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저주술사 (1)
60화. 저주술사 (1)
토트넘의 함선이 처음 상륙한 장소에 도착한 시진 일행은 해적들의 주거지로 사용됐을 법한 단층 주택에서 피워오르는 매캐한 연기를 보며 어렴풋이 들려오는 필립의 목소리를 이정표 삼아 걸음을 옮겼다.
“놈들을 중앙으로 모으고, 부상자들을 좌측 주택으로 옮겨라.”
고개를 돌려 수평선 가까이 떨어진 태양빛에 의해 검푸른 바닷물이 주황빛 노을에 물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흙과 피로 범벅이 된 청동 갑옷을 입은 필립이 소리 높여 토벌대원들에게 주변 정리를 재촉하고 있었다.
“필립 경. 놈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을 것인데 잔당 토벌은 무사히 마친 겁니까?”
“네. 사도님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에 놈들의 예상보다 빠르게 상륙하며 미처 대비하지 못한 놈들을 사상자 없이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딱히 한 것은 없지만, 사상자가 없다니 찬란한 오색 빛의 가호가 있었나봅니다.”
“사도님께서 가신 일도 잘 되셨나봅니다.”
타르웬과 기르틴의 어깨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백금발의 샐리를 발견한 필립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날도 저물었고, 부상자도 수습해야 되서 내일 정오쯤에나 돌아갈 것입니다. 사도님께서도 그때까지 쉬고 계십시요. 쉬실 곳은 사람을 보내 곧 안내 해 드리겠습니다.”
“아. 한 가지 말씀드리지 못 한 것이 있는데 저희는 토트넘으로 돌아가지 않을겁니다.”
주황빛 노을 사이로 어스름이 드리우는 하늘을 슬쩍 돌아보는 시진의 말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굳힌 필립이 물었다.
“혹 여기까지 오는 동안 불편한 점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말씀해주시면 돌아가는 길은...”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니라 필립 경과는 행선지가 다를 뿐입니다. 저희는 배를 구하는 대로 연합왕국으로 떠날 겁니다.”
“아... 연합왕국이라면...”
시진의 다음 행선지를 조용히 되뇌이던 필립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반쯤 감은 눈을 치켜뜨며 해적들을 중앙으로 모으고 있는 청동 기사단원들을 돌아보며 누군가를 불렀다.
“에런! 이리와 보게.”
“...”
갑옷 사이사이에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인 갈색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20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청동 기사단원이 필립의 부름에 한 달음에 달려왔다.
“조장님. 부르셨습니까?”
“인사드리게. 이 분은 찬란한 빛 마르쿠탄님의 대행자이자 사도님이신 시진님이시다.”
“...?”
시진은 자신에게 대뜸 에런이라는 청동 기사를 소개해주는 이유를 몰라 대답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청동 기사단에서 유일한 연합왕국 출신입니다. 에런을 길잡이로 쓰신다면 행선지까지 가시는 동안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굳이 유능한 청동 기사단원을 한낱 길잡이로 쓰다니요. 그럴수는 없습니다.”
“에런! 사도님 일행분들을 연합왕국까지 무사히 안내 해드릴 수 있겠나?”
“청동 기사단 제 2조 에런 램스데일입니다. 토트넘을 위기에서 구하신 위대하신 분을 만나게... 아니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아..”
긴장된 얼굴로 서 있던 에런은 시진 일행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고, 그런 에런을 흐믓하게 바라보는 필립과 시선이 마주친 시진은 더 이상의 거절이 통하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짧은 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에런 경. 연합왕국으로 가는 항로를 알고 있는 항해사와 선원을 구해 출항 준비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최대한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 *
- 똑.똑.똑.
“사도님. 에런 입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잔 시진 일행이 식탁에 모여 따뜻한 스프와 갓잡은 싱싱한 생선으로 늦은 아침식사를 먹고 있을 때 시진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주택의 현관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시진을 부르는 에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 딸깍.
“에런 경. 무슨 일로...”
“지시하신 항해사와 선원들을 모두 구했습니다.”
피와 살점이 흥건했던 청동 갑옷 대신 가벼운 가죽갑옷과 가죽 부츠로 갈아입은 말끔한 모습의 에런 뒤편에 불과 이틀 전만 하더라도 해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12명의 사람들이 가지런히 도열해 있었다.
“벌써요? 천천히 하셔도 되는데...”
“선박의 보수는 마쳤고, 연합왕국으로 가는 장거리 항해를 하기 위해 물자를 싣고 있는 중입니다. 빠르면 금일 오후에는 출항 준비를 모두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럼 내일 오전에 출항하는 것으로 하지요.”
“아닙니다. 금일 중으로 출항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내일 오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에런 경.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시진을 만나기전부터 마르쿠탄의 절실한 신도였는지 알 수 없지만, 시진의 길잡이가 되고부터 열성적으로 움직이는 에런이 조금은 부담스러운 시진이 12명의 선원들을 데리고 부두가로 돌아가는 에런에게 천천히 준비하라는 말을 남겼지만, 왠지 시진의 말을 제대로 들을 것 같진 않았다.
* * *
“출항!”
시진 일행이 모두 배에 오르자 함교를 향해 큰 소리로 출항을 알리는 에런의 명령에 맞춰 선박과 부두에 연결된 고정끈을 풀고 앵커를 올렸다. 검푸른 물결을 가르며 나아가는 배의 후면 갑판에 올라 불과 며칠전만 하더라도 해적들과 그들의 가족들로 북적이던 반파되고 텅비어버린 루카스의 본거지를 지켜보는 시진 곁으로 투스칸이 다가와 말했다.
-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것이냐?
“그냥...”
텅 비어버린 해적왕 루카스의 본거지를 떠나는 선박이 너울대는 물살을 가르고, 이윽고 반쯤 부서진 암초가 가득했던 수문을 초맥지대를 통과해 멀어지고 나서야 시진의 시선이 에런이 출항 준비를 하는 동안 시진의 정화작업을 거치며 잿빛으로 돌아 온 타르웬과 기르틴 그리고 윤기가 흐르는 백금발의 샐리에게 돌아갔다.
평소와 다름없는 눈빛으로 다시 시진 일행을 바라보던 시진의 시선이 샐리를 지나 두 눈을 빛내며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에런에 닿았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짧은 숨을 내쉰 시진이 입을 열었다.
“자. 미리 예고한대로 오늘부터 특훈이다. 특히 에런 경의 도움이 많이 필요합니다.”
“문제 없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 * *
- 차르르륵. 챠창.
투스칸과 시진이 향하는 연합왕국은 최근 부쩍 늘어난 알카사스 산맥에서 넘어오는 수 많은 마물들로 인해 치안은 물론이고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곳이었기에 연합왕국으로 가는 동안 새로운 무구에 적응하기 위해 선박의 전면 갑판에서는 타르웬을 노리며 뱀처럼 휘어져 날아오는 기르틴의 사슬 낫을 사슬이 달린 단창을 이용해 타르웬이 쳐내고 있었다.
- 쉭. 쉭. 슈캉.
“으윽. 이...개 잡종놈이! 블러드 커터!”
선박의 후면 갑판에서는 가죽 갑옷과 단검으로 간편 무장을 한 에런이 휘두른 단검에 복부를 가격당한 샐리가 두 손에 핏빛 칼날을 두른 체 뒤로 튕겨나자 윤기 흐르는 백금발을 붉게 물들이며 주문을 외워 에런을 향해 핏빛 칼날을 날려 보내는 모습을 보며 투스칸이 말했다.
- 크흠. 다들 잘 하고 있구나. 우리도 시작하자구나.
“좋아!”
* * *
- 차르르륵. 첨벙!
“우와! 월척이다! 에런 형! 봤어요? 월척이라구요!”
“잘했어. 아침은 그놈으로 하면 되겠네.”
- 퍽. 크앗!
“샐리 누님!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세요!”
“에런! 뒈지고 싶지 않으면 철딱서니 없는 기르틴 놈에게 일일이 반응해주지 말라고!”
아켈란 대륙의 최남단에서 연합왕국이 있는 대륙의 북부까지 장장 3개월에 걸친 여정동안 생선을 질리도록 먹은 샐리는 곧 북부연합의 브라이튼 왕국에 도착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르틴이 사슬 낫으로 잡은 생선을 아침으로 먹자는 에런의 뒷통수를 가격하며 살기어린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 크흠. 그동안 많이 친해진 모양이구나.
“친해져서 나쁠 것은 없지. 다만, 에런 경이 점점 기르틴화 되어 가는 것이 걱정이긴 하지만...”
지난밤 폭우의 영향인지 비가 내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은 한 점의 햇빛도 허용하지 않았지만, 자욱한 안개사이로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브라이튼 왕국의 항구도시 뉴캐슬의 부두에서 점멸하는 등대불빛이 시진의 시야에 잡혔다.
“어째 북부연합에 가까워질수록 먹구름이 더욱 짙어진 것 같은데 투스칸 생각은 어때?”
- 크흠.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구나. 뭐가 됐든 가보면 알겠지.
“시진 오빠. 나 빼고 투스칸님이랑 둘이서 무슨 얘기 했어?”
“저 멀리 뉴캐슬이 보인다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오늘 아침은 뉴캐슬에서 먹을 수 있겠네.”
“진짜? 나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이렇게 짙은 안개 속에서도 시진 오빠 눈에는 뭐가 보이는 거야?”
시진과 달리 하늘은 뒤덮은 먹구름과 짙은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타르웬이었지만, 아직도 에런과 실랑이를 벌이며 으르렁대고 있는 샐리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오늘 아침은 브라이튼 왕국에서 먹을 거니까. 샐리 언니도 이제 그만해!”
* *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