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_벼리씨 위로가 가장 필요해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66화>
벼리 씨 위로가 가장 필요해
* * * * *
벼리는 작게 말했다.
어쩌면 재인이 못 들었을 수 있었다.
“괜찮아요, 무엇이든.”
벼리는 재인을 뒤에서 안아줬다.
오래도록 그렇게 있었다.
재인은 벼리를 안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벼리가 재인을 안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무너졌을 것이다.
재인은 벼리를 안았다.
그대로 침대로 안고 갔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벼리는 재인이 갑자기 너무 가엾었다.
재인 또한 벼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복잡하게 얽혔다.
무언지 서럽고 안타깝고 미안해서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입술에서 피가 났지만 그것은 오히려 뜨거움을 더할 뿐이었다.
벼리는 어떻게 해서든 재인의 모든 상처와 불안을 덮어주고 싶었다.
가엾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아파 재인을 안고 안아도 자신이 모두 안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은 재인을 더욱 더 강렬히 원하도록 하였다.
재인을 아무리 쓰다듬고 안아도 재인이 떠날 것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뜨거움은 끝이 없었다.
아주 오래도록 천천히 움직였고 뜨거웠다.
벼리는 더욱 재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재인의 온몸에 키스를 했다.
키스가 재인의 아픔을 녹일 수 있길 바랐다.
재인은 자신에게로 파고드는 작은 새를 보호하고 싶었다.
하지만 벼리를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재인은 품으로 파고드는 벼리를 몇 번이나 더 껴안고 품어도 벼리를 온전하게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재인은 어떻게 해서든 벼리의 모든 위험과 불안함을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벼리가 재인의 온몸에 키스를 할 때 재인의 온몸으로 통증이 지나갔다.
마음이 아프면서 몸으로 느껴지는 통증은 온몸에서 슬픔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재인도 벼리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벼리의 키스가 아주 느리게 재인에게 위로를 주는 키스였다면 재인의 키스는 아주 빠른 폭풍과 같은 키스였다.
폭풍처럼 뜨겁게 키스를 퍼붓지 않으면 나쁜 어떤 것이 끼어들 것처럼, 다른 것은 그 무엇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폭풍과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벼리는 돌연 더 많은 아픔이 느껴졌다.
재인이 자신을 이렇게 사랑하는데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불안은 너무도 아팠다.
아픈 가슴은 눈물샘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벼리에게서 끝도 없이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벼리의 눈물을 닦았다.
왜냐고 묻지 않았다.
벼리도 자신의 눈물에 대해 자신에게 묻지 않았다.
왜라는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뿐이었다.
벼리는 재인의 안전을, 재인은 벼리의 안전을 서로 소망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재인은 사랑 속에서 암담했다.
재인의 귓가로 다시 도현의 목소리가 자꾸만 울렸던 것이다.
“내 것은 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재인은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도현의 요구를 어떻게 할 것인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둘은 새벽이 될 때까지 서로를 잃고 싶지 않아 잠들고 싶지 않았다.
불안한 폭풍의 시간도 어느 순간은 평온이 찾아왔다.
둘에게도 잠이 찾아들었다.
아침이 되었다.
재인은 잠든 벼리를 두고 일찍 집을 나섰다.
그린섬에 연이가 찾아왔다.
새롭게 알아낸 사실이 있다고 했다.
성 부장과 관련된 일이었다.
성 부장은 재인을 어렸을 때부터 돌보던 사람이었다.
연이는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이가 알아온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원래 재인의 어머니인 윤희와 성 부장, 김 회장은 서로 대학동창이었다.
둘 다 윤희를 좋아했었다.
그런데 김 회장은 이미 정혼자가 있는 상태에서 윤희를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윤희와 만나고 있는 상태로 결혼했다.
성 부장은 윤희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결혼한 김 회장이 아닌 혼자인 자신과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했다.
하지만 윤희는 이때 이미 김 회장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윤희는 김 회장 집에서 알 경우 아이를 지우라고 할 것이 뻔하자 혼자 말도 없이 도망치고 말았다.
김 회장은 윤희를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윤희가 어디로 간 건지 알지 못하였지만 굳이 찾지 않았다.
대신 성 부장은 윤희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
성 부장은 언제나 윤희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
성 부장은 김 회장 몰래 재인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
아이가 태어나고 힘든 윤희에게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것은 힘들 거라며 다시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몇 번 더 말했다.
윤희는 허락하지 않았다.
성 부장은 여전히 윤희를 사랑했고 그녀가 죽자 김 회장에게 연락해서 그녀의 장례절차를 돕고 재인을 들이도록 도왔다.
성 부장은 계속 김 회장의 곁에 있었는데 재인이 김 회장의 집으로 들어오자 재인을 돌보는 일을 전적으로 맡게 되었다.
성 부장이 재인을 돌본 이유였다.
그런데 성 부장은 집착적으로 윤희를 사랑했었다.
그녀는 성 부장으로부터 숨으려고 했지만 끝까지 그녀를 찾아서 돌봤다.
재인의 어머니는 그를 두려워했다.
그의 집착이 자신의 인생을 해칠 것 같다고 친구에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윤희가 죽고 재인이 혼자서 윤희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을 당시, 이를 발견하고 그녀의 시신을 수습한 것은 성 부장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시신이 한동안 사라진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소문이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신이 사라지는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시신이 돌아왔고 시신은 화장장으로 향했다.
그 절차를 처리한 것은 성 부장이었다.
연이는 단숨에 엄청난 사실을 쏟아냈다.
벼리는 재인과 성 부장의 관계가 단순히 집사의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섬뜩했다.
이 사건의 이면엔 얼마나 더 많은 비밀이 있을지 두려웠다.
벼리가 추측할 수 있는 범주가 이미 아니었다.
추측 가능한 범주는 진작에 넘어섰던 것이었다.
성 부장이 재인에게 유난히 집착한다고 느꼈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도현의 우주그룹 승계절차가 모두 마무리되었을 때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냥 흔한 찌라시였다.
도현이 진 회장을 죽였을 거라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에 불과했다.
소문은 어떤 힘도 가지지 못했다.
도현을 쓰러뜨릴만한 힘을 갖지 못한 그저 소문이었다.
도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위치를 알았으며 다른 사람들 위에 확실하게 군림했다.
어느 누구도 그의 힘을 넘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했지만 도현은 차근차근 후계자 절차를 밟아 왔던 것이었다.
도현은 그룹을 장악한 후 바쁘고 중요한 일정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그린섬의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그린섬 멤버들은 거대 그룹의 회장이 된 도현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류였다.
그의 세계는 너무 거대했다.
그럼에도 도현이 그린섬 멤버의 회합을 주선한 것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재인과 성 부장은 분주했다.
긴장했다.
이전의 회합 역시 도현 중심으로 모인 것이었지만 그것은 표면화되지 않은 것이었다.
표면화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에겐 부담이 적었었다.
하지만 이젠 도현이 힘의 서열에서 완전하게 우위를 차지한 것이었다.
그걸 축하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재인과 성 부장의 긴장은 당연했다.
밤이 깊었고 일행이 모였다.
도현은 재인에게 눈짓으로 지시했다.
재인은 핸드폰을 들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벼리에게 전화했다.
“벼리? 우리 그린섬 멤버들 지금 작업실에 모였어.”
“그린섬 멤버요?”
“응, 도현, 아니 진 회장이랑.”
“제가 가야 하는 거예요?”
“와서 인사 정도 하면 좋지 않을까?”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잠깐 인사만 하고 가. 우리 집에 온 손님이잖아.”
“알았어요. 간단히 인사만 하고 올라올게요. 오랫동안 붙잡진 마세요.”
“붙잡아도 내가 올려 보낼게. 걱정하지 마.”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벼리는 그린섬 회합이 있을 때 자주 인사를 한 것은 아니었다.
재인은 벼리가 인사하러 내려간다고 해도 괜찮다고, 내려오지 말라고 한 적이 더 많았다.
지난 번 도현이 벼리를 유난스럽게 붙잡던 사건은 벼리를 매우 부담스럽게 했다.
도현은 요즘 벼리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바라선 안 될 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었다.
무언가에 대한 불확실한 불안만으로도 사람들은 두려울 수 있었다.
벼리는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벼리는 연이에게 톡을 남겼다.
<언니, 도현 씨가 그린섬에 왔어. 다른 때는 나를 찾지 않더니, 오늘은 날더러 내려오라고 해. 내려가고 싶지 않아.>
벼리가 톡을 보내면 연이는 바로 답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톡은 읽지 않은 채였다.
연이는 직장인이었다.
아마도 회의 중일 수 있었다.
아직 퇴근을 안 했을 수 있었다.
민수에게 전화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유난스럽다고 걱정할 것이었다.
벼리는 그냥 내려갔다.
벼리는 내려가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왜 굳이 내려와서 인사하라는 것일까?’
지난 번 도현이 재인에게 했던 위압적 행동이 떠올랐다.
그리고 재인이 도현이 왔다고 말하지 않고 진 회장이 왔다라고 말했던 것이 신경 쓰였다.
이제 둘의 관계는 상하 관계가 확실한 것 같았다.
물론 대 우주그룹의 진 회장은 그만한 힘을 갖고도 남았다.
재인이 도현에게 진 회장이라고 말한 것은 당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엊그제까지만 해도 가장 친한 친구였었다.
더군다나 그린섬은 재인의 빌딩이었다.
도현의 빌딩이 아니었다.
도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미 재인의 목소리에서 도현에 대한 존재감은 충분히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연이는 아직 톡을 읽지 않았다.
물론 답도 없었다.
이런 사실이 벼리를 더 불안하게 했다.
그린섬 작업실에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도 벼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톡은 여전히 읽지 않은 채였다.
벼리는 불안감에 마지막으로 톡을 하나 더 남겼다.
<그린섬 작업실이야. 톡 읽으면 답 부탁해.>
벼리는 톡을 보내고 그린섬 작업실로 들어섰다.
그린섬 회원들의 눈이 모두 벼리에게로 향했다.
재인은 나와서 벼리를 맞았다.
무척 무거운 표정이었다.
재인은 마지못해 벼리를 부른 것이었다.
무슨 일일지 벼리는 불안했다.
하지만 애써 반갑다는 인사를 했다.
“도현 씨, 이번에 고생하셨지요. 경황없으실 텐데 어떻게 오셨어요? 위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보다 벼리 씨가 와주셔서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몰라요. 이리 와 앉으세요.”
도현은 자기 옆자리로 벼리를 안내했다.
재인은 옆 자리에 서있었다.
벼리는 재인의 아내였다.
재인이 옆에 있는데 도현은 벼리를 자신의 옆에 앉으라고 권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광경인데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다.
“괜찮아요. 이야기들 나누세요. 인사를 했으니 전 이만 올라가 볼게요. 제가 있어봤자 방해만 될 거예요.”
“아유, 벼리 씨.”
도현은 벌떡 일어나 벼리를 가로 막았다.
위협적이진 않으나 벼리는 위협으로 느꼈다.
움찔, 놀랐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웃었다.
“벼리 씨, 조금 더 있다 가세요. 괴로웠던 저를 조금은 위로해 주고 가셔야죠.”
“그럼요, 그냥 올라가시면 안 되죠. 위로의 시간인데 조금은 머물다 가야죠.”
김 교수가 도현을 따라서 벼리를 붙잡았다.
김 교수는 지난 번 벼리를 만났을 때 벼리가더 있을까 봐 거의 쫓아낸 장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벼리를 올라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벼리는 더 불안했다.
“제가 위로가 얼마나 되겠어요.”
벼리는 어정쩡 일어났다.
그만 나가려고 했다.
어정쩡 일어섰다.
그러자 도현이 벼리의 어깨를 다정하게 껴안듯 하며 자리에 앉혔다.
“무슨 말씀, 제일 필요한 게 바로 벼리 씨 위로인 걸요. 안 그런가? 재인? 벼리 씨 위로가 가장 필요해. 맞지?”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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