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_사유는 내 곁에 살아 있어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54화>
사유는 내 곁에 살아 있어
* * * * *
새벽 2시까지 정원에 나무가 없었다.
아침에 봤을 때 새로운 나무가 하나 늘었다.
밤새 수상한 차량행렬의 불빛이 이어졌었다.
재인은 어젯밤 본가에 가서 오지 못했다.
요즘은 본가에서 재인을 너무 자주 불렀다.
재인이 그린섬에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자주 불러서 집에 돌려보내지 않았다.
재인에게 어떤 일이 있는지 벼리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요 며칠 간의 재인의 행동은 냉담 그 자체였다.
일부러 벼리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잔인했다.
벼리는 재인과 함께 했던 좋았던 순간이 자주 떠올랐다.
아니 너무도 많이 그 순간과 함께 있었다.
둘이 계약결혼이긴 했다.
스킨십은 안 된다는 계약을 정했으나 남녀의 넘치는 감정은 계약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분명 뜨거운 것이 있었다.
뜨거운 것은 사실이었으며 뜨거웠을 때는 모든 것이 진실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벼리의 생각 속에서의 일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자에게 사랑은 무엇일지 벼리는 생각했다.
지금 실종사건과 관련해 위급한 상황에서도 벼리는 사랑을 생각했다.
정황상 재인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그럼에도 재인을 걱정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벼리는 재인과 시간을 보내면서 무조건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말았다.
여러 의심의 상황에서도 무조건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었다.
벼리가 재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안아주고 싶은 마음인 것은 아마도 그런 마음 때문일 것이었다.
그런데 재인은 돌아오지 않았고 정원에는 새로운 나무가 하나 늘었다.
누군가 희생자가 한 명 생겼을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벼리는 먼저 재인에게 확인하고 싶었다.
어젯밤 재인은 그린섬에 없었다.
그럼 재인은 나쁜 일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린섬에 왔을 것이다.
벼리가 믿고 싶은 이야기였다.
벼리는 재인에게 톡을 보냈다.
회사에 가 있다면 회의를 하거나 바쁠 시간이었다.
《어디에요? 어제는 안 들어와서 걱정됐어요. 무슨 일 있어요?》
바로 답이 왔다.
《본가에서 잤어. 연락 못해서 미안해. 대유엔터테인먼트 일과 관련해 회장님과 이야기가 길어졌어. 오전에 영화 관련 중요 미팅이 있어. 미팅 끝나고 집에 일찍 갈 거야. 집에서 봐. 저녁은 랑데부에서 먹자.》
재인의 문자 내용은 어젯밤 그린섬에서 있었던 일과는 무관해 보였다.
재인과 무관한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또 바보처럼 생각했다.
아침에 박 여사는 간단한 브런치를 챙겨주고 일이 있다며 외출했다.
지하에서 있었던 사람이 박 여사라고 했다.
벼리는 어젯밤 차량 행렬과 박 여사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박 여사는 아침에 많이 피곤한 얼굴이었다.
평소에는 그냥 능력이 뛰어난 분이구나, 라고 단순히 생각했는데 그린섬 지하의 일을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피곤한 얼굴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일이 있다고 했는데 혹시 그린섬 지하의 일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먼저 생겼다.
벼리는 민수에게 전화했다.
“오빠, 여기 정원에 나무가 하나 새로 늘었어.”
“무슨 나무인지 알아?”
“내려가서 보려고 해, 보고 말해줄게.”
벼리는 그린섬 정원으로 가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다.
꽃달의 민 실장을 만났다.
민 실장은 뭔가 허둥거리고 있었다.
“실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왜 나와 계세요?”
“사유 선생님이 교통사고가 났대. 어떡해...”
민 실장은 거의 울상이었다.
“교통사고요?”
“어젯밤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대. 아주 크게 났다고 해.”
“돌아가셨어요? 어떻게 갑자기 그런?”
벼리는 깜짝 놀랐다.
사유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했다.
그럼 어젯밤의 차량 행렬은 사유의 사고로 인한 것이었 수 있었다.
정원에 심긴 나무는 어쩌면 치자나무였을 것이었다.
“지금 장례식에 가려고 해. 오늘 옷을 이렇게 입고 와서 집에 들렀다 가려고 해. 재인 씨는 사고를 알고 있겠지? 전화해봐.”
민 실장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아침에 재인 씨는 문자로 저녁에 랑데부에서 식사하자고 했었다.
어젯밤 사유 사고 소식을 들었다면 그런 문자는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재인 씨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출근했을 것 같아요. 영화 관련 중요미팅이 있다고 했어요.”
“그럼 어서 연락해봐. 사유 선생님은 내게 스승님인신데... 좀전에 윤지에게서 전화가 왔어.”
“재인 씨는 파리에서 함께 지낸 분이니 소식이 닿았을 것 같기는 해요. 그래도 제가 다시 연락해볼게요.”
“어떻게 이런 일이....”
“김 교수님 상심이 얼마나 크실까요? 어젯밤 같이 귀가하셨는데 어떻게 사고가 난 거예요?”
“사고 이야기는 아직 자세히 못 들었어. 김 교수님이 사유 선생님을 유난히 사랑하셨다는 이야기는 유명했어. 알지? 첫사랑이었고 교수님의 작품 모델이기도 하셨어. 김 교수님이 유난히 꽃을 많이 그리셨는데 그곳엔 언제나 사유 선생님이 있었어. 사유 선생님과 꽃을 언제나 같이 그리셨어.”
“그래서 사람들이 사유 선생님과 같이 그려진 꽃에 열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김 교수님은 사유 선생님이 본인 인생의 유일한 한 송이 꽃이라고 했어. 그 꽃이 없으면 자신은 아마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고 하셨는데 슬픔을 어떻게 하실지 걱정이야.”
“그 슬픔을 어떻게 할까요.”
“학생들 사이에 유명했어. 김 교수님의 순애보. 옛날부터 아주 유명한 이야기였지. 그런데 이렇게....”
“그런 분이 사모님을 잃었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실까요?”
“교통사고가 아주 크게 났다는 것 같아. 형체도 알아볼 수만큼.”
“재인 씨에게 전화해서 물어봐야겠어요. 알고 있는지.”
“그래, 전화하는 게 좋겠다. 장례식장은 서주병원 장례식장이야.”
벼리는 서둘러 재인에게 전화했다.
“응, 알고 있어. 나도 이제 알아서 급히 장례식장에 이제 막 도착하는 길이야.”
“마음 아프시겠어요.”
“응, 조금 정신이 없어. 다들 장례식장으로 오기로 했어. 벼리도 장례식장으로 와.”
“연이 언니랑 같이 갈게요. 민수 오빠도 같이 갈게요.”
“그래, 그렇게 해. 그럼 있다가 봐.”
재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온 분이었다.
가까운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큰 충격일 것이다.
그것도 전날 밤에 같이 식사한 사람이 갑자기 사고를 당했다면 그 충격은 너무도 클 것이었다.
연이에게 전화했다.
“언니, 사유 선생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맙소사. 오늘 점심에 인터뷰 잡혀 있었어. 그럼 어제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어?”
연이는 민수와 명훈과 함께 그린섬으로 오기로 했다.
함께 장례식장에 가기로 했다.
벼리는 김 교수의 슬픔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걱정했다.
연이와 민수, 명훈이 벼리를 데리러 왔다.
함께 서주병원 장례식장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있었다.
재인은 김 교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벼리 일행은 잠시 기다렸다.
둘의 이야기가 끝나자 일행은 김 교수 앞으로 가서 인사했다.
“교수님, 어떡해요. 사모님을 더 이상 볼 수 없으시다니. 어떻게 위로를 드려야 할지.”
어제 인터뷰를 위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던 연이가 김 교수를 걱정하며 인사를 건넸다.
“연이 씨,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사유는 언제나 내 곁에 살아 있어요. 내 작품에 살아 있고 언제든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살아 있어요. 사유는 늙지 않는 영원한 삶을 얻었으니 괜찮아요. 내게는 늘 아름다운 지금 모습 그대로일 테니까.”
“맞아요. 교수님, 교수님이 사랑했던 기억은 그렇게 영원할 테니까요.”
김 교수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인사할 때도 덜 슬퍼 보였다.
모두들 김 교수가 사유를 잃은 슬픔으로 말도 못할 줄 알았었다.
“교수님, 너무 힘들어 보여요. 이쪽으로 잠시...”
재인은 김 교수를 한 쪽으로 데리고 갔다.
재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자 김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어두웠지만 벼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암울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렇게 처참하게 돌아가셨다는데 김 교수님 상심은 한 고비를 넘긴 사람처럼 보여.”
“좀 이상해. 남자들의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 그래, 오빠?”
“남자의 사랑이 누군가의 죽음에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맞지 않아. 남자들의 슬픔도 만만치 않게 커. 김 교수님이 저렇게 괜찮은 것은 좀 이상하다고 할 수 있어.”
“아무리 작품 속에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 어떻게 영원히 곁에 있어? 혹시 죽었다는 말이 너무 실감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닐까? 충격으로?”
벼리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김 교수의 꽃 그림에 자주 등장했던 꽃이 치자꽃임을 떠올렸다.
연이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치자꽃 이야기를 했다.
“치자꽃의 꽃말은 청결, 순결, 행복, 한없는 즐거움이라면서 아내가 자신에게 그런 의미라고 했어.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의 순결과 행복을 지켜주며 한없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본인의 꿈이라고 했어.
“그래서 김 교수님 작품 이름은 ‘사유, 순결’, ‘사유, 행복’, ‘사유, 즐거움’, ‘사유, 영원’ 이런 식이었잖아. 사유란 단어의 의미도 있었지만 사유는 아내의 이름이기도 했으니까 모두 중의성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어.”
“그림 속의 꽃은 향기만 없을 뿐 살아있는 꽃처럼 보였어. 사실주의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안에 있는 아내 사유의 모습은 늘 환상으로 표현되었어. 몽환적이기도 하고 뭔가 약에 취해 있는 모습이기도 했어.”
“그래서 그림 속에서 현실은 꽃이었고 환상은 사유였다고 해. 그런 것들이 해석에 해석을 낳았고 그의 작품을 선호하게 하는 장치이기도 했다고 할 수 있겠지?”
둘은 치자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린섬 정원에 심긴 나무는 치자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은 이야기를 하다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재인은 장례식장에 더 있겠다고 했다.
그래야 할 것이었다.
재인의 곁에는 언제나 성 부장이 함께 있었는데 성 부장이 보이지 않았다.
지하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지하에서 성 부장이 뭔가를 하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은 더 큰 소름이 돋게 했다.
벼리는 힘들어서 장례식장을 나왔다.
연이와 민수, 명훈은 장례식장에 있다 그린섬으로 오기로 했다.
벼리는 그린섬에 도착하고 꽃달에 들어섰다.
랜디는 없었다.
며칠 랜디를 보지 못했다.
자연이 벼리를 맞았다.
“요즘 랜디가 보이지 않아요? 어디 갔을까요?”
“응, 나무가 아파서 랜디가 다녀올 곳이 있다고 했어. 곧 올 것 같아. 큰 슬픔이 있을 거라고 했어. 그래서 미리 슬프다고 했어.”
“들었어요? 사유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요.”
“응, 들었어. 민 실장님은 장례식장에 가셨어. 윤지를 위로해야 한다고.”
“저도 장례식장에 다녀왔어요.”
“그랬구나. 벼리, 괜찮아? 여기 라벤더 차야. 마음을 안정시켜 줄 거야.”
자연이 벼리를 자리에 앉혔다.
“제가 좀 안 좋아 보이죠?”
“응, 무슨 일 있어? 김교수 장례식장에 가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돌아가신 사모님을 저도 알잖아요. 그런데 처참하게 돌아가셨다니 교수님이 얼마나 상심이 크실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괜찮으시더라고요. 물론 기운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김 교수님 보기만 그렇게 괜찮아 보이고 사실은 아닐 수 있어. 사유 선생님 사고가 난지 얼마 안 됐잖아? 그런데 벌써 이런 소문이 있어.”
“무슨 소문인데요?
“사유 선생님 교통사고가 끔찍했다고 했어.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는데 김 교수님이 시신을 모두 원래대로 해달라고 주문했나봐. 사람들이 모두 김 교수를 말렸는데 어쨌든 죽은 시신을 어느 정도는 꿰맸다나 봐. 그래서 그나마 위로가 되었을까?”
“정말 마음 아픈 일이에요. 누군가 죽을 때 고운 모습으로 죽는 것도 행운인가 봐요.”
“그런 일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죽을 때 모습은 그래도 온전하길 바라는 게 당연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죽은 사람을 원래대로 꿰매달라고 난리가 아니었다니 그만큼 슬펐다는 말이겠지.”
벼리는 죽은 사람을 원래대로 돌리려고 했다는 말이 슬픔보다는 왠지 섬뜩했다.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못하는 슬픔은 섬뜩하게 느껴졌다.
김 교수의 곁에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까지 섬뜩한 것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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