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_우연과 운명은 한 끗 차이(2)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8화>
우연과 운명은 한 끗 차이(2)
* * * * *
그린섬 정원은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재인 개인만을 위한 정원이었기 때문이다.
재인은 그린섬 빌딩의 모든 것을 재인의 취향에 맞춰 설계했다.
정원 역시 처음부터의 설계에 있었다.
그린섬 빌딩의 9층 펜트하우스의 재인의 방에서는 그린섬 정원이 한눈에 들어 왔다.
재인은 자신의 방에서 자주 정원을 내려다 봤다.
달 모양의 연못과 푸른 잔디를 볼 때마다 재인은 마음이 평온해지고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정원에 누군가 있었다.
푸른 빛깔의 원피스를 입은 여자였다.
자신의 정원은 아무도 들어가선 안 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무슨 수로 들어간 것인지 당황스러웠다.
재인은 당장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못된 침입자를 처벌해야 했다.
그런데 재인이 내려갔을 때 정원의 침입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건물 앞으로 나갔다.
놓칠 수 없었다.
정원의 담장 앞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정원 담장이 원래 푸르렀나?’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를 배경으로 그린섬 빌딩의 담장은 더없이 푸르렀다.
그녀는 푸른 담장에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빛이 났다.
푸른 꽃이었다.
재인은 초록 담과 푸른 원피스가 그렇게 어울리는 조합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초록 담이라면 붉은 계열의 원피스가 훨씬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원피스는 붉은 계열이 아닌 푸른 빛깔이었다.
수레국화 원피스였다.
수레국화의 맑고 선명한 파랑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바람이 수레국화꽃을 흩뿌리며 웃고 있었다.
수레국화꽃의 꽃말은 행복이라는데 그녀는 행복 그 자체로 웃고 있었다.
그 무엇의 불안도 없었다.
남의 정원을 몰래 다녀간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재인은 침입자를 응징할 기분으로 달려 내려 왔었다.
그러나 침입자라는 적의는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초록 담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녀는 순정만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 같았다.
푸른 빛깔 원피스는 수레국화꽃으로 피어서 흩날리고 또 흩날렸다.
침입자라는 호칭은 대번 그녀가 되어 버렸다.
재인이 정원에 대해 너그러울 수는 없었다.
재인에게 너무도 특별한 정원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본 순간 전의는 사라져 버렸다.
정원에 대해 이렇게 너그럽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 누구니? 어디 사니? 정원에 어떻게 들어갔어? 대체 너 뭐야?”
그녀를 붙들고 소리를 질러도 모자랄 판이었다.
재인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가가서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다.
그 순간, 초록 머리를 한 어떤 사내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한 발 늦었다.
어쩔 수 없었다.
후퇴해야 했다.
재인은 어정쩡 도로에 서 있을 수 없어 꽃집 꽃달로 들어가고 말았다.
꽃집에선 민 실장이 재인을 맞았다.
“대표님, 어서 오세요.”
“민 실장님, 오랜만이에요.”
“커피 한 잔 하셔야죠.”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아직 더운 날이 아니었는데 더웠다.
시원한 아메리카노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재인은 얼결에 커피를 주문했다.
머릿속은 정신이 없었다.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초록 머리는 뭐지?’
‘수레국화 원피스 그녀는 또 뭐지?’
‘정원에 들어간 것 맞는데?’
재인은 카페의 구석진 자리로 갔다.
키 큰 해피트리 나무 뒤였다.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자리였다.
카페는 나무가 많아 자리와 자리 사이가 독립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인테리어의 거의 모든 부분을 식물이 차지하는 꽃달은 플랜테리어 카페라고 할 수 있었다.
플랜테리어는 식물(Plant)과 인테리어(Interior)를 접목한 단어로 식물로 실내를 꾸미는 인테리어를 말했다.
하지만 꽃달을 플랜테리어 카페라고 말하는 것은 카페의 입장이었다.
꽃집 입장에서 보면 주객이 바뀐 설명이었다.
꽃달은 카페보다 꽃집이 더 큰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그녀가 꽃달로 걸어 들어왔다.
초록 머리와 함께 들어왔다.
“랜디, 어서 와요.”
“실장님, 여기 귀여운 아가씨를 소개할게요.”
“반가워요. 귀여운 아가씨..”
초록 머리는 그녀를 소개할 때 여자 친구 소개하듯이 목소리가 올라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벼리에요. 은벼리.”
“이름도 귀여워요.”
그녀의 이름은 벼리였다.
“너무 귀엽죠? 꽃을 좋아하는 아가씨예요. 그런 아가씨라면 여기 꽃집을 들어와 봐야죠.”
“그럼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여기 꽃달이 정말 좋은 공간이죠.”
그녀의 목소리는 맑았다.
그녀의 말소리에서 수레국화꽃 푸른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저, 이 꽃집 너무 좋아해요.”
“난 이 아가씨가 너무 좋아요.”
랜디는 벼리의 말에 끼어들며 소년처럼 웃으며 좋아했다.
“랜디, 그런 말은 너무 앞서잖아. 아가씨 놀라겠다.”
“벼리는 너무 사랑스러운 요정이에요, 특별한 영혼을 가졌어요.”
“혹시 랜디가 찾고 있던 특별한 영혼의?”
“맞아요. 제가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요정이에요.”
재인은 멀대 같이 키가 껑충한 초록 머리 사내를 그린섬 빌딩에서 본 적이 없었다.
민 실장은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그린섬 빌딩의 사람들을 재인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키가 껑충한 초록 머리 사내라면 기억에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튀어나온지 모르는 초록 머리의 작업 멘트에 그녀가 웃었다.
특별한 영혼이니 요정이니 하는 가벼운 농담에 그녀가 웃었다.
재인은 살짝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재인은 비 오는 밤, 우산을 받고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비를 흠뻑 빨아들이고 있는 정원은 자라고 있었다.
“비에는 성장호르몬이 있대. 비가 온 날은 식물들이 쑤욱, 자란다니까. 나도 키 크고 싶어.”
영준이는 비 오는 날이면 가끔 일부러 비를 맞았다.
“넌 식물이 아냐. 종이 달라요. 식물이 아닌 동물, 그 중에서도 인간이라고. 호모사피엔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재인은 비가 올 때마다 영진이 생각났다.
키 크고 싶다는 영진과 성장호르몬은 비와 동시에 흘러내렸다.
그러나 오늘의 뇌리엔 온통 그녀가 가득했다.
생각이 깊어서였을까?
순간, 담 밖으로 어떤 푸른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재인은 담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담 너머로 누군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수레국화 원피스의 그녀였다.
재인은 서둘러 건물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그녀가 꽃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화분 앞에 앉아 뭔가 소곤거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 쪼그리고 앉아 뭔가 소곤거리는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뭐해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가까이 하고 최대한 조용히 물었었다.
그런데 그녀가 너무 놀란 것이 문제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갑자기 일어서며 균형을 잃었다.
재인은 넘어지려는 그녀를 붙잡아야 했다.
우산을 던지고 서둘러 그녀를 붙잡았다.
그렇게 비 오는 밤, 그녀를 만난 것이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영진의 말대로 운명일 수 있었다.
“우연이 운명과 다른 것은 뭔지 알아? 우연이 올 때, 그 우연이 가슴에 남으면 운명인 거야.”
“우연이 가슴에 남으면 운명이라고?”
“누구에게나 우연은 언제나 매순간 지나가는 일상이야. 그런데 어떻게 우연이 운명이냐고? 우연은 그냥 지나갈 뿐이야. 그런데 우연이 가슴에 남는다? 가슴에 남아서 뭔가 자꾸 신경이 쓰인다?”
“........”
“결국 우연과 운명은 가슴에 남느냐, 아니냐의 차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만 크게 다르지. 그래서 우연과 운명은 한 끗 차이라 이 말씀!”
재인은 어쩐 일로 영진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우연과 운명은 한 끗 차이야.”
“우연인데 가슴에 남으면 운명이야.”
“결혼해. 결혼해. 결혼해.....”
자꾸만 결혼해, 란 소리가 메아리쳤다.
재인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정신 차려!”
재인은 스스로를 나무라야 했다.
재인이 고개를 흔들면서 정신 차려야 한다고 말할 때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인터폰을 보니 주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재인이 문을 열자 주영이 튀어 들어왔다.
“오빠!”
주영이 재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재인을 언제나 운명이라고 말하는 주영이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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