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_그린섬 아이들은 숨막혀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39화>
그린섬 아이들은 숨 막혀
* * * * *
도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서 원장은 도현의 집 주치의였다.
정우도 자연스럽게 도현과 어울렸다.
결국 정우와 도현은 파리 유학을 같이 하게 되었다.
서 원장은 우주그룹의 힘을 얻기 위해선 아들이 도현과 잘 지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도현이 정우와 함께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하자 싫을 이유가 없었다.
대신 서 원장은 정우가 의대에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정우는 아버지와 장 비서가 도현의 어머니를 그런 식으로 죽게 만드는 걸 본 후로는 의사란 직업이 무서웠다.
공부를 잘 하면 의사가 되기를 바랄 것 같아 공부를 하지 않았다.
공부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뭐든 다 했다.
하지만 뭐든에서 열심히는 언제나 뺐다.
대충, 적당히를 좋아했다
뭐든 열심히 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자리에서든 주목 받지 않고 존재감 없이 지내고자 했다.
정우가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랐다.
주목 받고 싶지 않았다.
존재감이 없었으면 했다.
죄를 짓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지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정우는 너무 잘생긴 얼굴이었다.
키도 훤칠하게 컸다.
피부는 여자들보다 더 하얗게 빛이 났다.
노래도 잘 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가만히 걸어가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정우는 원죄가 있었다.
어머니가 다른 여자의 행복을 빼앗았다.
아버지가 친구 어머니의 목숨을 빼앗았다.
자신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정우를 좋아하는 여자가 많았다.
정우를 좋아하는 남자도 많았다.
정우는 여자처럼 예쁘게 생긴 외모로 남자들조차 사랑했다.
상황 때문이었는지 정우는 여성편력이 많았다.
정우는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들의 말대로 준희만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상한 놈이라고 했다.
여성편력을 이상한 곳에다 쓰는 놈이라고 했다.
정우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모두 지우고 있었다.
사랑조차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사랑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정우는 준희를 따라서 요리를 시작했다.
처음은 재미였었다.
무엇이든 가볍게 시작했다.
하지만 뭔가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요리였다.
무엇이든 적당히 조금만 하던 정우가 뭔가 처음으로 열심히 하는 일이 생겼다.
정우는 좋아하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무슨 일이든 일부러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 요리를 시작해보니 멈출 수 없는 즐거움이 있었다.
자신은 누군가에게 음식을 해주는 것을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요리의 전문적인 정식 코스는 밟지 않았다.
딱 적당히 조금만 하다 그것도 그만 두었다.
정우는 자신이 어떤 일을 좋아하게 될까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좋아하는 일을 그만 두곤 했다.
결국 한국에 와서 정우는 노래도 하고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우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랑데부는 그린섬 친구들이 이름을 지어준 것이었다.
랑데부는 만남, 만나기로 한 장소, 인기가 있는 만남의 장소를 말했다.
자신들의 모임이 이뤄지는 그린섬에 있는 레스토랑이니까 자신들의 만남을 기념해서 랑데부로 하자는 의견이었다.
모두 정우와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했다.
“정우와 정말 어울리는 이름이야.”
“하하, 정우는 정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하잖아. 이제 레스토랑에 가면 만인의 연인을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정우가 있어서 곧 인기가 있는 만남의 장소가 될 것이니 랑데부! 너무 좋다. 잘 지었어. 이름.”
“아름다운 만남을 위해 아름다운 요리를 준비하는 셰프가 될 거야.”
준희가 말했다.
“준희는 파리에 있으랬더니 굳이 한국에 와서 셰프를 한다는 건 뭐니? 파리 유명호텔에서도 오라고 하는 곳이 많은 셰프잖아.”
“도현아, 정우를 봐. 정우가 정식 셰프가 아닌 건 알지? 뭐든 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기 끝판왕이잖아. 내가 없이 정우가 레스토랑 운영이 말이 되니? 내가 없음 아마도 레스토랑이 아닌 퇴폐 만남의 장소가 될 걸.”
“오, 노우, 그건 안 될 말씀. 내 우아한 건물에 흠집을 남기는 것은 용서 안 돼. 내 그린섬 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퇴폐? 당장 퇴출이야.”
“재인은 정말 FM이야.”
랑데부가 오픈하고 정우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며 편해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제이가 정우를 만난 것 같았다.
준희는 바빠서 제이를 직접 보진 못했다.
보진 못했지만 제이에게 뭔가 불안한 일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제이가 가고 난 후 정우는 준희에게 비행기 티켓을 끊어줬다.
“파리로 가. 넌 파리가 어울려.”
“정우, 네가 있는 곳에 있고 싶어.”
“준희야, 난 네가 날 보는 게 싫어. 난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어.”
“내가 널 귀찮게 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다고 네가 날 보는 걸 몰라?”
“보지 않을게. 가라고 하지 말아 줘.”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 넌 친구로 좋아하는 거야.”
“오늘 다녀 간 그 어린 배우를 사랑해? 잠깐 만나다 다시 헤어질 거잖아.”
“잠깐 만난다고 하지만 난 늘 그 잠깐의 시간에 내 온 마음을 다 걸고 있어. 지금도 온통 그 아이 생각뿐이야.”
“그 사랑, 금방 지나갈 거야.”
“금방 지나간다고 사랑이 아냐? 누구나 사랑은 달라.”
“하여튼! 난 파리에 가지 않아.”
“제발 이건 부탁이야. 파리로 돌아가 줘.”
“오늘 제이 만났지? 제이는 왜 그린섬 회합에 안 나와? 무슨 일 있어? 제이가 나 파리 가래?”
“아니야. 무슨 일 없어. 제이는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집에서 지내는 것이 좋은가봐. 제이는 원래 파리에 있을 때도 가족들이랑 소통을 자주 했었잖아. 우리들과는 달랐지.”
“그렇구나. 제이에게 무슨 일이 있나 했어.”
“제이도 네가 파리에서의 좋은 조건을 버리고 와서 아깝대. 친구를 위해 보내주면 좋겠다고 말했어.”
“정우야, 다시 말하지만 난 파리에 가고 싶지 않아. 가더라도 지금은 아냐. 네 곁에는 내가 있어야 해.”
“네 후속으로 일할 사람 구하고 있어. 곧 구해질 거야. 준비해. 알았지?”
정우는 파리행 티켓을 준희에게 내밀었다.
준희는 얼결에 받아들긴 했다.
“참 정우 너 없을 때 라일라 다녀갔어.”
“영진이랑 괜찮대?”
“라일라가 워낙 유명한 인싸잖아. 활동적인 라일라는 영진이랑 안 맞는 것 같아. 라일라는 여전히 다른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걸 좋아하잖아.”
“영진이가 마음 아프겠다.”
“라일라가 영진의 마음을 받으면 좋을 텐데.”
“준희야, 영진이 라일라랑 어울리는 것 같아?”
“사실 안 어울려. 라일라는 자유분방하고 영진은 하나만 아는 스타일이잖아. 서로 만나는 것 자체가 불협화음인 것은 당연해.”
“그런데 준희야, 너랑 나랑도 안 어울리잖아. 난 자유연애주의자, 넌 순정파.”
“넌 자유연애주의자 아냐. 내가 알아. 넌 무언가 도망치고 싶어 사랑에서 회피하는 거야. 난 알 수 있어.”
“내가 사랑을 회피한다고?”
“넌 항상 네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좋다고 표현을 안 하잖아. 넌 다른 것은 표현을 잘 하면서 정작 너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만은 꼭 지나치게 억제하더라.”
“내가 언제 억제했다고?”
“영진이도 너, 그거 병이라고 했어. 지나치게 자신을 억제하는 거. 네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조금 솔직해져 봐. 넌 그럴 자격이 있어. 넌 충분히 사랑받을 만하고 또 좋은 남자니까. 네 욕망에 대해 조금은 솔직했으면 좋겠어.”
“내 욕망에 대해 솔직하라고? 하하, 그러면 모두들 쓰러질 거야.”
“다른 사람이 쓰러지면 좀 어때. 네가 진정 행복하려면 네 욕망에 네가 솔직하게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표현해야지.”
“솔직한 것이 때론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 있어.”
“너, 지나치게 착한 사람이고 싶은 착한사람 콤플렉스 좀 버려.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가. 네가 착한 사람으로 희생하지 않아도 돼. 굳이 꼭 네가 완벽하게 착할 이유는 없어. 넌 너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 조금 이기적이면 좋겠어.”
“나 이기적이야. 너한테 하는 거 봐. 수많은 여자들을 사랑하는 것도 이기적이지.”
“넌 착한사람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못하는. 그런데 생각해봐. 네가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지키고 싶은 그 사람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인지. 네가 너무 착한사람 콤플렉스에 있다 보면 꼭 지키고 싶은 사람을 못 지킬 수가 있어.”
“하하하, 준희가 파리에 가기 싫으니까 날 아주 이상하게 엮는구나.”
“난 파리에 안 간다니까!”
정우가 준희에게 비행기 티켓을 준 날 저녁에 영진이 찾아왔다.
도현과 재인도 함께 왔다.
영진은 평소 목소리가 밝았다.
무슨 일에든 느긋했다.
다른 사람들의 심리 파악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답게 자신의 목소리에 흥분을 담아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은 영진이 원래부터 그런 목소리였는지 기억이 없었다.
처음부터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영진의 목소리는 늘 온화했고 느긋했다.
이젠 모두 영진의 나긋나긋하고 여유로운 목소리와 태도만 기억했다.
친구들은 영진을 한 번씩 영감이라고 불렀다.
“영감, 날도 흐린데 팔다리 괜찮아?”
“에끼, 이 녀석들. 할아비 놀리면 혼난다.”
이런 농담쯤은 익숙한 일이었다.
영진은 모든 것에서 느긋했다.
물론 첫사랑인 라일라에게도 느긋했다.
라일라를 사랑하지만 채근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죽하면 짝사랑이라는 말을 했다.
“영감, 짝사랑 그만 해. 라일라가 좀 매력적이긴 하지만 세상에 라일라 만한 여자들 많다. 시야를 좀 넓혀 봐.”
“절대. 네버. 안 돼요 .안 돼.”
“갑갑이 영감.”
“내 숭고한 첫사랑을 짝사랑이라고 하지 마. 너희들 어휘실력이 그렇게 모자라? 짝사랑이란 한쪽 편만 상대를 사랑한다, 이런 뜻이야. 내가 혼자 사랑하니? 라일라도 나를 사랑해.”
“하지만 과거형이야. 라일라가 영진을 사랑했었다. 이렇게 과거형이 맞아. 지금은 어떤 배우랑 썸씽이 있던데? 라일라 인스타 보면 생중계로 알게 돼.”
“모르는 말씀. 라일라는 그냥 잠시 예술적 영감을 위해서 학습하는 정도? 그 정도? 사랑이 아니라고. 사랑이란 숭고한 것. 어떻게 사랑이 둘이야? 사랑은 하나라고.”
“영감, 정우 봤어? 매일매일 새로운 사랑이 생기잖아.”
“그거 사랑 아냐. 유희지. 위대한 사랑을 유희로 삼는 놈은 지옥에나 가야 해. 안 그래 도현아?”
“하하, 영진이 정우를 지옥에 보내라는데?”
“도현아, 넌 나를 지옥에 안 보낼 거지? 응? 사랑하는 도현 씨, 날 지옥에 안 보낼 거지?”
“에이, 징그러. 정우 얘는 늘 끝에 사랑하는 도현 씨래. 그거 좀 그만 해라. 넌 그렇게 날 놀려먹는 것만으로도 지옥에 떨어질 거야.”
“뭐야? 갑자기 둘이 나를 동시에 지옥에 보내는 거야? 몹쓸 친구들이야. 재인? 너마저 나를 지옥에 보내진 않겠지?”
“하하, 정우야. 그런데 내가 아니라 준희가 너 쳐다보는 거 안 보여? 넌 이미 지옥으로 떨어진 거야.”
“아, 사랑이 많은 것도 죄야.”
정우가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테이블 위로 머리를 뉘었다.
“하하하”
모두들 유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 뒤에 무거움이 이들에게 있었다.
무거움을 숨기려고 일부러 유쾌한 듯 보였다.
정우는 친구들이랑 모두 그린섬으로 올라갔다.
올라갈 때는 약간 심각한 얼굴이었다.
라일라가 다녀간 날이었다.
그리고 라일라는 소식이 없었다.
준희는 라일라가 남긴 톡이 있다고 했다.
그 톡을 보여줬다.
<준희야, 영진이 여기로 온대. 난 더 이상 영진이 첫사랑이 아니고 싶어. 내 사랑을 갖고 싶어. 영진에게 그만 두자고 말할 거야. 그만 두고 파리에 가고 싶어. 같이 가자. 그린섬 아이들은 숨막혀.>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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