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_사랑에 온 우주를 쏟아 부었다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60화>
사랑에 온 우주를 쏟아 부었다
* * * * *
달이 연못에 잠길 즈음 연못에 불이 비치는 듯한 환영을 보는 것은 벼리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각이었다.
벼리는 지하에서 뭔가 일어나는 사건의 시간에 연못을 비추는 불빛의 비밀을 밝히려고 했다.
회합이 있는 때 알 수 없는 빛이 연못을 감싸던 순간을 밝혀야 했다.
벼리는 재인이 나간 후 그린섬 연못으로 향했다.
재인을 만나면 잠이 안 와서 산책을 나온 것이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벼리는 재인이 작업실로 내려간 후 민수와 계속 톡을 주고받았다.
민수와 명훈은 그린섬 빌딩 오른쪽 측면에 비밀통로가 있으며 CCTV 확인 결과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했다.
그린섬 빌딩의 비밀 통로로 가는 이들의 행렬은 적지 않았다.
그날 밤 하늘은 맑았고 그믐이 가까운 하현달은 늦은 시간에 떴다.
그믐달이 그들에게 의미가 있었으므로 벼리에게도 의미가 깊었다.
벼리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달이 작용하는지 궁금했다.
밤새 지켜보기로 했다.
벼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재인의 방에서 정원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아직 지하로 들어가는 안전한 길은 확보하지 못했다.
민수가 지하 5층에서 내려가는 통로를 알려줬지만 벼리가 그곳에 갔었을 때 그곳은 이미 막혀 있었다.
벼리는 계속 정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새벽 2시가 넘었을 때 드디어 정원에 푸른빛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
벼리는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 촬영을 했다.
분명 달이 연못에 잠기는 것 같더니 푸른빛이 가득 돌고 어느 순간 빛이 사라졌다.
푸른빛이 가득 도는 순간에는 꽃들의 비명이 들렸다.
아주 먼 지하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꽃들의 비명인 것은 확실했다.
벼리에게 그 소리는 너무도 괴롭게 들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생명을 갈가리 찢는 지옥의 소리였다.
푸른빛이 떠돌 때 정원에는 슬픔이 넘쳐났다.
나무들의 슬픔이 홍수에 떠밀려 가는 것 같았다.
벼리는 서둘러 정원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재인이 자신을 의심할지 몰랐지만 모른 척할 수 없는 슬픔의 무거움이었다.
벼리는 정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달려갔다.
정원의 슬픔이 벼리에게도 스며들어 벼리는 가슴이 먹먹하고 아팠다.
그린섬의 지하에선 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어떤 일들을 벌이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당장 정원의 나무들에게 슬픈 일들이 생긴 것이었다.
무작정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원으로 뛰어갔다.
벼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슬픔은 뭐라고 표현하기도 힘들었다.
원초적 슬픔이었다.
벼리는 슬픔의 연유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서둘러 정원으로 뛰었다.
벼리가 정원의 담장을 열려는 순간, 나무들이 서둘러 문을 열어줬다.
정원에서 푸른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치자나무 옆에 아카시아나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라진 푸른빛과 아카시아는 어떤 연관이 있었다.
벼리는 아카시아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치자나무와 아카시아나무는 바짝 가까이 있었다.
연리지일 리가 없는 나무였는데 연리지처럼 두 나무의 슬픔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
두 나무는 벼리에게 어떤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이 슬픔은 무엇이에요?”
벼리는 두 나무를 쓰다듬었다.
두 나무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린섬 정원의 나무들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린섬 정원에 쳐진 결계가 나무들의 말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벼리의 손목에 있던 나뭇잎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이 푸른 숲이 되었다.
랜디가 준 힘이었다.
랜디의 이파리로 주변이 푸른 숲이 되자 나무들은 벼리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카시아나무와 치자나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벼리야, 우리들은 사랑하는 이의 영혼을 담고 있는 나무들이야. 사람들은 태어나면 누구나 자신의 별을 갖는다고 하지? 그리고 또 하나 갖게 되는 게 있어. 그건 나무들이야. 하늘엔 별을 갖고 땅엔 나무를 갖는 거야.”
“누군가 죽으면 하늘의 별이 떨어지고 그 별은 땅의 나무에게로 스며들어.”
“오늘 내가 사랑하는 이의 별이 떨어졌어. 그럼 나의 분신이 이 세상을 떠났다는 거야. 사람들의 정령이 죽을 때 정령은 하늘의 별에게로 가닿아 다시 나무에게로 떨어지니까. 그것이 바로 소멸이야.”
“슬픈 이야기야.”
“그런데 별이 내게로 떨어지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졌어. 누군가 별을 훔쳐갔어. 별은 영혼을 담고 있어. 그런데 그 별을 훔쳐갔으니 그 영혼은 소멸을 못하는 거야. 소멸하지 못하는 영혼은 슬픈 나무를 남기는 거야.”
“어느 날엔가 나무들이 눈물을 흘리는 날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기 때문이야.”
“나의 별은 운명적으로 떨어질 때가 되어 떨어진 별이 아니야. 누군가 공격해서 끌어내렸어. 억울한 죽음은 그래서 더욱 슬퍼. 억울한 죽음을 당한 별은 떨어질 때 푸른빛을 띠어.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죽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특히 다른 이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별은 특히 푸른빛을 띠어. 우리가 푸른빛을 우울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슬픔의 무게가 크기 때문이야. 오늘 나의 별은 가장 푸른빛이었어.”
“그런데 누가 억울하고 슬픈 푸른별을 훔쳐 갔을까?”
“우린 가까이 있는 나무들과 같은 운명을 살아. 옆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같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일 거야. 그래서 우리들은 슬픔이 같아.”
“나의 잎을 한 번 볼래?”
벼리는 아카시아나무의 잎을 본다.
잎이 온통 젖어 있다.
비를 흠뻑 맞은 나뭇잎이다.
하지만 나뭇잎들의 윗면이 아니라 뒷면에 눈물처럼 물이 대롱대롱 달려있다.
모든 잎들마다 울고 있는 것처럼 눈물이 대롱대롱 달려있다.
치자나무도 눈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잎들은 눈물방울이 무거워 처져 있다.
아카시아나무의 눈물방울이 투두둑 떨어진다.
나무도 울 수 있다는 것을 아카시아나무는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벼리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아카시아나무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윤지가 아니었으면 누구였을까?’
‘어떻게 재인의 정원에 심어졌을까? 재인과 어떤 관계일까?’
‘오늘 밤 회합은 또 어떤 관련이 있을까? ’
분명 푸른빛이 감돌았던 연못, 울고 있는 나무는 관계가 있을 것이었다.
누군가 죽었다고 했다.
벼리는 아카시아나무를 껴안았다.
오래도록 눈물을 같이 흘리며 껴안았다.
나무가 운다는 것은 이렇게 온몸의 세포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한 생명이 끝나는 순간에 별과 나무가 울어준다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조금은 위로가 될 것이다.
어떤 생명이든 죽음이 닥쳐올 때 울어줄 이가 있었던 것이다.
별과 나무들이 있었다.
벼리는 얼마나 울었던지 온몸이 아팠다.
나무가 흘리는 눈물은 온몸으로 운다는 것이고 그것의 고통은 벼리가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다.
통점에 대한 감각이 없을 것 같은 나무의 아픔이었다.
그만큼 깊은 곳의 아픔이었다.
벼리는 아카시아나무를 다시 한 번 꼭 껴안아 주고 집으로 올라왔다.
집으로 올라와서 바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일어나보니 재인이 자신의 곁에 누워있었다.
마치 아이처럼 동그랗게 구부리고 잠이 들어있었다.
‘재인은 언제 돌아온 걸까?’
‘언제 내 곁에 누운 걸까?’
재인은 몹시 힘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술 냄새도 많이 났다.
회합이 있는 날은 언제나 독한 술을 마시고 왔다.
평소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재인이었다.
벼리는 자신도 모르게 재인을 껴안았다.
처음엔 가만히 껴안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힘이 들어갔다.
벼리가 힘을 주자 재인이 눈을 떴다.
벼리와 눈이 마주치자 재인은 갑자기 키스를 퍼부었다.
사랑을 하지 않고서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의 뜨거움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선 거칠게 벼리를 껴안았다.
재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손길도 거칠어졌다.
갑작스런 재인의 거친 키스와 몸짓을 벼리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것의 속도와 에너지는 멈출 수 없었다.
재인과 벼리는 하나가 되었다.
벼리도 어젯밤의 슬픔이 컸던 만큼 격정으로 뜨거워졌다.
재인은 벼리를 껴안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재인의 사랑한다는 소리에 모든 것이 지워지고 그저 사랑만 남아서 타올랐다.
벼리도 재인을 놓치고 싶지 않아 더욱 뜨겁게 껴안았다.
둘은 사랑이 아니면 세상의 종말이 올 것처럼 사랑에 온 우주를 쏟아 부었다.
결코 다시 이 순간이 오지 않을 것처럼 사랑에 온 밤을 쏟아 부었다.
어느 순간 둘의 힘은 소멸되었고 재인도 벼리도 그 끝에서 껴안은 팔을 결코 풀지 않았다.
이 순간이 지나면 무언가 붕괴될 것 같은 절실함으로 오래도록 그 끝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재인은 잠이 들었다.
벼리는 평온하게 잠든 재인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명치끝에서 발원한 슬픔이 온몸을 휘돌아 벼리를 흔들었다.
벼리는 소리 없이 다시 또 재인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리고 벼리도 어느새 잠이 들었다.
벼리가 일어났을 때 재인은 없었다.
시간이 벌써 11시였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다섯 개나 있었다.
확인하니 꽃달 민 실장의 전화가 두 번이었고 연이에게서 전화가 세 번이었다.
먼저 민 실장에게 전화했다.
“민 실장님. 늦게 잠들어서 전화 온 줄 몰랐어요.”
“벼리 씨, 일이 좀 있어서 전화했어.”
“일이요? 무슨 일이에요?”
“벼리 씨도 윤지 씨를 알지?”
“그럼요, 윤지 씨는 꽃달에서도 많이 봤잖아요. 사유 선생님의 일로 일본에 출장 갔다고 들었어요. 윤지 씨가 사유 선생님 일로 가장 슬펐을 것 같아요. 사유 선생님을 존경하고 잘 따랐잖아요.”
“응, 그런데 윤지 씨가 연락이 닿질 않아.”
“윤지 씨는 출장 가면 원래 연락 안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물론 그렇지. 원래 연락을 잘 안 하는 친구야. 그래서 연락할 생각도 없이 지내는데 아침에 일본에서 전화가 왔어. 오기로 했다던 윤지 씨가 안 왔다고.”
“출국한 지 벌써 하루가 지난 거 아닌가요?”
“맞아. 어제 아침 비행기 탔다고 들었어.”
“이상하네요. 무슨 일일까요?”
“윤지 씨가 항상 정확한 사람인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야. 내가 벼리 씨에게 연락한 것은 혹시 개인적으로 연락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던 것이었어.”
“윤지 씨 알 만 한 사람은 없어요?”
“응, 윤지 씨는 부모님이 안 계시잖아. 사유 선생님이 데려다 키운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막상 윤지 씨 관련해서 연락하려 하니 아무도 없네. 일본에서 나에게 연락한 것은 윤지가 비상연락 전화번호로 내 번호를 남겼나봐. 그래서 일본에서 나에게 전화한 거야.”
“무슨 일일까요? 걱정이에요.”
“응, 벼리 씨가 모른다면 김 교수님에게 다시 물어봐야지.”
“무슨 일인지 연락 닿으면 제게도 연락 주세요. 걱정돼요.”
“쉬는데 전화해서 미안. 어서 더 쉬어.”
“무슨 말씀을요, 윤지 씨 일은 저도 걱정되니까 연락 주세요.”
벼리는 주변의 사람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무서웠다.
아카시아나무는 윤지의 나무였다.
어젯밤 그린섬 정원의 아카시아나무가 슬픔에 괴로워 밤새 울었었다.
‘결국 윤지의 죽음이었을까?’
윤지가 일본에 가서 다른 누군가의 희생인가 했었다.
윤지가 실종되었다면 정원의 아카시아나무는 윤지의 나무였다.
멍한 상태로 있는데 핸드폰의 진동음이 울렸다.
연이였다.
“응, 언니. 무슨 일 있어?”
“어젯밤부터 갑자기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어.”
“미안, 잠들었어.”
“속도 좋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그리 깊은 잠을 자?”
벼리는 재인과 있느라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지 못했다.
“응, 나도 모르게 깊이 잠들었나 봐. 언니는 별일 없지?”
“나야 별일이 없지.”
“참, 윤지 씨 일본에 갔다고 들었지? 일본에 가서 다행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아침에 민 실장에게서 전화가 왔어.”
“무슨 일이야? 윤지 씨한테 무슨 일이 있어? 혹시 그린섬과 연관이 있어?”
“그런 소리하지 마. 나는 이미 충분히 무서워.”
“왜, 의심할 것은 모두 의심해 봐야지. 혹시 재인 씨를 좋아해서 의심을 덮으려는 거는 아냐?”
“아냐, 그런 거. 그냥 이미 의심이 충분하다는 이야기야.”
“알았어. 그래도 벼리랑 사는 남자인데 너무 몰아가는 것은 아니지. 일단 민수 씨에게 이야기해야겠다. 출국기록이랑 알아봐 달라고 해야지.”
“그래, 민 실장님 걱정하니까 오빠에게 연락해보라고 할게.”
벼리는 민 실장에게 민수의 전화번호를 문자로 남겨줬다.
갑자기 사유 선생님 일을 돕던 윤지가 연락이 닿지 않는다니 불안했다.
정원에 심긴 나무는 아카시아나무였다.
불안이 아닌 확실한 윤지의 사건으로 판단될 상황이었다.
재인에게 전화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어쩐지 윤지 일을 알 것만 같은 불안은 벼리를 슬프게 했다.
벼리는 재인에게 전화했다.
“재인 씨, 혹시 윤지 씨 소식 알아요?”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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