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_플로리스트 사유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41화>
플로리스트 사유
* * * * *
벼리는 그린섬의 일들이 두려웠다.
단순한 무서움을 넘어선 일이었다.
정원에 심겨진 나무들이 늘어났다.
소식 없어진 사람들이 늘었다.
정원에 가봐야 했다.
새로운 나무가 하나 또 늘었다.
아직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번엔 어떤 나무가 심겨져 있을 것 같았다.
벼리는 어떤 나무일까 예측하고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저녁시간이었지만 꽃달에 들렀다.
어쩐지 꽃달에 랜디가 있을 것 같았다.
“벼리, 어서 와.”
랜디는 또 기분이 좋아보였다.
“오늘도 널 만날 생각에 미리 기분이 좋은 중이야.”
“정말 궁금해요. 어떻게 절 만날 줄 미리 알아요?”
“사랑하는 사람은, 보고 싶은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어. 사랑하는 순간 이미 우주의 인력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거든. 그리고 보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든 스치게 만들어. 그런 우연을 만나본 적이 없어? 있을 거야. 생각했는데 앞에,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을? 그런 거야.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그래서 오늘 누군가를 만났잖아? 그것은 세상의 엄청난 힘들이 만들어낸 결과야. 누군가를 만났다면 결코 그냥 보내지 마. 소중한 사람이야.”
“전 누군가를 만나려고 미리 기분 좋아진다는 말이 제일 좋았어요. 저, 오늘 마음이 좀 안 좋았는데 랜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 위로가 되었어요.”
“난 벼리를 사랑하니까! 벼리도 날 사랑하니까 기쁘다. 이렇게 봐서.”
랜디의 초록머리에서 이파리가 하나 돋더니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파리는 연둣빛으로 변하더니 다시 초록빛으로 짙어졌다.
이파리에서 싹이 솟고 이파리가 돋고 가지가 뻗었다.
금세 숲이 되었다.
벼리는 초록향이 가득 번지면서 초록숲으로 들어갈 때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럴 때 랜디는 마치 마술사 같았다.
마술봉을 휘두르며 휘리리링, 뭔가를 나타나게 하는 마술사 같았다.
초록머리에서 이파리가 돋아 땅에 떨어질 때가 가장 신기했다.
그때는 물방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벼리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마음껏 초록 향기에 빠져들었다.
초록 향에 취해 있다 보면 어느새 깊은 숲에 들어가 있었다.
깊은 숲에서 벼리는 눈에 익숙한 나무를 보았다.
구골나무와 때죽나무와 라일락나무였다.
그리고 어떤 나무 한 그루가 더 있었다.
벼리는 놀라서 나무에게로 다가갔다.
다가가서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푸른숲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주변은 일상의 꽃달이었다.
재인이 꽃달에 들어왔다.
재인은 출장 중이었다.
출장지에 있어야 했다.
또 갑작스런 일이 생겼을 것이다.
갑작스런 일은 언제나 좋지 않은 일이 더 많았다.
벼리는 재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많이 놀랐다.
“재인 씨?”
벼리는 재인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재인을 보고 놀란 반응은 재인의 품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저절로 일어난 일이었다.
“신혼이라고 그렇게 달려가도 돼? 그렇게 좋아? 둘이 오랫동안 헤어졌다 1년에 한 번 만나는 견우직녀였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벼리는 무작정 재인의 품에 안겼다.
눈물이 났다.
재인은 예기치 않은 벼리의 포옹에 놀랐다.
“벼리, 무슨 일 있어? 왜? 어디 아파? 무슨 일이야?”
“아니요, 아무 일 없어요. 그냥 반가워서.”
“.............”
재인은 무슨 일인지 꽃달에 있던 랜디, 민 실장, 자연을 바라봤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눈으로 물었다.
모두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민 실장이 한 마디 했다.
“올라가서 좀 달래 주세요. 반가웠나 봐요.”
랜디와 자연도 거들었다.
“벼리가 어쩐지 기운이 없더라. 대표님 보고 싶어 그랬나?”
“벼리에게 사랑 좀 주세요. 사랑만큼 좋은 선물이 어디 있을까? 아, 좋은 시절이여. 연애의 시절이여. 신혼의 시절이여!”
모두들 벼리를 데려 가라고 눈짓했다.
벼리는 재인과 함께 펜트하우스로 올라갔다.
펜트하우스에 들어서자 재인은 벼리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무슨 일 있어?”
“그냥....”
벼리는 다시 눈물이 났다.
재인이 걱정되었다.
재인이 나쁜 일에 연루되어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준희가 정우를 걱정하는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정우가 파리에 가라고 했어도 못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은 다른 모든 이유를 덮고도 남았다.
가령 그 일은 도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것을 포함했다.
정황적으로 타당한가 아닌가도 그러했다.
다른 여타의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정황상으로는 재인이 나쁜 일의 주동자일 것이었다.
하지만 벼리의 가슴은 재인이 나쁜 일에 연루되어 위험에 빠진 것이었다.
벼리가 눈물을 흘리자 재인이 입술로 눈물을 닦아줬다.
벼리는 재인을 껴안았다.
안아줬다.
우는 벼리를 재인이 위로해야 했지만 벼리가 재인을 안아서 쓰담거렸다.
벼리는 재인을 위로하고 싶었다.
벼리는 재인의 얼굴을, 목선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벼리의 손은 재인의 모든 곳을 스쳤다.
재인의 듬직하게 커다란 손, 손등을 천천히 스쳤다.
솜털들이 하나하나 살아서 벼리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벼리는 다시 재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재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재인의 가슴을 다시 손으로 스쳤다.
재인의 심장에서 뛰는 박동이 벼리의 손끝으로 와닿았다.
함께 쿵쿵거리며 벼리의 가슴으로 닿았다.
벼리는 다시 재인의 등에 살포시 얼굴을 기댔다.
재인의 등을 천천히 손으로 스치며 위로를 전했다.
벼리는 재인의 모든 세포들을 하나하나 위로했다.
벼리의 사랑과 불안은 어떤 형태로든 재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재인은 벼리의 것보다 훨씬 더 간절하게 스치고 또 스쳤다
재인의 손길은 두려움으로 더욱 간절하였다.
사랑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우주가 드나들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우주의 폭풍과 같은 위로를 얻었다.
벼리는 재인의 품속에서 잠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잠든 여인은 편안했다.
다음 날 어김없이 재인은 벼리의 곁에 없었다.
언제쯤 재인의 아침을 만날 수 있을지 벼리는 온몸을 웅크렸다.
벼리는 몸을 웅크려 자기 몸에서 빠져나간 재인의 공백을 없애고자 했다.
자신이 품을 수 없는 재인의 아침은 여전이 멀었다.
“대표님은 본가에 가셨어요. 요즘 부쩍 본가에서 부르시네요.”
벼리는 간단히 아침을 먹고 꽃달로 내려왔다.
어제 랜디와 갑자기 헤어졌다.
랜디의 숲에서 봤던 블루문 가든의 나무들이 궁금했다.
랜디가 있으면 물어보려고 했다.
나무들이 벼리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랜디는 없었다.
민 실장이 두 명의 여자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품이 있는 여인이었다.
향기가 깃든 여인이었다.
다른 한 명은 여린 몸집의 코스모스와 같은 여인이었다.
모두 기품이 있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민 실장이 벼리를 보고 불렀다.
“벼리!”
“안녕하세요?”
“벼리, 인사해. 한국대 김 교수님 사모님이셔. 이 분은 사모님의 플로리스트 제자야.”
김 교수의 사모는 얼굴이 단아하고 맑고 고왔다.
멀리서 봐도 단아함과 기품이 저절로 드러났다.
함께 있는 제자라는 분 역시 같은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사유라고 해요. 여긴 내가 사랑하는 제자.”
“윤지라고 해요. 반가워요.”
사유와 윤지라고 했다.
나중에 민 실장이 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줬다.
사유에게 친한 언니가 있었다.
언니라고 불렀지만 나이가 많았다.
그런데 친한 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사고사를 당했다.
친한 언니에겐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의지가지가 없었다.
그 딸이 윤지였다.
윤지는 당시 초등학교 졸업반이었다.
윤지는 엄마의 장례식에서 만난 사유의 옷을 꼭 붙들었다.
사유는 윤지를 차마 떨칠 수 없었다.
사유는 아이가 없었다.
사유의 남편 김 교수도 윤지가 집에 오는 것을 흔쾌히 허락했다.
사유는 윤지를 데려왔다.
윤지는 사유의 가족으로 살게 되었다.
사유는 윤지를 사랑으로 보살폈다.
윤지는 사유를 사랑으로 따랐다.
사유는 플로리스트였다.
어려서부터 꽃을 사랑해서 꽃 다루는 일을 좋아했다.
윤지도 사유가 하는 일을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플로리스트가 되었다.
플로리스트는 꽃을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보기 좋게 꾸미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플라워(Flower)와 아티스트(Artist), 혹은 꽃을 뜻하는 라틴어 플로스(flos)와 전문인 또는 예술가를 나타내는 접미사 이스트(ist)의 합성어다.
플로리스트를 한글로 풀어 쓰면 꽃, 잎, 나무 등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화훼장식가에 가까웠다.
“플로리스트는 꽃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해요. 꽃에 대한 기본 지식과 정보는 물론 미적 감각과 색채 감각도 익혀야 해요. 또한 화훼가 시들지 않도록 적정 온도와 습도를 갖추어 보관할 수 있어야 하죠. 그리고 플로리스트만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려면 창의력도 필요해요.”
“꽃을 예쁘게 만드는 것이 간단한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단순하지 않아요.”
“물론 만들기를 좋아하는 꼼꼼하고 정교한 손동작도 필요해요. 그리고 모든 걸 몸으로 해야 하잖아요. 화분을 지고 나르려면 건강한 체력은 필수예요. 꽃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려면 미적 감각과 장식기술은 기본이고 식물의 학명과 꽃의 종류, 꽃말 등 폭넓은 원예 지식이 요구돼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에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쉽지 않겠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부지런함과 성실성이에요. 식물은 손으로 직접 만지고 보살피지 않으면 바로 죽어버리니까요.”
“이렇게 멋진 플로리스트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영광이라니 가당치 않아요.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알게 된 내가 영광이에요.”
사유는 친절한 여인이었다.
윤지는 곁에서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참으로 곱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여인이었다.
“참, 그리고 여기 사유 사모님도 파리에서 오셨어. 재인 씨랑 같이 지냈대.”
“아, 파리에서 함께 지냈다던 교수님 사모님이셨어요? 재인 씨가 말했어요. 너무 좋으신 사모님이셨다고.”
“재인 씨 와이프구나. 반가워요. 재인이 예쁜 아내를 얻었네. 내가 한 일이 없어. 아이들이 워낙 알아서 잘 지냈어.”
“재인 씨가 오늘은 없어요. 한 번 보러 오세요. 재인 씨가 사유 사모님 보면 반가워 할 거예요.”
“응, 그래. 한 번 보러 갈게.”
사유와 윤지가 갔다.
민 실장은 윤지와 잘 아는 사이라고 했다.
같은 플로리스트인데다 민 실장이 파리에 공부하러 갔을 때 윤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윤지는 어려서 엄마가 돌아가시고 엄마의 동생으로 지내는 사유를 따라 파리에서 공부했다.
윤지는 부모를 잃었지만 부모로 사유를 선택했다.
윤지의 진심이 전해져 다행스럽게 사유는 윤지를 받아들였다.
윤지는 매우 선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사유가 하는 모든 일을 아주 잘 따라했다.
파리에서 사유가 아이들을 돌봐야 할 때면 사유에게 뭐가 필요한 지를 잘 알았다.
사유가 플로리스트로서 일을 하고 있을 때면 뭐가 필요한지 언제나 미리 준비했다.
수술방에서 수술간호사들이 수술의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착착 건네듯 사유가 필요한 모든 것을 윤지는 알아서 착착 잘 건네주었다.
윤지는 없는 듯 조용했다.
그러나 언제나 사유의 곁에 있었다.
김 교수 내외와 윤지는 파리 그린섬에서 같이 지냈다.
더없이 이상적인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살았었다.
한국에 와서도 이들은 그린섬 회합을 했는데 김 교수 역시 그린섬 클럽의 회원이었다.
사유와 윤지는 클럽 회원은 아니었지만 친목모임에선 한 번씩 만나는 사이였다.
김 교수는 사유를 사랑했다.
김 교수가 사유를 사랑하는 것은 조금 특별했다.
사랑의 방법이 특이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의 마음이 특별히 지극하였다.
사랑의 마음은 주로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김 교수의 그림 주제는 늘 사유와 사랑이었다.
그림은 주로 사랑하는 대상인 사유의 초상이었다.
혹은 사랑에 빠진 사유의 그림이었다.
사유하는 사유이기도 했다.
모든 주제에서 사유가 있었다.
사유라는 실제 인물이거나 사유라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김 교수가 사랑하는 순수에 열광했다.
김 교수의 그림은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사유는 플로리스트였다.
사유의 그림에는 여러 꽃들이 함께 등장했다.
사유가 꽃과 함께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한동안 사유의 꽃을 찾았다.
김 교수의 그림 속 사유의 꽃은 많은 인기를 끌었다.
김 교수의 사유 그림이 발표되면 한동안 사유의 곁에 있던 꽃이 절판되곤 했다.
김 교수는 사유를 신비한 여인으로 만들었다.
그림 속의 사유는 신비로운 표정이었다.
사람들은 그림 속의 사유를 사랑했다.
몽환적 표정의 환상 속 그녀를 사랑했다.
누구나 꿈을 꾸는 여인이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 사유를 김 교수는 한없이 사랑했다.
플로리스트 사유는 꽃과 함께 하는 모든 일을 사랑했다.
가끔 김 교수가 무리한 모델로의 역할을 요구했지만 늘 곁에 꽃이 있어 그 또한 사랑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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