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_울지 마라. 울면 안 돼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37화>
울지 마라. 울면 안 돼
* * * * *
벼리와 연이는 뜻밖의 정민 사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민이 파리에 유학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함께 지냈던 이들이 그린섬 멤버였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지난 번 그린섬에서 재인과 정민은 함께 만난 적이 있었다.
정민과 재인은 오랫동안 함께 지낸 사이였다.
그런데 그들은 처음 본 사람인 것처럼 인사했었다.
정민은 한국에 온 후 아버지 일을 알아보느라 그린섬 멤버들과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결혼은 몰랐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린섬이 재인의 건물인 것은 알았을 것이다.
그린섬에서 파리에서의 멤버들이 회합을 한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린섬에서 어떤 위험한 일이 감지되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의심을 품은 자신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정민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벼리와 연이가 오히려 위험으로부터 조금은 떨어져 있기를 바란 것일 수 있었다.
“어? 정민 언니야.”
“정민이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준희도 벼리와 연이가 정민을 알자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정민을 알아요? 우리는 제이라고 불렀어요.”
벼리와 연이는 정민이 갑자기 그린섬 클럽 사람들 틈에서 튀어 나오자 큰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그린섬 멤버였던 정민이 실종되었고 다시 또 다른 멤버인 라일라가 실종되었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놀라운 눈으로 주위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찻집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벼리 일행은 갑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켜보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사실 정민이 날 만나러 온 적이 있었어요. 만나지는 못하고 통화만 했는데 목소리가 엄청 불안했어요,”
벼리와 연이는 자신들이 정민과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 살았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정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 제이가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네요. 제이는 우리들에게 한국에서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어요. 제이는 매우 특이하게 너무 어른스러웠어요. 우린 무슨 일이 있으면 모두 제이를 찾았어요. 제이는 우리들과 같은 또래였는데.”
“정민은 우리들이랑 어울렸을 때 그냥 평범한 아이였어요. 다만 머리가 좋아서 뭐든 빨리 습득한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다고 생각했어요.”
“상황이 제이를 어른스럽게 만들었던 걸까요?”
준희는 제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린섬의 환경이 제이를 어린아이로 가만 두지 않았었나 봐요. 모두들 제이에게 보호받고자 했어요. 제이가 보호자가 된 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강요였는지 모르겠어요.”
준희는 그린섬에서의 제이 이야기를 조금 더 했다.
“내가 이렇게 보자고 한 것은 라일라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한 것도 있었는데 무엇보다 정우 이야기를 해주려고 왔어요,”
“재인 씨한테 들었어요. 정우 씨는 준희 씨를 파리로 보내려고 한다고. 정우 씨는 준희 씨의 마음이 부담된다고.”
“맞아요. 정우는 파리에서 한국에 올 때도 나를 오지 못하게 했어요. 결국 정우 몰래 따로 한국에 왔어요.”
“그런데 준희 씨는 왜 정우 씨가 원하지 않는데 한국에 온 거예요?”
“정우를 사랑해요. 첫사랑이에요. 누구나 첫사랑이 있고 첫사랑은 가볍게 첫눈처럼 지나가는 거라고 말해요. 아프기도 많이 아프지만 쉽게 녹는 것도 첫사랑이라고.”
“첫사랑..”
“그런데 난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 같아요. 정우가 나를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곁에서 지켜주고 싶었어요.”
“정우 씨를 지켜요?”
“여기 그린섬 클럽은 조금 특별해요. 나중에 뭔가 알게 될 거예요. 특별한 이유를.”
정우는 여성 편력이 심했다.
친구들도 정우가 여러 여자들을 만난다고 말릴 정도였다.
“어떻게 한 여자만 사랑해? 날 사랑한대잖아. 난 내게 오는 사랑은 모두 다, 인류애적으로 사랑하고 싶어. 이게 죄야? 내게 사랑이 많은 게?”
“그럼 그 인류애적 사랑을 왜 준희에게만 안 주는 거야? 왜 준희는 안 돼? 다른 사람은 다 안 돼도 준희는 되어야지.”
“맞아. 적어도 준희는 받아줘야지.”
정우는 다른 모든 여자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준희에게는 예외였다.
정우는 준희와 그린섬에서 아무렇지 않게 어울렸지만 준희가 조금이라도 지긋한 표정을 지으면 어느새 도망가고 없었다.
모두들 정우가 준희에게만 알레르기가 있는가 보다 놀렸다.
“난 정우가 날 사랑한다는 거 알아요.”
“그렇게 거부하는데 어떻게 사랑한다는 거예요?”
“정우만의 표현 방식이에요. 날 지키고 싶은.”
“지키고 싶어서 곁을 두지 않는다고요?”
“정우는 지금도 날 파리에 보내려고 해요. 이거 보세요. 비행기 티켓이에요.”
파리로 가는 비행기 티켓이었다.
“정우 씨는 왜 준희 씨를 파리로 보내고 싶어 해요?”
“곁에 있는 것이 부담된다고 했어요.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요. 날라리 소리 듣는 자신에게 너무 순수한 저는 맞지 않는다고.”
“정말 부담인가 봐요. 그럼 떠나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정우 진심이 아니에요. 다시 말하지만 절 보호하려고 보내려는 거예요.”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지금 상황을 보세요. 정민이 실종됐어요. 라일라도 연락이 닿지 않아요. 무슨 사고가 생긴 게 틀림없어요. 이젠 내 차례일 수 있어요.”
“그런데 왜 그린섬 클럽의 사람들을 타깃으로 삼아요? 그건 자기들에게도 위험한 일이 아닌가요?”
“정우는 그린섬의 다른 친구들과 조금 달라요. 정우는 자신을 회피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회피하는 거죠. 정우만의 방식이에요.”
정우의 집안은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다.
그냥 평범한 의사 집안이었다.
정우의 아버지는 야심이 있었다.
정우의 아버지는 우연한 기회에 우주그룹 주치의를 하게 되었다.
당시 도현은 어린 나이였다.
도현의 어머니 영애는 허약했다.
영애는 몸도 허약했지만 무엇보다 정신이 허약했다.
영애는 도현을 어렵게 낳았다.
도현을 낳고부터 몸은 계속 더 약해졌다.
그럼에도 어렵게 낳은 아들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영애는 아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싶었지만 허약한 몸은, 정신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영애는 점점 약해졌고 도현을 돌볼 수 없었다.
도현도 영애를 닮아 허약한 아이였다.
주치의가 늘 집에 살았다.
이때 진 회장의 비서가 집안의 모든 일을 돌보고 있었다.
진 회장의 아내 영애가 몸이 너무 약해 아내로서의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진 회장의 비서는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알아서 처리했다.
거기에 안사람으로서의 일까지 대신하고 있었다.
장 비서의 역할은 점점 영역이 넓어졌다.
그런데 영애는 어느 날 진 회장과 장 비서가 자신의 침대에서 얽혀 있는 것을 보고 충격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장 비서는 사람들의 평판을 신경 써야 했다.
평범한 집안이 아니었다.
국내 10대 기업의 집안일이었다.
장 비서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영애에게 더없이 극진했다.
다른 사람들이 감동할 만큼 최선을 다해 케어했다.
하지만 영애는 장 비서가 자기 곁으로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경기를 했다.
어느 날 영애는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다.
영애는 자신의 아들이 불쌍했다.
이렇게 위선적인 집에서 살아남을 도현을 혼자 두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
영애는 도현을 욕조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다.
도현은 엄마를 부르며 살려달라고 소리질렀다.
집의 메이드가 영애와 도현을 발견했다.
당장 사람들이 달려와서 도현을 구했다.
영애는 불행한 상황에 도현을 두는 것이 괴로웠다.
다음에 한 번 더 도현을 죽이려고 했다.
더 이상 영애는 도현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대신 도현은 장 비서가 돌보게 되었다.
도현은 자신을 죽이려는 엄마가 두려웠다.
엄마 곁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대신 장 비서의 품으로 숨었다.
장 비서를 자신의 보호자로 인식했던 것이다.
도현은 장 비서를 엄마처럼 따랐다.
집으로 오는 주치의는 장 비서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영애는 정신병원에 끌려갔다.
눈 오는 날이었다.
도현은 끌려가는 엄마를 보고 말았다.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엄마는 하얀 옷차림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사람들은 도현이 깨어서 이 장면을 봤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영애는 끌려가면서 아들의 방을 바라봤다.
“도현아~~”
외마디 비명처럼 도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영애는 늘 약에 취해서 소리도 잘 내지 못했다.
그런데 아들을 부르는 소리는 어떤 기운으로 가능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도현은 방안에서 끌려가는 엄마를 봤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도현은 어린 아이였다.
엄마는 눈 오는 밤에 끌려가서 다시는 집에 오지 않았다.
도현은 그해 봄에 엄마가 아닌 장 비서의 손을 잡고 입학식에 갔다.
영애는 도현이 입학하는 것을 유난히 기다렸다.
영애는 도현이 입학하는 날 도현이 손을 잡고 학교에 가는 것이 꿈이었다.
“난 내 아들이 초등학생이 되면 손잡고 학교에 가는 것이 꿈이야. 그 날은 엄청 예쁜 옷을 입고 가야지. 도현에게 가장 예쁜 엄마가 될 거야.”
도현은 학교 들어가기 1년 전, 일곱 살이 되던 해 이미 초등학생 가방을 엄마에게 선물 받았다.
아마도 영애는 아들의 입학식을 보지 못할 것을 예감했었을지 모른다.
“우리 아들, 초등학생이구나. 너무 멋지다. 내 아들은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학생이 될 거야. 넌 언제나 최고임을 잊지 말아라. 아들아, 울지 마라. 울면 안 돼.”
영애는 침대에 누워 도현이 책가방 멘 모습을 보기 원했다.
도현은 엄마를 위해 몇 번이나 미리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도현이 초등학생이 된 날, 영애는 아들을 보지 못했다.
정신병원에서 나오지 못할 것을 괴로워하던 영애는 목숨을 끊었다.
가족들은 도현에게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가 없는 아이들은 직감이 발달하는 법이었다.
도현은 엄마가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눈 오는 밤이었다.
엄마가 집을 떠나던 날도 눈이 왔는데 세상을 떠난 날도 눈이 오는 날이었다.
엄마가 사망하자 장 비서는 집안에서 제대로 된 실세가 되었다.
도현은 평소에도 장 비서를 잘 따랐다.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 후에는 더 잘 따랐다.
엄마가 도현에게 울지 말라고 말했었다.
"울지 마라, 울면 안 돼."
엄마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도현은 눈물이 났다.
도현은 이상하게 눈물이 많은 아이가 되었다.
툭 하면 잘 울었다.
사내아이가 잘 운다고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다.
그런데 도현은 장 비서가 달래면 언제나 울음을 빨리 그쳤다.
장 비서는 도현이 울면 이렇게 말했다.
"울지 마라. 울면 안 돼."
엄마가 보고싶을 때마다 도현은 울었다.
장 비서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울지 마라. 울면 안 돼."
사람들은 도현이 장 비서를 잘 따르자 도현을 안쓰럽게 생각했다.
“도현 도련님은 어머니가 안 계신 것을 아나 봐요. 장 비서를 저렇게 따르네요. 어쩌면 자기 어머니 해친 사람일 수 있는데...... 가엾어요.”
“쉿, 조용해요. 장 비서가 안주인이 될 텐데...”
도현은 장 비서를 졸졸 따라 다녔다.
장 비서가 보이지 않으면 울었다.
장 비서 치마를 잡고 따라 다녔다.
밤이 되어 잠을 잘 때도 장 비서만 찾았다.
장 비서가 재워주지 않으면 울기만 했다.
진 회장은 도현을 위해서라도 빨리 결혼해야 했다.
장 비서는 도현이 자신을 좋아해준 덕분에 나쁜 평판에 시달리지 않고 바로 안주인이 될 수 있었다.
우주그룹의 주치의였던 정우의 아버지는 장 비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정우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우주그룹에서 운영하는 서주병원의 원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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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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