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네 것이 뭔데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64화>
네 것이 뭔데
* * * * *
“네 것이 뭔데?”
“알면서 물어? 벼리 씨는 내 것이야. 이미 통보했을 텐데.”
“나는 대답한 적 없어.”
“맘이 변하기라도 한 거야? 벼리와 사랑에라도 빠졌어?”
“사랑이냐고? 그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난 처음부터 그 말에 동의한 적은 없어.”
“동의한 적이 없다고? 난 너한테 동의를 구한 적 없어. 그냥 통보한 거야. 통보, 통보라고!”
“그럴 순 없어.”
“재인, 잊었어? 넌 나의 말을 들어야만 된다는 걸.”
“도현, 난 물론 널 지지하고 너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걸 알아. 난 널 좋아하잖아.”
“누가 날 좋아해 달라고 했어? 난 그냥 너에게 지금 통보하고 있는 중이야. 내 말에 이런저런 토를 달지 마!“
“토를 달자는 게 아니잖아. 다만.”
“다만이라고? 내 말 뒤에 다만이란 말을 붙였어? 그런 말은 동등한 사람들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야. 다만이라고? 어디서 다만, 이렇게 단서를 붙이는 거지?”
도현은 돌연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재인은 도현의 말에 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무슨 하지만? 아직 정신 못 차렸어?”
도현은 재인을 사정없이 발로 찼다.
재인은 옆으로 넘어지며 도현의 앞에 다시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벼리는 내 것이야. 건들지 마.”
“네, 조심하겠습니다.”
“사랑 놀음? 그 정도야 내가 봐줄 수 있어. 하지만 잠시 사랑 놀음까지만 해. 사랑은 안 돼. 곧 머잖아 나의 제물로 써야 해. 잊지 마.”
“네, 알겠습니다.”
“이만 갈게. 잘 해.”
도현은 재인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고 다시 정색하며 다정해졌다.
“재인, 뭘 이렇게 긴장해? 풀어, 친구 사이에 무슨 긴장이야. 안 그래, 김 교수?”
“그럼요, 회장님. 친구 사이에 긴장은 필요 없죠. 회장님이 잠시 장난한 걸로 재인이도 맞추는 거죠.”
조용히 지켜보든 김 교수는 도현의 아랫사람처럼 굽실거렸다.
도현은 이 모든 사람들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었다.
도현과 김 교수가 돌아가고 재인은 펜트하우스로 차마 돌아가지 못했다.
아주 오래도록 작업실에 머물러 있었다.
둘이 나가고 난 후 재인은 나가려고 실내의 불을 껐다.
그리고 나가지 못하고 불도 꺼 있는 방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벼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진동이 울리고 벼리라는 이름이 뜨지만 차마 받지 못했다.
그렇게 진동이 몇 번이 울리고 톡이 왔다.
<무슨 일 있어요? 괜찮아요? 걱정돼요. 내가 내려갈까요?>
몇 번인가 비슷한 내용의 톡이 왔지만 재인은 답하지 못했다.
자꾸만 도현의 말이 밟혔다.
“벼리는 내 것이야! 내 것은 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런 말의 의미를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재인은 벼리를 볼 수 없었다.
재인은 새벽이 되어서야 펜트하우스에 올라갔다.
벼리는 거실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재인은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 벼리를 안아서 침대로 데려가려다 방으로 들어가 담요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벼리가 깨지 않도록 담요를 덮어주었다.
재인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이 복잡했다.
벼리는 깨어나서 자신에게 덮어진 담요를 보며 재인이 다녀간 것을 깨달았다.
벼리는 벌떡 일어나 재인의 방으로 달려갔다.
재인은 없었다.
재인의 침대는 다녀간 흔적은 있었지만 이미 없었다.
벼리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몇 번인가 재인을 찾아 집을 둘러보던 벼리는 어떤 위험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벼리는 옷을 챙겨 입었다.
재인에게 문자를 남겼다.
<오빠 네 집에 다녀올게요. 재인 씨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제게 말해 주세요. 저는 언제든 재인 씨 편이에요. 재인 씨, 사랑해요.>
벼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쓸 때는 몇 번을 지웠다 썼다 하다가 어렵게 써서 보냈다.
그렇게 문자를 남기고 벼리는 간단한 짐을 싸고 집을 나섰다.
벼리는 간밤에 재인과의 다정했던 시간이 다시 떠올랐다.
그 시간은 아침이 되자 더 이상 마냥 다정한 기억만은 아니었다.
어떤 불안을 동반한 몸짓이었다.
그것은 벼리가 꽃과 가까이 하면서 체득한 감각이었다.
누군가 불안해 할 때 그 사람의 몸에서는 어떤 호르몬이 나온다.
어젯밤 도현이 찾아왔을 때 재인에게서 느껴졌던 호르몬은 불안의 호르몬이었다.
불안의 호르몬 중에서도 심한 불안을 만났을 때, 특히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때 발산되는 호르몬이었다.
그래서 벼리는 재인의 난처함을 피해주려고 올라왔던 것이었다.
그 뒤로 재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벼리는 작업실로 내려가는 것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재인의 불안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어젯밤의 도현에게선 맹수와 같은 호르몬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짓이겨 죽여 버릴 것 같은 섬뜩함이 있었다.
평소의 도현은 알 수 없는 모호한 따뜻함이 있었다.
분명 따뜻한 것은 아니었지만 따뜻하게 느껴졌었다.
도현은 따뜻한 것으로 잘 포장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건 벼리가 알 수 없는 종류의 보호막이었다.
벼리는 그저 따뜻한 도현의 심성이었으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어젯밤 도현에게선 맹수의 섬뜩한 잔인함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재인의 불안함은 너무도 컸다.
벼리는 어젯밤의 달콤함만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 순간의 잔혹감과 불안함의 대비적 감정선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벼리는 서둘러 연이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벼리와 연이는 찻집에서 만났다.
연이의 신문사 가까운 곳이었다.
연이는 이른 아침에 벼리가 직장에 찾아오자 무슨 일인지 걱정했다.
“벼리, 무슨 일 있어?”
“응, 재인 씨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지난밤에 도현 씨가.. 알지? 재인 씨 친구 도현 씨. 우주그룹 후계자 있잖아.”
“응, 알아. 소문났지. 곧 후계자 승계가 있을 거라고 해서 다들 놀라고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 도현 씨 아버지, 그러니까 우주그룹 회장이 갑자기 쓰러졌는데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기사가 났어.”
“도현 씨 아버지가 쓰러졌어?”
“응, 그래서 우주그룹에 대한 찌라시가 장난 아니야.”
“우주그룹 회장이면 건강하셨던 분 아닌가?”
“물론 건강했지. 그런데 갑자기 쓰러져서 그룹 차원에서는 안정적 운영을 위해 도현 씨에게 승계하기 위한 절차가 진행 중이라고 들었어.”
“갑자기 쓰러질 수도 있는 일이네.”
“그래서 인생은 모른다잖아.”
“혹시 사고는 아니겠지?”
“왜? 도현 씨에게 무슨 일 있어? 의심 갈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건 아니고 어젯밤 재인 씨를 만나러 왔는데 재인 씨가 도현 씨에게 위협을 받는 느낌이었어.”
“설마, 둘은 친구잖아.”
“맞아. 둘은 가장 친한 친구야. 그런데 친구 사이에 왜 위협의 느낌이 있었을까?”
“그런 일이 있었어?”
“사실은 그 일 때문에 언니를 만나러 왔어. 그런데 우주그룹의 승계가 이뤄지고 있다는 소리는 방금 들은 소식이야.”
“음, 무슨 관계가 있을까?”
“언니, 생각해 봐. 재인 씨와 도현 씨는 서로 친구야. 절대 위협적 관계가 될 수 없어. 만약 위협적 관계라면 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는 거겠지?”
“그런 문제가 있을 리가 없지. 도현 씨처럼 부드러운 남자는 난 못 봤어.”
“여하튼 재인 씨는 도현 씨가 편한 것은 아닌 것 같았어. 그리고 어젯밤 재인 씨는 집에 오지 않았어.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해. 한 번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괜찮을 거야. 도현 씨와 재인 씨 사이에 잠시 있는 다툼 정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조금 다른 느낌이었어.”
“너의 감각은 좀 특별하잖아. 무시할 수는 없어. 무슨 일이 있는지는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우주그룹 승계는 약간 미심쩍은 일이 있어.”
“어떤?”
“사실 우주그룹 회장은 아주 건강했거든. 후계순위 1위인 도현 씨가 승계 받는 것엔 아무도 의심이 없었어.”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는 것 같았어.”
“그런데 요즘 도현 씨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회장하고 크게 다퉜다는 소문이 있었어. 그래서 진 회장이 도현 씨를 후계 구도에서 제외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했거든.”
“도현 씨가 후계 구도에서 제외될지 모른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야. 그런 소문이라면 정말 엄청난 사건이네.”
“물론 그래서 지금 우주그룹 찌라시가 제일 핫한 정보야.”
“도현 씨가 그룹에서 제외될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모르겠어. 그냥 도현 씨가 우주그룹 회장 심기를 아주 거슬렸나봐. 그래서 둘이 다퉜는데 그날 회장이 심장발작을 일으켜 지금 혼수상태라는 거야. 어쨌든 혼수이고 사망한다면 회장이 어떤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현 씨가 그룹 승계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지. 하지만 회장이 깨어난다면 일이 다르게 진행될 수도 있겠지? 현재 도현은 조용히 회장의 병원만 지키고 있다는 소문이야. 그런데 이런 와중에 재인을 만나러 갔다고? 그럴 상황이 아닐 텐데 의외다.”
“더군다나 재인 씨와 위협적인 분위기는 더욱 의미심장하잖아. 무슨 일인지 걱정돼.”
“넌 지금 재인 씨 걱정하는 거야? 너를 걱정하세요. 지금 상황이 뭔지도 모르는 이 아가씨야.”
“그러게. 지금은 내 걱정할 타임이네.”
“결론적으로 도현은 그룹에서 제명당할 뻔했는데 회장이 갑자기 쓰러져 승계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도현과 재인은 단순히 친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친구가 아닌 뭔가 특별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도현이 재인을 좌지우지할 거란 가능성이 있다. 또 하나는 도현이 벼리에게도 어떤 위협이 될 수 있겠다. 그리고 벼리는 재인을 걱정한다. 이 정도가 맞아?”
“기자 출신 아니랄까봐 요점 정리가 정확하네.”
“그럼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응, 일단 재인과 도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아. 물론 알아볼 길이 없겠지만. 그리고 김 교수와 재인과의 관계도 무언가 미심쩍어. 지금 상황에선 정민이, 라일라, 준희, 윤지가 실종상태잖아. 이런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야 다음 일들이 진행되지 않겠어?”
“민수오빠가 윤지 실종사건은 어느 정도 진도를 뺀 것 같아. 그 동안의 실종사건까지 연관 지어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까 곧 진척이 있을 거야. 하여튼 이번 사건은 연쇄실종사건이고. 이들은 살해당했을 확률이 매우 높아. 틀림없어. 확률 100퍼야. 그런데 아직 사체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재인 씨 정원도 불안이 얼마나 많은지 나무들의 안타까움을 감당하기가 힘들어. 지난밤엔 나무를 따라서 나도 울었어.”
“아,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서 우주그룹 회장의 갑작스런 소식은 또 뭘까? 불안해. 이 알 수 없는 촉이 불안하다고 난리야.”
“꼭 점쟁이처럼 말하고 그래. 그러지 마. 심각한 상황인데 웃기잖아.”
“하하, 네가 힘들어 보이니까 내가 나름 유머로 선전하고 있는 거잖아. 어때? 노력이 가상하지?”
“하하, 언니 때문에 웃는다. 고마워.”
벼리와 연이는 그린섬의 정원에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꽃달의 민 실장을 만나기로 했다.
이것은 재인 몰래 해야 했다.
민 실장의 꽃집에 우연히 들른 것처럼 하기로 했다.
랜디가 있으면 랜디에게도 도움을 요쳥해야 했다.
그런데 꽃집에 재인이 있었다.
의외였다.
재인은 좀처럼 꽃달에 들르지 않았었다.
재인은 꽃달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수척한 얼굴이었다.
“벼리, 아, 오셨어요?”
“출장 간 것이 아니었어요?”
“응, 출장 갔다가 좀 일찍 왔어.”
“전화하지 그랬어요?”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 컨디션은 좀 좋아졌어?”
재인은 벼리를 봤으니 됐다면서 올라간다고 펜트하우스로 올라간다.
벼리는 꽃달을 나서는 재인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저거, 저거 좀 봐. 저게 걱정하는 얼굴이지 의심하는 얼굴이냐?”
벼리의 표정을 보고 연이가 한 마디 했다.
“내가 뭘 어쨌길래.”
“네 얼굴 보면 사랑하는 사람 걱정하는, 딱 그런 얼굴이야.”
“남편 걱정을 마누라가 안 하면 누가 하나?”
“네가 지금 마누라 타령 할 때야? 또, 또 어떤 상황인지를 까먹어요.”
민 실장이 둘을 향해 걸어왔다.
옆에는 랜디도 있었다.
“어서 와. 재인 대표가 벼리 씨 걱정하고 갔어.”
“네...”
“잠깐 이리 와서 앉아. 랜디 씨가 벼리 씨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해. 나도 마침 걱정도 되고.”
“랜디, 잘 지냈어요?”
“벼리, 많이 안 좋아. 지금 상황이 매우 위태로워. 알고는 있겠지?”
“그냥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겠어요. 무슨 일일까요?”
“이번 일은 그냥 지나가는 일이 아니야. 벼리 씨에게 매우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란 경고와 걱정의 메시지야.”
“저도 그 정도는 감지하고 있어요. 지난번에는... ”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이야기 했어야지. 무슨 일이었어? 말해봐.”
“아니, 아니야. 근데, 랜디.. 혹시 나에게 말해줄 것이 있어요? 내가 어떻게 조심해야 할까요?”
“꽃과 나무들이 경고했어. 벼리 씨를 노리는 무리가 있다고. 왜 벼리 씨를 노리는지는 모르겠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하지만 그들이 불특정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뭔가 치밀하게 계획되고 있다는 느낌이야. 뭔가 짐작되는 것이 있어?”
“그런 건 아니고 도현 씨와 재인 씨 사이에 어떤 일이 있는데 그게 더 위험스럽게 느껴져요. 그게 뭘까요?”
“도현은 조심해야 할 인물이야.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심리의 색깔과 향기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잖아. 그런데 이상하게 도현은 벽이 있어. 그 벽은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된 사람의 것이야. 재인은 파리에서 도현과 같이 유학한 걸로 알고 있어. 그때 둘의 관계가 정리되었을 거야. 친구로 보이지만 친구로 위장한 어떤 관계일 수 있어.”
그때 카페 안이 웅성거렸다.
자연 팀장이 뛰어 왔다.
“이거 봐요, 우주그룹 진 회장이 사망했대요.”
모두 핸드폰을 열고 기사를 검색했다.
모두 놀라서 한 마디씩 하는데 재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우주그룹 도현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도현에게 가봐야 해. 올라와. 같이 가자.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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