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_슬픈 나무가 되고 싶지 않아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49화>
슬픈 나무가 되고 싶지 않아
* * * * *
지하에 비밀 공간이 있었다.
의심은 사실이었다.
지하 6층과 7층은 숨겨져 있는 공간이었다.
연이와 민수는 다음에 다시 오기로 했다.
지하 6층과 7층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경우 안전에 대한 보장은 어려웠다.
지상 6층과 7층은 창밖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그것이 비록 생명을 보장 못하는 일일 수 있어도 적어도 몸이라는 실존은 창밖으로 내던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하 6층과 7층은 아니었다.
적어도 약간의 안전은 담보한 다음에 들어가 봐야 할 공간이었다.
지하 2층도 아닌 지하 6층은 물리적으로 상당히 깊은 어둠 속에 있었다.
“벼리야, 너무 안 좋아 보인다. 괜찮아? 겨우 지하에 내려갔다 왔을 뿐인데 그렇게 힘들어? 우리 아무 것도 안 했어. 겨우 확인만 한 거라고.”
민수가 벼리의 이마를 만지며 말했다.
“지난번에도 벼리가 지하에 다녀오고 힘들어 하더라. 지하는 벼리에게 안 좋은가 봐.”
“벼리가 장소를 좀 타긴 해. 어렸을 때도 캄캄한 곳에 가면 무서워했어.”
“그랬던 것 같어. 언젠가 벼리가 지하에 잘못해서 갇혔는데 그때 벼리가 하루 동안 안 깨어나서 다들 놀랐잖아.”
연이와 민수는 벼리를 걱정하며 돌아갔다.
벼리는 너무 힘들었다.
연이와 민수의 말대로 지하는 힘들었다.
지난번도 힘들었다.
벼리는 꽃달로 갔다.
벼리는 꽃들과 나무가 필요했다.
본능적으로 필요했다.
랜디가 웃고 있었다.
랜디는 언제나 벼리를 보고 웃었다.
“벼리, 어서 와.”
“랜디.......”
벼리는 랜디를 보고 너무 반가워서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 했다.
벼리는 원래 눈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언제나 매사에 조금은 오버일 만큼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많았었다.
그런데 요즘은 꽤 많은 눈물이 벼리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벼리는 힘든 것이었다.
“벼리야”
“벼리야”
여기저기서 벼리를 불렀다.
“봐, 이렇게나 응원하는 꽃들이 많잖아. 벼리는 좋겠다.”
“네, 할머니가 그랬어요. 벼리는 좋겠다. 꽃들이 이렇게 좋아해서.”
“그럼 당연히 최고의 행운이지. 세상의 좋은 행운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야. 벼리의 행운도 이유가 있겠지?”
“이유가 있어요? 행운은 그냥 우연한 것이 아닌가요?”
“물론 우연히 좋은 운이 생기는 것이 행운이지. 하지만 그 우연이란 것도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그렇지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생기는 거야. 그래서 행운도 어떻게 보면 이유가 있는 거지. 하여튼 벼리의 행운도 누군가의 덕이라는?”
“어? 그 말도 할머니가 하신 말씀인데? 할머니가 그랬어요. 벼리는 참 복이 많다. 벼리에게 그 복을 준 사람을 잊으면 안 된다.”
“그랬구나.”
“그런데 그 복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언젠가 알게 되겠지?”
다시 랜디의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나의 이파리가 돋아났다.
또 여러 개의 이파리가 돋아났다.
이파리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퐁>
물방울이 바닥에 닿는 소리였다.
다시 이파리에서 싹이 돋고 줄기가 뻗고 이파리들이 무성해졌다.
그리고 거대한 숲이 되었다.
주변은 온통 숲이었다.
벼리는 이 순간이 오면 몸에 날개가 돋는 것 같았다.
날지 않아도 몸이 두둥실 떠 있는 느낌이었다.
“몸이 날 것 같지? 나무들이 벼리의 무거움을 덜어주고 있거든.”
어려서 정민이 우주의 중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중력에 대한 이야기는 벼리에게 놀라운 이야기였다.
“난 중력이 적은 별에 가서 슈퍼맨처럼 날아다니고 무엇이든 번쩍번쩍 들 거야.”
“바보, 그런 곳에 가면 산소가 적어서 맘대로 못 뛰어. 공기가 포함된 질소, 산소, 이산화탄소 등의 분자들도 질량을 가지고 있어. 이런 공기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도 중력이라고.”
“히잉, 어려워. 정민 언니는 가끔 너무 어려워. 언니, 이건 내 상상이야. 상상은 마음대로 하는 거야.”
“하여튼 우리가 힘들다고 하는 중력이 있어서 우리가 호흡을 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그래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어떤 일들도 사실은 사람을 단단하게 하는 힘일 거야.”
벼리는 정민이 어려서 한 말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런 것 같았다.
어려운 일들도 사실은 사람을 단단하게 하는 힘이라는 말은 맞는 말 같았다.
그런데 랜디의 숲에선 정말 중력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무들이 무거움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숲의 기운들이 벼리를 둘러쌌다.
벼리는 온몸의 세포들이 파랗게 생생해지는 것 같았다.
나무들이 보였다.
그린섬 정원의 나무들이었다.
“너희들 그린섬 정원의 나무들이지?”
“우리들은 그린섬 정원의 나무들이 맞아.”
때죽나무가 말했다.
옆에 라일락과 수국도 있었다.
“너희들은 왜 정원에서는 말을 하지 않아?”
“그린섬 정원에는 살아있는 나무들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결계가 쳐 있어. 그래서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해. 다른 누군가와 교류도 할 수 없어.”
“그래서 너희들이 말을 안했던 거구나.”
“결계는 무슨 말이야? 누가 결계를 친 거야? 너희들은 정원에 어떻게 온 거야? 누가 데려왔어?”
“우리들은 모두 행복한 누군가의 영혼을 지켜주던 나무들이었어.”
“우리가 지키던 사람이 사라졌어. 그리고 우리들은 이곳으로 끌려오듯 오게 된 거야.”
“어떻게 사라져?”
“모르겠어. 누군가 죽으면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그 별들이 나무인 우리에게로 들어와. 그럼 우린 그 별들을 가슴에 품었다가 다시 하늘로 올려 보내는 일을 해. 그것이 나무들의 정령이 하는 일이야.”
“그런데 왜 구골나무는 여기에 없어?”
“우리가 이렇게 너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구골나무가 보내줬기 때문이야. 구골나무가 온힘을 다해서 우리들을 이 숲으로 보낸 거야.”
“벼리에게 이 말을 전해 줘야 한다고 했어.”
“그럼 너희들이 지켜주고 있던 사람들은 지금 죽지 않은 거야? 하늘에서 별이 안 떨어졌으니 살아 있는 거야?”
“모르겠어. 어느 누군가 그 사람의 별을 훔쳐갔을 수도 있어.”
“어떻게 별을 훔쳐?”
“별을 훔쳐 가면 그 사람의 영혼은 다시 별로 태어날 수 없어.”
“우리는 우리가 지키던 사람의 별을 품지 못하면 슬픈 나무가 돼. 슬픈 나무가 되면...”
“슬픈 나무가 되면 어떻게 돼?”
“슬픈 나무가 되면....”
나무들이 말하는데 갑자기 나무들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말을 하던 나무들은 더 이상 없었다.
숲도 사라졌다.
랜디가 수척해진 얼굴로 있었다.
어딘가에 힘을 모두 쏟은 얼굴이었다.
“랜디, 괜찮아요? 힘들어 보여요.”
“아니야. 벼리가 이렇게 기운을 차렸으니 좋아. 난 괜찮아.”
“랜디, 나무들을 만났어요. 그린섬 정원의 나무들.”
“그랬구나. 나무들이 뭐라고 해?”
“누군가 죽으면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대요. 그런데 별이 안 떨어졌는데도 어떤 사람들이 사라졌대요. 자신들이 지켜주던 사람들이요. 나무와 사람들은 연결되어 있는데 자신들이 지켜주던 사람들과 연결이 끊어진 거예요. 갑자기. 나무에게로 별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사람만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
“그럴 경우 별을 누군가 훔쳐간 것일 수 있다고 했어요. 만약 하늘에서 그 별이 나무에게로 떨어지지 않으면 나무는 슬픈 나무가 된대요.”
“슬픈 나무....”
“랜디, 슬픈 나무가 뭐예요? 랜디는 알고 있죠? 나무가 왜 슬퍼져요? 슬픈 나무가 되면 나무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슬픈 나무는...”
랜디는 갑자기 이야기를 멈췄다.
“먼저 갈게. 다음에 또 보자. 힘내. 벼리야. 언제나 네 곁에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이거 받아. 잘 간직해. 도움이 될 거야.”
랜디의 머리카락에서 이파리가 하나 돋았다.
랜디가 이파리를 따서 벼리에게 주었다.
그리고 랜디는 꽃달의 나무들 사이로 걸어갔다.
어느새 랜디는 보이지 않았다.
벼리가 나뭇잎을 받아들고 랜디가 사라진 곳을 보고 있는데 재인이 들어왔다.
도현과 함께였다.
벼리는 나뭇잎을 치마 주머니에 얼른 넣었다.
“벼리 씨...”
도현이 반가운 목소리로 불렀다.
재인은 조금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벼리, 랑데부에서 식사하면 어때? 오늘은 그린섬 멤버들이 모이기로 했어.”
“연이 씨도 오라고 하면 어때요? 김 교수님도 오고 사모님도 오실 텐데.”
“내일 인터뷰 잡았다고 했어요. 괜찮을 것 같아요.”
“인터뷰는 인터뷰고 미리 이야기할 수 있으면 더 좋은 거죠.”
“네, 그렇겠네요. 그럼 연이 언니한테 전화할게요. 오빠도 같이 와도 되죠?”
벼리는 연이에게 전화했다.
좀 전에 그린섬에 다녀갔다는 말을 할 수 없어 벼리는 연이에게 전화했다.
“언니, 오늘 그린섬 멤버들 모임이 있나 봐. 언니랑 오빠랑 초대하는데? 어때? 올 수 있어?”
“좀 피곤하긴 하지만 안 가는 것도 이상하겠다. 오빠랑 같이 갈게. 저녁에 보자.”
저녁시간이 되어 그린섬 멤버들이 모두 랑데부로 왔다.
재인, 도현, 영진, 정우, 김 교수와 사유가 왔다.
사유는 윤지와 함께 왔다.
윤지는 코스모스처럼 연약하고 가냘팠다.
맑은 수채화 빛깔이었다.
눈에 띄었다.
“윤지 씨는 코스모스 같아요. 신이 가장 먼저 습작으로 만든 꽃이 코스모스라고 하지요. 그래서 꽃말도 소녀의 순정일까요?”
“과찬의 말씀이세요. 전 제가 너무 가늘어서조금 단단해졌으면 좋겠어요. 전 아카시아나무를 좋아해요. 코스모스는 너무 여려서 쓰러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아카시아는 어디에서는 결코 쓰러지지 않고 죽지 않는다잖아요. 전 아카시아처럼 그런 나무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아카시아 꽃말은 비밀스런 사랑이라죠? 혹시 윤지 씨도 비밀스런 사랑이 있는 건 아니죠?”
"비밀스런 사랑요? 그럼 아카시아 나무는 슬픈 나무겠네요. 비밀스런 사랑을 하니까."
벼리는 윤지의 슬픈 나무라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
랜디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미리 기쁜 일이라고 했다.
슬픈 나무라는 말을 듣는 일은 미리 슬픈 일이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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