 드나들 수 있는 좁은 바위틈으로 먼저 몸을 피한 기르틴이 발사한 화살은 시진을 향해 높이 점프한 고블린의 미간 박혔고, 시진은 바닥을 슬라이딩하듯 미끄러지며 바위틈으로 들어왔다.
“오빠!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이제 어쩌죠?”
“틈이 좁아 한 번에 많아야 셋? 넷? 정도만 상대하면 될 거야. 내가 입구를 틀어 막을 테니 놓치는 놈이 있으면 타르웬이 처리해. 입구만 잘 막으면 버틸 수 있어.”
좁은 입구를 시진이 막고 놓치거나 옆으로 빠져나오는 놈을 타르웬이 처리하는 것만큼 다수를 상대하기 효율적인 것이 없었지만, 타르웬은 놈들의 대부분을 감당해야 되는 시진이 걱정됐다.
“그건 오빠한테만 너무 부담이 가중되잖아요!”
“위험하다 싶으면 투스칸이 알려 줄 거야. 그때 나랑 교대하면 돼. 타르웬은 내가 투스칸을 통해 에너지 드레인으로 체력을 보충할 동안만 버텨주면 돼. 할 수 있지?”
“시진이 형. 그럼 나는 뭐 해요?”
“너? 흠... 타르웬과 교대하고 내가 체력을 보충하는 동안 타르웬이 놓치는 놈을 처리해. 다들 준비됐지?”
비좁은 입구를 틀어막은 시진은 잿빛 남매에게 각자 할 일을 지시한 뒤 좁은 바위틈의 입구를 막아선 체 갈색털 위에 무질서하게 잿빛 무늬가 짙게 드리운 놀과 붉은 안광을 뿜으며 달려드는 잿빛 고블린을 베고 또 베어냈다.
“쌰~발라~~!!”
* * *
스파이럴 숲 전체를 울리는 정체 모를 괴성이 들리자 장벽처럼 2차 수색대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놀과 고블린 무리가 돌연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수색대의 뒤에는 여전히 많은 수의 고블린과 놀이 쫓아오고 있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던 잿빛 장벽이 없어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 여겼다.
수색대가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연이어 들리는 괴성과 함께 불타오르는 고블린 부락에서부터 발산되는 엄습하는 불길하고 끈쩍한 기운을 느낀 아멜다는 내딛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부단장님! 어서 가야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그래... 모두 전력을 다해 돌파한다!”
소용돌이치는 음습한 기운을 뒤로하고 수색대를 이끌고 고블린 부락을 빠져나온 아멜다의 눈앞에 믿기 힘든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 높이 곧게 뻗어 있던 침엽수림은 태풍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수많은 침엽수가 부러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그 침엽수에 깔리고 짓눌려 죽은 잿빛 고블린과 잿빌 놀로 이루어진 백여구의 사체가 짙게 깔린 어둠과 어우러져 지옥도를 연상케 했다.
“부단장님!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요?”
“흠...짓눌린 것이 아니라 짓밟힌 것이다.”
“네? 그게 무슨?”
두 눈을 감은 아멜다의 머릿속에 부러진 침엽수에 깔리고 달려가는 속도를 줄이지 못해 서로 부딪치고 뒤엉키며 바닥을 나뒹구는 잿빛 고블린과 잿빛 놀. 그리고 그런 동료를 아무렇지 않게 무참히 짓밟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놈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누군가를 쫓으며 넘어진 동료를 그냥 짓밟고 달려간 흔적이란 뜻이다. 놈들이 되돌아오기 전에 여길 벗어나야 돼!”
“네! 알겠습니다.”
* * *
“쌰~발라~!!”
좁은 바위틈을 막아선 시진이 힘찬 함성과 함께 검을 휘두를 때마다 놈들의 신체 일부가 바닥에 떨어졌다. 고블린과 놀을 베어낸 검을 미처 회수하기도 전에 달려드는 또 다른 고블린의 머리통을 잡고 타르웬이 있는 뒤로 넘겨 버리고 끝없이 밀려드는 놈들을 향해 또다시 검을 내지르는 시진이었다.
- 시진! 검을 끊어치라 하지 않았느냐! 또!! 힘이 너무 들어갔느니라!
시진에게 머리통이 붙잡혀 뒤로 내던져진 고블린의 몸통에 재빨리 다가온 타르웬이 단창을 쑤셔 넣었다.
- 타르웬! 창을 찌르기 전 예비동작이 너무 크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움직이다간 금세 지쳐 버리고 말 것이야!
“네...”
- 시진! 타르웬! 교대하거라!
투스칸은 타르웬과 시진에게 연신 잔소리 같은 지적을 해 오다 시진의 체력이 한계치에 다다를 때쯤 교대 신호를 보냈다. 시진은 투스칸의 교대 신호를 받고 자기 발목을 노리며 다가오는 놀의 손길을 점프하며 피했고, 시진의 좌측에서 다가오는 고블린의 머리통을 발로 차낸 반동을 이용해 뒤로 물러났다.
시진이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것을 확인한 타르웬은 짧게 잡은 단창으로 바닥을 쓸며 달려가 창날을 위로 쳐올려 시진의 발목을 공격하던 놀의 목덜미를 베어냈다.
“잠시만 버텨! 기르틴! 뒤를 부탁해! 후..우..”
타르웬과 기르틴에게 입구의 방어를 맡긴 시진은 주변에 나뒹굴고 있는 놈들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어 잔존 마력과 생명력을 흡수하며 체력을 보충했다.
-스팟!
-크흐으...프..
짧게 끊어친 검격에 성대가 끊겼는지 쇳가루를 잔뜩 삼킨 소리를 내며 목덜미를 부여잡는 놈을 발로 차내는 시진을 보며 타르웬이 말했다.
“허..헉...오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후..흠.. 글쎄. 당분간은 놈들도 진입하기 어려울 테니 좀 쉬어둬.”
성인 두 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비좁은 바위틈은 시진과 타르웬에 의해 운명을 달리한 놈들의 사체가 뒤엉키며 입구가 막혀 버렸다. 의도치 않게 유일한 진입로가 막히며 얻어낸 귀중한 휴식 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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