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_원더랜드가 원더랜드가 아닐 때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52화>
원더랜드가 원더랜드가 아닐 때
* * * * *
재인은 갑자기 본가에서 자주 부르기 시작해 부담스러웠다.
자신은 되도록 주목 받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어려서부터 워낙 존재감 없이 지내는 일에 익숙했다.
주목을 받게 되면 불안할 정도였다.
공부도 1등은 싫었다.
2등이나 3등이 좋았다.
어떻게든 1등은 하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 재인이 강남 변두리 빌딩의 소문나지 않은 자그마한 미술관의 관장이 되었을 때 이런 좋은 일이 있을까 싶었다.
은둔형 예술가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이었다.
재인은 기꺼이 이 여유로움을 누리고 있었다.
벼리와 결혼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을 안 받는 일이기도 하고 주목을 받는 일이기도 했다.
주목을 받았던 것은 재계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평범한 집안이어서였다.
주목을 안 받았던 것은 너무 평범한, 어쩌면 기준에 너무도 못 미치는 집안이어서였다.
이런 일은 사실 잠깐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평범한 집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주 빠르게 관심에서 지워질 수 있었다.
너무도 평범한 집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재인으로서는 아주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에게 대유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되라는 김 회장의 이야기가 있었다.
싫다고 했더니 그린섬 빌딩도 내놓고 파리로 돌아가라고 했다,
예전 같으면 한국을 떠나는 일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떠나라고 하면 떠나면 될 터였다.
재인은 영화를 좋아했다.
조금 좋아했다.
아주 조금 좋아했다.
그림을 좋아했던 것처럼 영상으로 표현되는 아름다움이 조금 좋았었다.
그런데 언젠가 파리에서 지낼 때 제이가 영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트루먼 쇼라는 영화 이야기였다.
재인은 제이가 트루먼 쇼 이야기를 할 때 조금은 충격을 받았었다.
영화로 표현될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이 어쩌면 진실에 더 가까울 수 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제이가 말했다.
“재인아, 그린섬에서 넌 행복해? 난 행복해. 그런데 이상하게 행복이 조작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좀 들어.”
“행복이 어떻게 조작돼? 행복이란 어떤 정황적 느낌들이 쌓여 감성적으로 만족된 상태를 말하잖아. 조작으로 오랫동안의 세월을 덮을 수는 없어.”
“재인아, 난 너를 좋아해. 알지?”
“그, 그건... 좀...”
“알잖아. 애써 모른 척하지 마.”
“그래,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알아, 내가 널 좋아하는 걸 너에게 강요하려는 것은 아냐.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그런데?”
“그런데 항상 조금 이상했던 것은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표현하려고 하면 항상 벽에 부딪치는 느낌이거든.”
“누구나 자신의 사랑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벽에 부딪치는 감정을 느끼는 거야.”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냐.”
“가령 난 너를 좋아하니까 네 옆에 앉아서 밥을 먹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날은 꼭 내 옆에 미리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거야.”
“바보, 넌 천재라고 하더니 바보였구나. 그런 건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는 거야.”
“아니야. 들어 봐. 그리고 내가 너와 단둘이 영화를 보려고 했어. 그런 날은 어김없이 너에게 무슨 생기거나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더라.”
“머피의 법칙이라니까.”
“지난 번 발렌타인데이를 생각해봐. 난 분명 너한테 주려고 초콜릿을 샀어. 그리고 카드도 썼어. 그런데 갑자기 주영이 한국에서 왔잖아. 주영이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파리에 오기엔 정말 적절하지 않은 상황이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주영이 파리로 온 거야. 그리고 발렌타인데이를 축제처럼 거대하고 요란스럽게 하고 갔잖아. 난 초콜릿을 너한테 주지도 못 했고 카드도 주지도 못했어.”
“하하, 안 주길 잘 했어. 줬어도 못 받았어.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난 운명의 여자를 기다리고 있단 말야.”
“재인, 넌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일을 예로 들어서 이 일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럼 그냥 그렇게 에피소드 쯤으로 알고 있으면 좋고. 사람은 의심하는 순간 인생이 불행해지는 법이니까.”
“그래서 지금 그린섬에서의 행복이 조작된 행복이다, 이런 거잖아. 누군가 조종하고 있다는.”
제이는 이 순간 갑자기 소리를 확 줄여서 아주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재인아, 우린 모두 세팅된 세트야. 세트. 잊지 마.”
“아잇, 살벌해. 너 머리가 너무 좋아서 과대망상이야. 복에 겨워서 아주 정신을 못 차려요.”
그런데 재인은 제이의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려 나중에 트루먼 쇼라는 영화를 학교에서 빌려 혼자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제이의 생각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은 공감하게 되었다.
제이는 자신의 행복이 조작된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으로 말이 적어졌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제이는 한국의 아버지와 자주 톡으로 왕래했었다.
재인은 제이가 사랑하는 부모를 가졌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의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자신은 그런 부모가 없어서 일상의 행복이나 불행을 의심하는 일이 힘들었다.
오히려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일에 익숙했다.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한 거라고 생각했다.
행복하면 행복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행복에 대한 갈구는 모든 결말을 행복에 맞추고 있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었다.
그래야 현실을 견딜 수 있었다.
재인의 현실은 기승전, 행복으로 이어져야 했었다.
이런 상황이 재인과 제이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했다.
주영이 발렌타인데이라고 갑자기 파리로 쫓아왔었다.
재인은 자신이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이 싫지 않았다.
주목 받는 것이 싫었지만 그날은 나쁘지 않았다.
트루먼 쇼라는 영화를 보고 어쩌면 자신의 인생도 세트처럼 거기에 맞춰 그냥 행복한 척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주영과 이야기를 우연히 한 마디 한 적이 있었다.
“난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어. 영화를 만들면 멋질 거 같아.”
“오빠, 영화 만들고 싶어? 그럼 영화를 만들면 되지. 도현 오빠, 재인 오빠가 영화 만들고 싶대. 재인 오빠가 영화 만들면 정말 좋겠다. 그렇지?”
“주영아, 재인이 영화를 만들면 좋겠어?”
“응, 나는 재인 오빠가 영화를 만들면 정말 멋질 거 같아.”
“하하, 우리 주영이 그렇게 생각하면 재인은 언젠가 영화를 만들게 되겠지. 우리 주영은 하고 싶은 일은 모두 해야 하니까.”
“와, 정말 좋다.”
“그럼 주영아, 재인이 영화 만들려면 너도 공부를 좀 해야겠다. 그렇지?”
“그런가?”
“그럼, 인생은 계획이지. 계획에 따라 인생이 만들어지는 거니까.”
“나, 그럼 영화 공부할까?”
“아냐, 그냥 파리로 와. 여기 그린섬에서 공부하면 돼. 어머니한테 말해서 박 상무에게 수속 밟아달라고 할게.”
“정말? 너무 신난다.”
주영과 도현이 재인을 두고 나눈 대화였다.
그 당시 재인은 둘의 이야기를 만담처럼 그냥 들었었다.
아이들의 원더랜드란 허무맹랑한 상상 위에 세워지는 것이었다.
아이들이란 원더랜드를 몇 번이나 만들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는 법이었다.
별로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도현과 주영은 원더랜드를 허무맹랑한 상상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현실 위에 구체적으로 세우고 있었다.
재인은 도현과 주영이 만드는 세상이 원더랜드보다 더 원더랜드여서 아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자신이 어렸을 때 툭 내뱉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은 현실이 되어 있었다.
“오빠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잖아.”
주영은 재인이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재인이 이미 잊었던, 농담처럼 꺼냈던 재인의 원더랜드 이야기를 오래된 기억 속에서 꺼냈다.
원더랜드는 원더랜드로 남아야 꿈일 수 있었다.
원더랜드가 현실이 된다면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행복해 할 것이다.
거대자본 위에서는 원더랜드조차 가능한 일이었다.
재인은 자신에게 갑자기 원더랜드가 선물로 쏟아지자 거대자본의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겉으로 표 나지 않는 압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재인은 자신이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유그룹에서 자신은 하나의 키트였다.
쓰다가 버릴 아주 작은 조립 부품의 하나였다.
김 회장의 집에서 자신은 종속된 소유물이었다.
재인은 대유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맡았다.
아주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대유그룹의 고 여사나 성일, 성윤에게서는 야유와 멸시를 받았다.
미라에게선 듣고 싶지 않은 막말까지도 들었다.
우주그룹에서 거대한 투자금이 자신이 맡은 대유엔터테인먼트에 들어왔다.
주영이 우주엔터테인먼트 대표였다.
재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김 회장은 재인이 대유엔터테인먼트 대표를 하지 않겠다고 하자 처음엔 협박했었다.
“그린섬을 비우고 파리로 가라. 모든 걸 내려놓고 가야 한다는 걸 잊지 마라.”
“당장이라도 가겠어요. 오늘밤이라도 그린섬에서 나오겠어요.”
재인이 그린섬을 떠나 파리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김 회장은 재인을 붙잡고 사정했다.
“재인아, 그냥 엔터테인먼트를 맡아 다오. 부탁이다. 네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너도 네 자리를 찾아야지. 너도 알다시피 성일이 엄마가 네게 주려는 모든 걸 막고 있다. 난 네가 이 일을 해서 네 일을 찾았으면 좋겠다. 네가 아무 것도 없이 떠난다면 내가 안 좋을 것 같다. 나를 위해서 맡아주면 안 되겠니?”
김 회장이 재인에게 뭔가를 사정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재인은 그때 김 회장이 진심으로 부탁한다는 것을 알았다.
재인에게는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부탁은 거절하기 힘든 일이었다.
재인은 여러 정황상 그 일을 하면 안 되었지만 아버지가 처음 자신에게 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재인은 일을 수락하자마자 자신이 뭔가에 떠밀려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중심을 잡고 서 있으려고 해도 이미 무언가에 떠밀려 움직이고 있었다.
세팅된 세상에서 세트는 독자적일 수는 없었다.
재인도 진정 꿈꾸었던 원더랜드가 있었다.
그것은 엄마의 꽃밭에서 엄마의 향기를 맡으며 엄마의 무릎을 베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엄마의 손길이 재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세상이었다.
재인은 엄마가 살아있는 원더랜드를 꿈꾸었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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